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26 13:26:52

둔갈 맥도월

이름 <colbgcolor=#fff,#1f2023> 둔갈 맥도월
Dougal Macdowell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갤러웨이
사망 1327년 이전
잉글랜드 왕국
부인 마거릿
자녀 던컨 맥도월
직위 갤러웨이 영주

1. 개요2. 생애


1. 개요

갤러웨이 영주.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지지했다가 로버트 1세에게 축출되었다.

2. 생애

갤러웨이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인 맥도월 가문의 수장이다. 맥도월 가문이 차지한 영지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14세기 <라네르코스트 연대기>에서 둔갈의 아들 던컨이 1334년에 크리 강 너머에서 군대를 일으켰다고 기술한 것을 볼 때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위그타운셔(Wigtownshire)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속한 맥도월 가문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지배로부터 갤러웨이의 독립을 갈망했다. 1296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왔고, 1297년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에드워드 1세가 진압하는 걸 도와줬다.

1306년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에드워드 1세는 여기에 가담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한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분배했다. 이때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있는 로버트 보이드의 영지는 맥도월 가문에 넘어갔다. 로버트 1세는 처음엔 잉글랜드군에게 패배한 뒤 스코틀랜드 서부 섬으로 도주해야 했지만, 1307년 초 스코틀랜드 남서부로 상륙하기로 계획했다.

1307년 2월 9일 또는 10일, 그의 형제 알렉산더 브루스와 토머스 브루스는 아일랜드의 게일인 소왕, 스코틀랜드 기사 레지날드 크로퍼드, 킨타이어의 영주 맬컴 맥퀼런과 함께 갤리선 18척, 병사 1,000명을 타고 갤러웨이의 라이언 호로 진입하여 스트랜라어 인근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둔갈 맥도월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라이언 호 전투) 갤리선 2척만 겨우 빠져나갔고, 모든 지휘관과 장병들은 생포되었다. 둔갈 맥도월은 아일랜드의 게일인 소왕과 맬컴 맥퀼런을 즉결 처형하고, 알렉산더와 토머스 브루스 형제, 레지날드 크로퍼드를 칼라일에 있던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 형제와 레지날드 크로퍼드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잔혹하게 처형했다. 브루스 가문은 이 일을 계기로 맥도월 가문에 원한을 품었다.

1308년, 로버트 1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형제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이슬레이의 도널드의 지원을 받아 갤러웨이 정복전에 나섰다. 그들은 잉글랜드 지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러다가 1308년 6월 29일 도널드 맥켄이 이끄는 갤러웨이 귀족들을 디 강 또는 크리 강에서 격파하고, 헤스탄 섬에 있는 멕도월 성을 불태웠으며, 잉글랜드 지지자들이 잉글랜드로 도주하도록 강요했다. 로버트 1세는 동생의 공적을 기려 1309년 3월에 에드워드를 갤러웨이의 영주로 선임했다.

둔갈 맥도월은 에드워드 브루스의 공세를 피해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잉글랜드군과 함께 갤러웨이로 침투하여 브루스 가문과 대적했지만, 1312년 말부터 덤프리스 성에서 스코틀랜드군에 장기간 포위되었다가 1313년 2월 7일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이후 둔갈은 맨섬에 있는 루센 성의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나 1313년 5월 또는 6월에 스코틀랜드군이 섬에 상륙한 뒤 짧은 포위 끝에 6월 12일에 그의 항복을 받았다.

그 후 둔갈은 잉글랜드에 은거했고, 1316년 9월 사망한 존 맥두걸의 유언 집행자를 맡았으며, 1319년 5월 에드워드 2세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그는 아마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어 노샘프턴 평화 조약이 체결된 1327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왕은 협상 중에 둔갈 맥도월의 상속인 던컨이 자기 영지를 되찾을 수 있을 지에 대한 논의를 배제했다.

둔갈의 미망인 마거릿은 1333년 또는 1334년에 사망할 때까지 둔갈에게 부여된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받는다는 내용이 적힌 왕실 헌장에서만 언급되었다. 아들 던컨 맥도월은 1347년 잉글랜드 정부에 청원서를 보냈다. 그는 이 청원서에서 자기 가문이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2세의 대의를 지지한 결과 100파운드 상당의 수입이 나는 영지를 잃었으며, 둔갈의 형제 한 명이 로버트 1세의 형제들을 잡아서 처형한 일로 인해 살해되었고, 둔갈의 장남은 배넉번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연간 20 파운드를 받았으나, 자신과 다른 여섯 아들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버지의 연금을 계속 지급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잉글랜드 의회는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자선적인 일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요청을 승인했다. 그러나 던컨 외 둔갈의 자식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