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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데일 전역 영어: Weardale campaign | ||
시기 | 1327년 7월 ~ 8월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의 페나인 산맥 동쪽 웨어데일 계곡 | |
원인 | 스코틀랜드를 제압해서 정권을 안정하려는 로저 모티머의 공세. | |
교전국 | ||
지휘관 | ||
결과 |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에든버러-노샘프턴 협약 체결. |
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27년 7월 ~ 8월, 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황폐화하는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치기 위해 단행한 전역.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최후의 전투이다.2. 상세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가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에 의해 폐위되고 장남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3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 날인 1327년 2월 1일, 스코틀랜드군이 노럼 성을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로저 모티머는 노섬벌랜드 일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는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침으로써 정권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다. 이 무렵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는 중병에 걸려 몸져 누웠지만, 그의 최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등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습격전을 이어갔다.1327년 6월 15일, 제임스 더글러스, 토머스 랜돌프, 마르 백작 돔날 2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기병 10,000명이 국경을 넘어갔다. 그들은 보급품과 짐을 거의 챙기지 않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식량을 현지 주민으로부터 빼앗았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군사 관행, 즉 병력을 집중시켜서 이동하는 것과는 현저히 달랐고, 스코틀랜드군은 이 때문에 높은 수준의 기동성을 지녔다. 그들의 분산된 대형은 적어도 70마일(110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에서 기동했으며, 잉글랜드군은 그들의 수, 주요 목표 및 이동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과 농장을 약탈하고 불태운 뒤 7월 5일 애플비에 도착했다.
로저 모티머는 이에 맞서 요크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했다. 여기엔 에드워드 3세의 친정인 에노 백국이 파견한 정예 용병 분견대가 포함되었으며, 에노 백작 기욤 1세 드 에노의 동생인 장 드 보몽이 지휘했다. 그러나 이 용병대는 잉글랜드군과 자주 다퉜고, 도시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궁수들이 그들을 공격하자, 용병들은 도시 일부를 불태웠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로저 모티머는 이를 수습하는 데 상당한 시일을 쏟아야 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칼라일에 상당수의 웨일스군을 주둔했고, 뉴캐슬에도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
7월 1일 요크를 출발한 잉글랜드군은 7월 15일 더럼에 도착했다. 명목상의 사령관은 에드워드 3세였지만, 실제로는 로저 모티머가 지휘했고, 프랑스의 이자벨은 더럼에 남았다. 잉글랜드군은 불타는 농장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적군이 거기에 있으리라 여기고 추격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을 잡으려고 며칠간 추격해도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다. 로저 모티머는 그제야 적군이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하면서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있다는 걸 깨닫고,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7월20일, 잉글랜드군은 새벽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말을 타고 이동했다. 짐 운반 대열은 뒤에 남겨졌고, 보병은 가능한 한 빨리 기병대를 따라갔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기병대는 헤이든에 이르러 타인 강을 건넜다.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이 급습할 거라 여기고 방어를 준비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자기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 호송대는 멀리 뒤쳐졌고, 근처에 식량도 없었으며, 그 사이에 폭우가 내려서 타인 강을 다시 건너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에 모티머는 정찰병을 앞서 보낸 뒤, 타인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홀트위슬에 도착했다.
이때 스코틀랜드군은 홀트휘슬 남쪽에 있었다. 잉글랜드 정찰병 한 명이 그들에게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스코틀랜드인들이 싸우고 싶어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7월 31일,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이 주둔한 스탠호프 공원 근처 웨어 강 북쪽 기슭으로 진군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급류가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는 바위투성이의 언덕을 선점하면서, 쉴트론[1]을 결성했다. 잉글랜드 지휘부는 이들을 공격하려고 언덕을 올라갔다간 막대한 희생만 볼 것임을 깨닫고, 그들을 어떻게든 언덕 아래로 끌어내려 했다. 먼저 천천히 스코틀랜드군 진영을 향해 접근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웨어 강 상류를 건넌 뒤 적군을 향해 사격을 가해, 그들이 언덕에서 내려오도록 강요하려 했지만,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출격해 궁수들을 몰아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전령을 스코틀랜드 진영으로 보내 공정하게 싸우길 원하니 당장 언덕 아래로 내려오라고 촉구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지휘관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현 위치에 만족한다. 잉글랜드 국왕과 그의 고문들이 현 상황에 불만이 있다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두겠다."
잉글랜드 수뇌부는 적이 끝까지 언덕을 사수할 것임을 깨닫고, 스코틀랜드군과 마주보면서 웨어 강의 오른쪽 강둑에 별동대를 배치함으로써, 적의 식량 운송로를 차단해서 굶겨 죽이려 했다. 그 후 사흘간 대치하던 중, 스코틀랜드군은 8월 2일에서 3일 사이의 밤에 어둠을 틈타 몰래 후퇴하여 스탠호프 공원 내부의 훨씬 더 강력한 위치로 이동했다. 날이 밝으면서 스코틀랜드군이 이동한 걸 알게 된 잉글랜드군은 진영을 다시 옮겨서 강 남쪽에 있는 스코틀랜드군과 마주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자기들이 무리 지어 강을 건너려고 시도한다면, 적군이 즉각 공격하여 섬멸하려 들 것을 두려워했고, 일단 계속 대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측은 대치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8월 3일에서 4일 사이의 밤,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 진영을 급습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하마터면 잡힐 뻔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제임스 더글러스가 "더글러스!"라고 외치며 곧장 잉글랜드 숙영지 중앙 지점으로 달려가서 왕실 텐트의 밧줄 몇 개를 잘라내는 바람에 텐트가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한참 동안 그곳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구조되었다고 한다. 로저 모티머는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은 그 사이에 자기네 진영으로 돌아갔다.
8월 6일, 잉글랜드군은 수감자를 심문한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그날 밤 전체 군대를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할 거라 예상하고, 완전히 무장한 채 전투 대열을 결성한 채 잠을 잤고, 들판을 밝히기 위해 큰 모닥불을 피웠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 사령관 제임스 더글러스는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이 절대로 지나갈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고지 북쪽의 늪을 돌파한 뒤 약탈품을 가지고 스코틀랜드로 유유히 철수했다. 로저 모티머는 적을 놓쳤다는 걸 알게 된 뒤, 사기가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다고 보고 철수했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에드워드 3세가 원정 실패에 너무 격분해 철군하는 내내 울었다고 밝혔다.
3. 이후
웨어데일 전역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북부 잉글랜드에 활개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실은 북부 잉글랜드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 지출은 7만 파운드였는데, 그중 41,000파운드가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반면 잉글랜드 정부의 연간 수입은 30,000 파운드였고, 수입을 제외한 지출액은 빚으로 충당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당국은 1327년 9월 중순 링컨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을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산의 1/20를 직접세로 거두기로 했다.1327년 10월, 로버트 1세가 노섬벌랜드로 출진해 그 일대의 여러 성을 하나씩 공략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로저 모티머와 이자벨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이는 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로버트 1세에게 사절을 파견해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로버트 1세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전쟁을 끝내기를 갈망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협상이 순조롭게 이어진 끝에, 1328년 3월 17일 에든버러에서, 그리고 5월 4일 노샘프턴에서 전쟁을 끝낼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든버러-노샘프턴 협약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 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30여 년간 이어지던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종결되었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