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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8 21:00:16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파일:우드스톡의 에드먼드.png
성명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Edmund of Woodstock
생몰년도 1301년 8월 5일 ~ 1330년 3월 19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윈체스터성
아버지 에드워드 1세
어머니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형제 토머스
배우자 마거릿 웨이크
자녀 에드먼드, 마거릿, 조앤, 존
직위 초대 켄트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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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고, 디스펜서 전쟁에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체포해 처형하는 데 찬성했다. 이후 프랑스의 이자벨로저 모티머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가문을 무너뜨릴 때 협력했다. 그러나 로저 모티머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2. 생애

1301년 8월 5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성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딸 마르그리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브라더턴의 토머스가 있었고, 이복형제로 에드워드 1세와 전 왕비 카스티야의 레오노르[1] 사이의 자녀들인 헨리, 알리에노르, 조앤, 알폰소, 마르가레타,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2세가 있었다.

1306년, 에드워드 1세는 에드먼드에게 2년 이내에 연수입 7,000마크의 토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해, 막내아들의 미래를 보장하려고 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는 임종하기 직전에 에드먼드에게 1,000마크 상당의 땅을 주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땅을 수여할 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 후 오랫동안 별다른 영지를 받지 못하던 그는 1315년 에드워드 2세에게 여러 영지를 받았으며, 1319년 11월 연 수입 2,000 마크의 후원금을 받았다. 1318년 8월 에드워드 2세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일당이 화해하기로 한 리크 조약에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1320년 봄,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초대 배들스미어 남작 바스톨로뮤 드 배들스미어를 포함한 사절단의 명목상 수장을 맡아 프랑스 왕국을 먼저 방문했고, 뒤이어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 요한 22세와 협의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스톨로뮤의 조카 헨리 버거시를 링컨 주교로 승격시키는 것에 대해 교황의 동의를 얻었다. 또한 교황을 설득해 잉글랜드 왕이 랭커스터 백작 파벌의 요구 사항인 "법령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의무를 면제받았다. 이후 귀국하던 중 아미앵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에게 가스코뉴 영지의 주권자로서 경의를 표한 에드워드 2세와 재회했다. 1320년 10월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처음으로 의회에 소환되었다.

1321년 봄, 웨일스 변경지대의 영주들이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받들어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상대로 반기를 들면서 디스펜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잉글랜드 왕실 관리인을 맡았던 바스톨로뮤 드 배들스미어 마저 반란에 가담하자, 에드워드 2세는 1321년 6월 16일에 바스톨로뮤를 해임하고 에드먼드를 켄트의 집사, 도버 성주,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의 감독관으로 선임했다. 7월 26일, 왕은 에드먼드를 켄트 백작으로 승격하고 이 직함에 따른 추가 권리를 부여했다. 9월 26일에는 바스톨로뮤 대신 에드먼드를 켄트주에 있는 톤브리지 성의 관리인으로 선임했다. 그는 이 조치를 통해 켄트 지방을 주 거점으로 삼은 바스톨로뮤의 입지를 약화하려 했다.

1321년 10월 반란 진압에 착수한 에드워드 2세는 에드먼드에게 켄트 지방에서 군대를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에드먼드는 명령에 따랐고, 그해 말부터 에드워드 2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했다. 1322년 3월 11일, 에드먼드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왕에게 랭커스터 백작과 반란 가담자들을 반역자로 규탄하고, 그들에 대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조언했다. 1322년 3월 17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왕실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랭커스터 백작은 생포된 뒤 요크로 끌려갔다가 폰트프랙트 성으로 암송되었다. 에드먼드는 3월 22일에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7명의 거물로 구성된 재판소의 일원이었다.

1322년 말,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편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뒤 월링포드 성에 갇혀 있던 모리스 드 버클리가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간수들을 제압하고 월링포드 성을 장악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1323년 1월 에드먼드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를 월링포드로 보내 월링포드 성을 탈환하도록 했다. 그들은 월링포드 성 뿐만 아니라 모리스 드 버클리의 본거지인 버클리 성도 점령했는데, 그곳에서 교회에 피신한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관행을 무시하고 예배당에 피신한 수비대를 모조리 체포했다.

