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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트룰 전투 영어: Battle of Glen Trool | ||
시기 | 1307년 4월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갤러웨이 글렌 호수변 글렌 트룰 | |
원인 |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탈환 의지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300명 | 1,500명 |
피해 | 미미함. | 상당함. |
결과 |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로버트 1세의 위상 증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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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07년 4월, 스코틀랜드 왕국의 갤러웨이 글렌 호수변의 좁은 협곡인 글렌 트룰에서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물리친 전투.2. 상세
1306년 메스번 전투와 달리그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면서 세력을 잃은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의 추적을 피해 스코틀랜드 각지를 전전한 끝에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킨타이어 반도로 도주했다. 이후 두나버티 성에 잠시 머물렀다가, 잉글랜드군이 거기까지 몰려오자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가 그다음 6개월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서부 섬들이나 아일랜드로 망명했을 것이다. 14세기 연대기인 <게스타 아날리아>(Gesta Annalia)에 따르면, 킨타이어 반도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의 여성 영주인 크리스티나가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주한 로버트 1세를 섬에 숨겨줬다고 한다.1307년 봄, 로버트 1세는 헤브리디스 제도와 아일랜드에서 모집한 병사 300명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남서쪽으로 항해했다.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로버트 보이드가 먼저 아란에 상륙한 뒤, 적장 존 헤이스팅스가 브로딕 성으로 보낸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다. 로버트 1세는 아란에서 이들과 합류했고, 자신의 영지였던 캐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퍼시 남작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텐버리 성을 접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텐버리 마을을 야간을 틈타 약탈한 뒤 아란으로 후퇴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캐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것은 무모하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한 움직임이었다. 캐릭 일대와 잉글랜드 국경이 그리 멀지 않아서 잉글랜드군이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았고, 많은 성채들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군대에 의해 강력히 방어되었다. 또한 전임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을 여전히 따르는 영주들이 여전히 존재했는데, 특히 브루스 가문을 적대시하는 맥도월 가문이 갤러웨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버트 1세의 형제인 토머스와 알렉산더 브루스는 1307년 2월 초 라이언 호 전투에서 맥도월 가문의 수장 둔갈 맥도월의 군대에 참패하고 칼라일로 압송된 뒤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된 바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 1세는 갤러웨이에서 기반을 다져야 희망이 았다고 판단하고, 클래터링쇼스 호수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은 잉글랜드 숙영지를 습격하는 등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군림하던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는 로버트 1세가 갤러웨이에서 준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끝장내기 위해 친히 장병 1,500명을 거느리고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를 예상하고 글렌 호수변 협곡인 글렌 트룰에 본부를 세우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글렌 트룰은 천혜의 요새였다. 호수가 협곡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사람들은 가파른 경사로 둘러싸인 좁은 길로만 통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중간쯤에서 언덕이 험준한 교각에 가로막혀서 통행이 무척 힘들었다. 여기에 로버트 1세는 일부 부하를 경사로 보내 레버와 쇠지렛대를 사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화강암 바위들을 분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07년 4월, 발랑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글렌 트룰 협곡에 접근했다. 그들은 길이 무척 좁아서 일렬로 전진해야 했다. 로버트 1세는 호수 건너편에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신호를 보냈고, 그의 부하들이 경사면을 따라 바위를 밀어냈다. 잉글랜드군이 이 때문에 혼란에 휩싸이자, 로버트 1세의 부하들이 경사면을 따라 돌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길이 너무 좁은 데다 갑작스러운 바위 세례에 혼란에 빠진 터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협곡에 들어갔던 잉글랜드 병사 대부분이 살해되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글렌 트룰 전투 소식은 곧 갤러웨이 각지에 퍼졌고,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군을 물리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대거 가담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북쪽으로 이동해 에어 성을 우회한 뒤, 1307년 5월 10일 라우던 힐 전투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를 격파했다.
1929년,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는 로버트 1세의 사망 600주년을 맞아 글렌 호수 북쪽 해안 위에 '브루스의 돌'로 명명된 거대한 화강암 바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