성명 | 로저 모티머 Roger Mortimer | |
생몰년도 | 1256년 ~ 1326년 8월 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런던 | |
아버지 | 로저 모티머 | |
어머니 | 모드 드 브라오스 | |
형제 | 랄프, 에드먼드, 이사벨라, 마거릿, 제프리, 윌리엄 | |
배우자 | 루시 드 와프르 | |
자녀 | 로저 모티머 | |
직위 | 치크의 모티머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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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전쟁과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 참여했고, 디스펜서 전쟁에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따랐지만,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런던 탑에 갇혀 옥사했다.2. 생애
잉글랜드 오아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에서 초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와 제10대 에버게브니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 에바 마셜의 딸인 모드 드 브라오스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랄프(? ~ 1275), 에드먼드 모티머, 이사벨라[1], 마거릿[2], 제프리(? ~ ?), 윌리엄[3]이 있었다.1282년 이전에 에드워드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슈롭셔의 홉튼 웨이퍼스의 영주인 로버트 드 와프르의 딸이자 상속녀인 루시 드 와프르와 결혼해 브렉녹셔에 있는 펜실리와 티르 랄프의 영지를 획득했다. 1281년 에드워드 1세로부터 슈롭셔와 스태퍼드셔 전역에서 여우와 토끼를 사냥하는 걸 허락받았다. 1282년 형제 에드먼드, 제프리, 윌리엄과 함께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전쟁에 참여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모티머 형제는 사촌이었던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들은 빌스 성에서 허웰린에게 충성을 맹세할 테니, 빌스 성으로 와달라고 청했다. 허웰린은 이를 믿고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빌스 성으로 가다가, 도중에 매복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다. 그 후 그의 머리는 모티머 형제에 의해 루들런 성에 있던 에드워드 1세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허웰린이 빌스 성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에드워드 1세에게 직접 허웰린의 머리를 전달한 사람이 바로 로저였다.
에드워드 1세는 로저의 공적을 인정해, 1282년 6월 2일 웨일스의 포위스 왕 와독 그루퍼드 압 머독의 아들이자 반란 수괴 허웰린 퍼찬이 소유했던 모든 영지를 그에게 수여했다. 그 결과, 웨일스 중부에 치크(Chirk) 라고 불리는 새로운 봉건 영지가 만들어졌다. 로저는 새로운 소유지에 치크 성을 짓고, 그곳을 자기 주거지로 삼았다. 그 후 수년간, 로저는 에드워드 1세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자기 영지에서 왕을 위해 웨일스 궁수들을 모집했다. 1287년, 이스트래드 타우이의 반란군 지도자 라이스 압 마레두드 토벌전에 참여했다. 1294년 에드워드 1세와 함께 가스코뉴로 가서 프랑스군과 대적했으며, 1297년에도 가스코뉴에서 근무했다.
1300년과 1301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는데, 특히 1300년 케어라버록 성 공방전에 참여해 함락에 기여했다. 이후 왕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의 안내자이자 보호자로 선임되었다. 한편 1299년 2월 6일 치크 남작으로서 처음으로 의회에 소환되었고, 1301년 링컨 의회에 참여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영주들의 집단 서한에 서명했다. 1303년 다시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헀지만, 허가 없이 군대를 떠났다가 왕의 분노를 사 영지를 일정 기간 몰수당했지만, 왕의 용서를 받고 돌려받았다.
1307년 에드워드 2세가 왕위에 오른 뒤, 그는 에드워드 2세의 스승으로서 더욱 강대한 위세를 누렸다. 그는 국왕의 부관이자 웨일스의 순회 판사로 임명되었고, 웨일스에 있는 모든 왕궁이 그의 관리에 맡겨졌다. 그는 1307년부터 1321년까지 웨일스 전체를 왕의 대리인으로서 통치했으며, 그의 조카이자 제3대 위그모어 남작인 로저 모티머의 보좌를 받았다. 1310년, 로저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브렉녹셔의 블렌리프니 영주권을 종신토록 위임받았다. 이 영지는 원래 레지날드 피츠피터가 소유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 참전했고, 1319년과 1320년에 있었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1321년, 웨일스 판사로서의 직임을 연장하는 걸 인정받았다.
1309년 6월, 로저는 오웬 드 라 폴의 상속인인 그루퍼드 드 라 폴이 사망한 뒤 영지를 계승한 딸 하위즈 대신에 포이스의 행정을 맡아달라는 왕의 요청을 받았다. 이에 오웬 드 라 폴의 형제인 그루퍼드 드 라 폴이 웨일스 법에 따르면 자기가 영지를 계승해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루퍼드 드 라 폴의 주장은 그의 주군인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지지를 받았다. 그루퍼드는 왕실의 중재 제안을 거부하고 포위스 성을 포위 공격했다. 이에 로저는 왕에게 그루퍼드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한 뒤, 왕의 허락을 받아 포위스 성을 구원하고 그루퍼드를 축출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하위스와 그녀의 남편인 초대 찰튼 남작 존 찰튼이 포위스를 지배하는 걸 확정했다.
