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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0 19:20:49

마이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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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톤 전투
영어: Battle of Myton
시기 1319년 9월 12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마이톤온스웨일
원인 베릭을 탈환하려는 에드워드 2세의 공세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대응
교전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Arms_of_the_House_of_Douglas.svg.png 제임스 더글러스
파일:fitz-randolf-coat-of-arms.jpg 토머스 랜돌프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윌리엄 멜튼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존 호담
병력 10,000 ~ 15,000명 10,000 ~ 20,000명
피해 미상 막대함.
결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영향 에드워드 2세의 철군.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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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19년 9월 12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마이톤온스웨일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민병대를 섬멸한 전투.

2. 상세

1318년 4월 1일 ~ 2일, 로버트 1세가 급파한 스코틀랜드군이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왕국 세력의 유일한 거점인 베릭을 야간 기습해 함락했다.(베릭 공방전) 당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이끄는 고위 귀족들과 지속적인 정치 투쟁에 몰두하느라 스코틀랜드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베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뒤이어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대대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정계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의 중재하에 화해하고 베릭을 탈환하기로 결의했다.

1319년 늦여름,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함께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9월 7일부터 베릭을 포위했다. 하지만 월터 스튜어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베릭을 포위한 잉글랜드 정규군과 직접 맞붙으면 승산이 적다고 판단하고, 그들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고자 베릭을 우회한 뒤 요크셔로 진격했다. 1만에서 1만 5천 사이의 스코틀랜드군은 칼라일을 거쳐 컴벌랜드를 지난 뒤, 노섬벌랜드와 더럼을 거쳐 요크셔의 버러브릿지와 마이톤까지 행군하며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약탈했다.

얼마 후 요크 수비대는 생포된 스코틀랜드 스파이로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이 요크 시 인근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를 사로잡으려 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자벨은 급히 요크로 옮겨진 뒤, 배를 타고 노팅엄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이 요크 성 근처로 이동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요크의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잉글랜드 왕실 대집사인 존 호담은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의 협조하에 요크 시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다. 이때 모인 병력은 10,000 ~ 20,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그 대부분은 요크와 주변 지역의 징집병이었고, 많은 성직자들이 함께 했다. 9월 12일, 윌리엄 멜튼과 존 호담은 스코틀랜드군을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기 위해 20km 떨어진 마이톤온스웨일로 진격했다.

척후병으로부터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제임스 더글러스는 평원에 잔뜩 깔린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건초 더미를 태운 불에서 나오는 연기는 스웨일 강의 다리를 건넌 잉글랜드군의 시야를 가렸다.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그 사이에 우회하여 다리를 건너 퇴각하는 것을 막았고, 스코틀랜드 주력군은 방향 감각을 잃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잉글랜드 민병대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잉글랜드 민병대는 삽시간에 와해했고, 적에게 사살되거나 스웨일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시인 존 바버는 <운율 연대기>에서 마이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입은 손실에 대해 사제 300명을 포함해 1,000명이 죽었다고 밝혔고, 라네코스트 연대기는 잉글랜드인드인 4,000명이 스코틀랜드인에게 살해되었고, 1,000명은 스웨일 강에서 익사했다고 밝혔다.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은 전사했고, 여러 잉글랜드 장교들이 생포되었다. 윌리엄 멜튼과 존 호담은 간신히 요크로 탈출했고, 예상했던 스코틀랜드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성문을 닫았다. 이때 전투에 참여했던 수많은 잉글랜드 성직자가 살해되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마이톤 전투에서 전사한 성직자들을 "마이톤의 모임(Chapter of Myton)"이라고 일컬었다.

랭커스터 백작은 마이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이후 제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 랜돌프는 요크 성을 공격하지 않고 더 남쪽의 캐슬포드로 이동했다. 이곳은 랭커스터 백작의 가장 중요한 성 중 하나인 폰트프랙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9월 14일, 그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한동안 이동했다가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에어 강 주변 지역과 워프 강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후 페나인 산맥 서쪽 지역으로 진군해 그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농작물을 불태우고 많은 가축을 사로잡았다. 그 후 스테인무어, 길슬랜드, 칼라일을 지난 뒤 스코틀랜드에 무사히 귀환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요크에 병사 600명과 함께 남았지만, 제임스 더글러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벌여 1319년 11월 1일 길슬랜드 시를 파괴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1319년 12월 22일에 최소 2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잉글랜드 측은 이 협정에 따라 1년 이내에 성을 철거하거나 스코틀랜드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노섬벌랜드에 있던 하보틀 성을 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