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리처드 드 버러 Richard Óg de Burgh | |
생몰년도 | 1259년 ~ 1326년 7월 29일 | |
출생지 | 아일랜드 영지 | |
사망지 | 아일랜드 영지 먼스터 티퍼레리의 아티셀 수도원 | |
아버지 | 월터 드 버러 | |
어머니 | 에블린 피츠존 | |
형제 | 티보트, 윌리엄, 토머스, 질, 에지디아 | |
배우자 | 마거릿 드 버러 | |
자녀 | 아벨린, 엘레노어, 엘리자베서, 월터(또는 윌리엄), 존, 마틸다, 토머스, 캐서린, 에드먼드, 조앤 | |
직위 | 제2대 얼스터 백작, 제3대 코노트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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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영지와 잉글랜드 왕국에 걸친 대규모 영지를 경영한 대귀족.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편에 섰으며, 스코틀랜드 장군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에 맞섰다.2. 생애
잉글랜드에서 활약하던 노르만인 귀족 집안 출신이다. 증조부 윌리엄 드 버러는 존 왕 치하에서 노퍽주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뒤 코노트의 영주가 되었다. 윌리엄의 아들 리처드는 초대 코노트 남작을 칭했으며, 리처드의 아들 월터는 제2차 남작 전쟁에서 헨리 3세의 편에 선 뒤, 그 대가로 얼스터 영지를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대거 받아냈고, 아일랜드 현지의 게일인 소왕 및 귀족들을 꾸준히 몰아붙인 끝에 아일랜드 뿐만 아니라 브리튼 제도 전체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자로 우뚝 섰으며, 1264년에 초대 얼스터 백작이 되었다. 초대 얼스터 백작 월터 드 버러는 얼스터의 노르만인 귀족 존 피츠제프리의 딸 에블린과 결혼해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리처드다. 남자 형제로 티보트, 윌리엄, 토머스, 질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고, 누이 에지디아는 스코틀랜드 제5대 호국경을 역임하면서 에드워드 1세에 대적했던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내가 되었다.1271년 아버지 월터가 사망한 뒤 가문의 영지를 계승한 뒤 잉글랜드 왕실로 소환되어 보호받았다. 1281년 1월 5일 성년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났고, 1283년 2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에드워드 1세는 1283년 크리스마스에 러들린 성에서 리처드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1285년 7월 1일, 에드워드 1세는 아일랜드 재무부에 대한 리처드의 빚을 절반으로 줄여줬다. 학자들은 그가 이러한 혜택을 받은 건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일 거라 추정하지만, 정말로 그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다.
이후 리처드는 가문의 재산을 확대했다. 1283년 미스와 리머릭에 있는 왕실 영지와 1242년에 사망한 얼스터 백작 휴 드 라시의 미망인 에멀린의 옛 영지를 받았으며, 12866년 코노트에서 게일인 소왕들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벌여서 자기 봉신인 닐 쿨란을 얼스터의 소왕으로 세웠고, 초대 토몬드 남작 토머스 드 클레어 및 스코틀랜드의 여러 귀족과 동맹을 맺고 클레어에게 장인인 제3대 오팔리 남작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상속 재산을 보장해줬다. 1288년 스코틀랜드 왕국의 일부였던 맨섬의 지배권을 확보했지만, 1290년 이전에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1290년 토몬드의 소왕을 봉신으로 삼았고, 1297년에는 자녀 없이 죽은 삼촌 리처드 피츠존의 땅을 상속했다. 또한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코노트에 있는 3개 성을 평생 다스리는 걸 허락받았다.