로저는 웨일스 공국의 모든 영토의 재판관으로서, 웨일스 전역을 왕처럼 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통치에 대해 웨일스 신민들의 불만이 거세졌다. 1314년 2월 19일, 랭커스터 백작의 강력한 권고에 밀린 에드워드 2세는 로저가 북웨일스의 판사만 맡도록 했고, 1317년 4월 3일에는 남웨일스의 판사만 맡도록 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얼마 안가 풀렸고, 로저는 종전처럼 웨일스 전역의 판사를 역임했다. 그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엄격하고 무자비한 판결을 내렸고, 이로 인해 다른 웨일스 귀족들과 적대 관계를 맺었다. 1316년, 로저는 조카 로저 모티머,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힘을 합쳐 글래모건에서 일어난 허웰린 브렌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그는 웨일스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하고, 종전과는 달리 반군에게 너무 엄한 처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왕에게 밝혔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강력한 주장에 따르ㅕ, 허웰린 브렌은 1318년에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1320년, 로저와 그의 조카 로저 모티머는 제2대 브라오스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와 고워 구매를 놓고 협상했다. 그런데 에드워드 2세가 그 해 12월에 고워 영지를 인수한 뒤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넘겨줬다. 이에 강한 반감을 품은 모티머 가문은 다른 웨일스 변경 영주들과 함께 디스펜서 전쟁을 단행했다. 1321년 5월 조카 로저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 드 보훈이 디스펜서 가문의 글래모건 영지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할 때 지원했으며, 1321년 6월 슈로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중재에 따라 북부 잉글랜드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에드워드 2세는 반군의 압력에 따라 1321년 7월 그들을 공식적으로 사면하고,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를 추방했다.
1321년 10월, 에드워드 2세는 반군을 상대로 군사적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고, 디스펜서 부자를 불러들였다. 모티머 가문과 웨일스 영주들은 돈캐스터에서 랭커스터 백작과 다시 의논했지만, 이번에는 서로간의 이해 관계가 어긋나서 통일된 전략을 짜지 못했다. 1321년 12월 왕실군이 글로스터에 도착했다. 1322년 초, 모티머와 헤리퍼드 사병대는 브리지노스에서 왕실군 선봉대를 격퇴하고 마을을 불태운 뒤, 세번 강 위의 다리를 파괴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워체스터를 거쳐 슈루즈베리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1월 14일에 세번 강을 건넜다. 여기에 북 웨일스에서는 로저의 권세를 질시하던 웨일스 관리 그루퍼드 르위드가 이끄는 왕실군이 치크 성을 기습 공략했다.
로저는 이러한 왕실군의 공세에 버티기 힘들었고, 랭커스터 백작은 도와주겠다는 약속만 해놓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1322년 1월 22일 슈루즈베리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조카 로저 모티머와 함께 항복했다. 두 모티머는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반역자로 기소되었으며, 모든 영지와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처단하면서 반란을 진압한 에드워드 2세는 남부 웨일즈와 북부 웨일즈에서 각각 24명의 대표를 요크 의회로 소집했다. 그들은 로저가 웨일스 공국 내의 귀족들에게 저지른 수많은 불의와 범죄 행위를 보고했고, 로저는 런던 탑에 종신 수감되었다. 조카 로저 모티머는 1323년 런던 탑에서 탈옥하는 데 성공헀지만, 그는 계속 갇혀 있다가 1326년 8월 3일에 옥사했고, 9월 14일에 헤리더프의 아담 올튼 주교에 의해 위그모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로저는 생전에 슈롭셔의 홉튼 웨이퍼스의 영주 로버트 드 와프르의 딸 루시 드 와프르와 결혼해 외아들 로저 모티머를 낳았다. 런던 탑에서 탈옥한 조카 로저 모티머는 1326년 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가문을 무너뜨리고 잉글랜드 최강의 권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이름의 사촌 로저에게 치크를 넘기지 않고 스스로 영주권을 차지했다. 1330년 로저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몰락한 후 처형된 뒤, 사촌 로저 모티머와 그의 아들 존 모티머는 치크를 되찾으려 했지만 무시당했고, 에드워드 3세는 1332년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에게 치크 영지를 수여했다. 1359년, 존 모티머는 치크의 나머지 소유지인 블렌리프니, 나버스, 세인트 클리어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아룬델 백작에게 넘기는 대가로 상당한 보상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