에드먼드는 디스펜서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충성을 바친 대가로 많은 보상을 받았다. 1322년 3월 말 에드워드 2세가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에게서 몰수한 웨일스의 광대한 영지를 받았으며, 러틀랜드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322년 7월 오크햄 성의 관리를 맡았으며, 1323년 반란에 가담했던 로버트 르 에워의 추종잗들을 처벌하는 임무를 위임받았다. 1323년 9월에는 노샘프턴에서 토너먼트를 개최하는 걸 허락받기도 했다.

1322년 8월 에드워드 2세가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에 보복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원정했을 때 참여했지만, 10월 14일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완패하자 왕과 함께 요크로 도주했다. 로버트 1세의 새로운 침략을 두려워한 왕은 에드먼드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군인을 모아 12월까지 요크로 오라고 명령했다. 1323년 2월, 에드워드 2세는 에드먼드를 스코틀랜드의 왕실 부관으로 선임하고, 로버트 1세와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가 반역자로 낙인찍혀 체포된 앤드류 하클레이를 대신하여 스코틀랜드 변경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했다. 에드먼드는 1323년 3월 초 하클레이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위해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랭커셔에서 군대를 모집했지만, 5월 30일 의회에서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을 때 이를 따랐다. 에드워드 2세는 같은 해에 스코틀랜드와 13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1323년 말, 가스코뉴를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초기 중재 시도가 실패한 후, 에드워드 2세는 1324년 4월 협상을 위해 동생 에드먼드와 더블린 대주교 알렉산더 빅노어를 포함한 고위급 사절단을 파리로 파견했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는 가스코뉴 몰수를 선언했다. 1324년 7월 20일,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먼드를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왕실 부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아주네 지역에서 백성들을 강제 징병하려 했다가 그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8월에 샤를 드 발루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패해 아주네를 상실했다. 에드먼드는 라레올로 퇴각한 뒤 그곳에서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다가 9월 22일 6개월간 휴전을 맺는 대가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가 프랑스 왕실의 영토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후 에드먼드는 가스코뉴에 계속 남았고, 1325년 4월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로 상륙했을 때 이를 돕고자 군대를 편성했다.

한편, 에드워드 2세는 상황이 좋지 않자 프랑스와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1325년 3월,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가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샤를 4세의 여동생이었던 이자벨은 새로운 휴전을 협상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서 국왕 대신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가 가스코뉴에 대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9월 24일에 요청된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자벨은 무기력한 남편에 대한 불만과 디스펜서 부자에 대한 반감 때문에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아들 역시 돌아가지 못하게 앴다. 이때 에드먼드 역시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이자벨을 지지했다. 에드워드 2세는 에드먼드에게 당장 귀국하라고 명령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자, 1326년 3월에 에드먼드를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영지를 몰수했다.