아일랜드에서 버러 가문의 주요 라이벌은 제4대 오팔리 경인 존 피츠토머스 피츠제럴드였다. 두 귀족 가문의 불화는 1294년 리처드가 리 성에서 피츠제럴드에게 체포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자유를 얻기 위해 코노트에 있는 존의 영지에 대한 영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1295년 4월 12일에 풀려났다. 그 후 일시적으로 화해한 두 사람은 렌스터의 게일인 영주들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그러나 양자의 무력 충돌은 이어졌고, 에드워드 1세는 1295년 10월 18일에 두 사람에게 화해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아일랜드의 정의관 존 본은 양자가 2년간 휴전하기로 합의하도록 중재했고, 1298년 피츠제럴드가 렌스터와 먼스터의 영지를 받는 대가로 코노트와 얼스터에 있는 모든 소유물을 리처드에게 양도하기로 하면서 갈등이 마침내 종식되었다.
리처드는 에드워드 1세의 봉신이면서도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의 외숙모는 존 발리올의 조카였고, 누이 에지디아는 스코틀랜드 호국경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내였으며,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1세와 결혼했다. 그러면서도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는 대가로 막대한 급여를 받았으며, 1303년 더블린 성에서 33명의 젊은 귀족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뒤 스코틀랜드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에드워드 1세를 도왔다. 에드워드 1세는 이에 보상하고자 당시 1만 1천 파운드가 넘었던 아일랜드 국고에 진 그의 모든 빚을 면제했다.
1309년, 리처드는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는 걸 보고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1313년, 로버트 1세는 얼스터에 상륙한 뒤 리처드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315년, 로버트 1세의 동생인 에드워드 브루스가 잉글랜드 세력을 아일랜드에서 몰아내기로 마음먹고 아일랜드 원정을 감행했다. 리처드는 에드워드 브루스를 죽이든 살리든 더블린으로 데려오겠다고 맹세하며 스코틀랜드군에 맞섰지만, 1315년 9월 1일 코너 전투에서 참패해 막대한 전력을 상실했다. 이후 리처드는 적군이 그의 셩 여러 개를 함락하는 동안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일랜드 각지를 방황했다고 한다.
코너 전투 참패 후 스코틀랜드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적하지 못하자, 세간에서는 그가 비밀리에 로버트 1세와 손잡고 아일랜드를 로버트 1세에게 헌납하는 걸 돕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317년 2월 21일, 리처드는 세인트 메리 수도원에서 더블린 시장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더블린 성에 투옥되었다. 그러다가 5월 8일 에드워드 2세의 그를 풀어주라는 명령서가 도착하면서 석방되었다. 6월 27일,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에서 모든 적을 물리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스코틀랜드군과 대적하지 못하고, 존 드 버밍엄, 로저 모티머 등에게 맡겼다.
1318년 10월 에드워드 브루스가 포하트 전투에서 존 드 버밍엄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을 때, 리처드는 런던에 가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 2세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추종 세력 간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체결된 리크 조약의 증인 중 한 명이 되었다. 1년 후 그는 코노트에 있는 3개 성을 로저 모티머에게 넘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1320년 더블린 의회에서 얼스터 백작으로 재차 인정받았고, 1322년과 1323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326년 칼케니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가신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노령과 중병에 시달리던 그는 잔치가 끝난 직후 증조부가 세운 티퍼레리의 아타셀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1326년 7월 29일 그곳에 사망했고, 아타셀 수도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거릿 드 버러: 리처드드 버러의 사촌인 존 드 버러와 존 발리올의 친척인 세실리 발리올의 딸.
- 아벨린: 초대 라우스 백작 존 드 버밍엄의 부인.
- 엘레노어: 초대 몰튼 남작 토머스 몰튼의 부인.
- 엘리자베스(1284 ~ 1327):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왕비.
- 월터 또는 윌리엄: 1304년 사망.
- 존(1286 ~ 1313):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막내 딸 엘리자베스 드 클레어의 남편. 제3대 얼스터 백작 윌리엄의 아버지.
- 마틸다(1290 ~ 1320): 제8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부인.
- 토머스: 1316년 사망.
- 캐서린(? ~ 1331): 초대 데스먼드 백작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부인.
- 에드먼드: 리처드보다 나중에 사망한 유일한 아들이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
- 조앤(? ~ 1359): 제2대 킬데어 백작 토머스 피츠제럴드와 초혼, 초대 다시 남작 존 다시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