에드먼드는 이자벨 왕비, 로저 모티머와 함께 에노 백국으로 찾아간 뒤 에노 백작 기욤 1세와 협상해 에드워드 왕자와 기욤 1세의 딸 에노의 필리파의 약혼을 주선했다. 그 후 1326년 9월 기욤 1세로부터 제공받은 용병대를 거느린 채 이자벨, 모티머와 함께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그들은 에드먼드의 형이자 노퍽 백작 브라더턴의 토머스와 전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동생인 레스터 백작 헨리의 지원을 곧바로 받았다. 에드워드 2세는 이들의 반란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고, 에드먼드와 토머스 형제는 10월 26일 브리스톨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한 뒤 에드워드 왕자를 섭정으로 옹립했다. 두 형제는 디스펜서 부자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소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된 뒤 미성년자인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 섭정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1327년 2월 1일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 후 디스펜서 가문과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이 소유했던 재산을 상당수 받아냈다. 1327년 웨어데일 전역을 이끈 군 사령관 중 한명이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여러 하위 관직을 역임했다. 1327년 9월 폐위된 에드워드 2세가 의문사한 뒤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에드워드 2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정부에서 별다른 통치를 행사하지 못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연인인 이자벨 왕비의 지원을 받은 로저 모티머가 독점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에드먼드는 1327년 7월 형 토마스와 함께 요크에서 열린 의회에 불참했다. 1328년 가을 형 토머스,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그리고 제2대 웨이크 남작이자 처남 토머스 웨이크와 동맹을 맺어 모티머를 권좌에서 밀어낼 음모를 꾸몄다. 1328년 12월 초에는 런던에서 모티머에 불만을 가진 귀족 및 성직자들과 회동해 정부를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1329년 1월 랭커스터 백작 헨리가 모티머가 이끄는 왕실군과 베드퍼드에서 결전을 벌이기 직전에, 에드먼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형 토머스와 함께 랭커스터 백작을 외면했다.

결국 랭커스터 백작의 반란은 허무하게 실패했고, 감옥에 갇히지 않는 대신에 영지 절반을 내주고 은거해야 했다. 에드먼드는 막판에 편을 바꿨지만, 이 일로 모티머에게 찍혀서 정부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여전히 왕실이 발행한 헌장에 이름을 정기적으로 올렸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1329년 잉글랜드를 대표하여 가스코뉴아비뇽교황청으로 여행을 떠났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형 토머스와 함께 1330년 2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리는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서 출발한 에노의 필리파와 동행했다.

1330년 초, 에드먼드는 자기 형인 에드워드 2세가 아직 살아 있으며 코프 성에 있다는 소문을 믿고, 시종인 보도 드 바요와 존 데버리에게 에드워드 2세에게 전할 편지를 맡겼다. 그는 이 서신에서 에드워드 2세를 탈옥시킨 뒤 복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 2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가 무슨 연유로 이 소문을 믿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서신을 맡긴 두 시종의 정체는 로저 모티머의 스파이였고, 자연히 로저 모티머에게 서신이 전해졌다. 1330년 3월, 에드먼드는 윈체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다가 에드워드 3세를 전복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로저는 이번에는 봐주지 않기로 마음먹고, 반역죄로 기소한 뒤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처남 토머스 웨이크도 고발당했지만, 잉글랜드에서 제때 탈출할 수 있었다.

1330년 3월 19일, 윈체스터 성 외곽에서 에드먼드의 처형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왕의 아들인 에드먼드를 처형하겠다고 나서는 사형 집행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로저 모티머는 온종일 사형 집행일을 기다렸다가, 그날 저녁 한 평범한 범죄자에게 억지로 맡겨서 에드먼드의 목을 베어버리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왕족이었던 그를 곧바로 처형한 일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죽기 전에 요크 대주교와 런던 주교를 포함해 40명이 넘는 공모자의 이름을 명시한 고백서를 작성했다. 그들 대부분은 목숨을 걸고 잉글랜드를 탈출했고, 그들의 재산은 압류되어 로저와 측근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이후 에드먼드의 유해는 윈체스터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안치되었다가, 로저 모티머가 몰락한 이듬해인 1331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3. 가족



[1]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3세의 딸.[2] 1339년에서 1340년 사이에 비밀 결혼했다. 그 후 토머스 홀랜드가 튜튼 기사단에 가담하러 떠난 사이, 조앤은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터규와 결혼하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고, 차마 토머스 홀랜드와 결혼했다는 걸 알리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1347년, 토머스 홀랜드가 에드워드 3세에게 사실을 고한 뒤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앤과 자신이 이미 결혼했으니 윌리엄 몬터규와 조앤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교황 특사들이 파견되어 수년간 조사했고, 1349년 11월 13일 클레멘스 6세가 조앤과 윌리엄 몬터규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토머스 홀랜드와 조앤의 혼인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