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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발리올 왕조 제2대 국왕 에드워드 발리올 Edward Balliol | |
왕호 | 에드워드 발리올(Edward Balliol) |
이름 | 에드워드 발리올 (Edward Balliol) |
출생 | 1283년경 |
스코틀랜드 왕국 록스버그셔 카베르 | |
사망 | 1364년 1월 (향년 80~81세) |
잉글랜드 왕국 돈캐스터 휘틀리 힐즈 | |
재위기간 | 1332년 9월 24일 ~ 1356년 1월 20일 |
아버지 | 존 발리올 |
어머니 | 이사벨라 드 바렌 |
형제 | 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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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옹립되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이후에도 수십년간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했지만, 말년에 모든 걸 포기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스코틀랜드 국왕 칭호를 양도했다.2. 생애
1283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록스버그셔 카베르에서 제6대 발리올 남작 존 발리올과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딸 이사벨라 드 워렌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헨리가 있었다. 1292년 11월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국왕에 선임된 뒤 왕위 후계자가 되었다. 1295년 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간섭에 맞서기로 한 존 발리올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잉글랜드 왕국에 대적하기로 했다. 이때 에드워드는 필리프 4세의 조카인 앙주의 이자벨과 약혼했다. 그러나 1296년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폐위된 뒤, 아버지와 함께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이자벨과 에드워드 발리올과의 약혼을 파기하고, 대신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2세의 아들 장 3세와 이자벨을 결혼시켰다.에드워드는 1299년까지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가 아버지의 장인인 존 드 워렌의 중재로 풀려났고, 이후엔 피카르디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조용히 지냈다. 1320년에 리데스데일의 영주인 소울즈의 윌리엄 2세가 로버트 1세를 폐위하고 그를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도중에 발각되어 덤바턴 성에 죽을 때까지 감금되었으며,그의 추종자들은 참수형, 교수형, 또는 말 뒤에 묶여 질질 끌려가서 죽는 형벌을 받았다. 이렇게 그가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는 일은 영영 오지 않을 듯 했다.
그러던 1329년 6월,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6살된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트랜드 국왕이 되었고, 로버트 1세의 부관이었던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섭정을 맡았다. 로버트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하면서 그곳의 재산을 잃은 잉글랜드 귀족들과 로버트 1세에 의해 반역자로 간주되어 축출된 브루스 가문 반대 세력은 이 기회를 틈타 스코틀랜드를 공략하려 했다. 발리올은 이 기회를 틈타 스코틀랜드 왕위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찾아가 자신을 복위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있는 프랑스를 의식해 개입하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이 발리올을 지원하는 걸 막지 않았다.
1332년, 발리올은 여러 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 침공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1332년 7월 20일 데이비드 2세의 섭정을 맡았던 토머스 랜돌프가 급사하면서 스코틀랜드 국정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헨리 퍼시, 월터 매니, 토머스 우트레드 등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이들은 1332년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섭정인 마르 백작 돔놀 2세를 전사시키고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쳤다. 이후 1332년 9월 24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3개월 후인 1332년 12월 16일 아난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를 추종하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의 기습 공격으로 동생 헨리가 전사했고, 그는 추종자 몇명만 데리고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1333년,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그가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발리올은 그해 여름에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베릭 성을 점령하고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그는 스코틀랜드 국왕에 복위했다. 1334년 2월 에든버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대관식을 재차 거행했고, 이후 뉴캐슬어폰타인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서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로디언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저지대 지역을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와 결혼했던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약혼했다.
그러나 그의 입지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았다.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다가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복귀한 귀족들과 브루스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에이셔의 로버트 스튜어트와 리데스데일의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데이비드 2세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존은 1334년 8월 반란군을 피해 베릭 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1334년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겨울 추위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13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서 로우랜드를 휩쓸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산악 지대에 숨어서 농성하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에게 핍박받는 스코틀랜드인들을 구원하겠다고 선언하고,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장병 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 1335년 8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오랜 앙숙인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것에 격분했고, 양국간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면서 백년전쟁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자신에게 양도한 지역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버윅, 에딘버러, 덤프리스 등지에 보안관을 배치했고, 존 발리올을 이 땅의 명목상 영주로 선임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335년 11월 30일,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에버딘셔의 컬블린 전투에서 보안관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를 처단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36년 가을 스코틀랜드로 재차 원정을 떠나 라나크셔의 보스웰 성을 복구하고 수리했으며, 퍼스 마을을 요새화하고 마을에 잉글랜드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이후로 스코틀랜드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했고, 북방 경계를 담당한 영주들에게는 스코틀랜드군의 침입을 방어하기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돌아올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1337년,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앵거스와 파이프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세인트 앤드류스, 보스웰, 루카르 성을 탈환했다. 1338년 잉글랜드군이 던바 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던바 백작부인 아그네스 랜돌프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되었다. 1338년 8월, 발리올은 스코틀랜드인들의 공세를 피해 잉글랜드 북부로 물려난 뒤 1339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북부 국경을 지키는 사령관에 선임되었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제2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와 제2대 네빌 남작 랄프 네빌에게 있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 잔존한 잉글랜드 수비대는 하나둘씩 데이비드 2세를 따르는 스코틀랜드군에게 제압되었다. 1339년 퍼스가 함락되었고, 1341년 에딘버러, 1342년 록스버그와 스털링이 함락되었다. 1341년 6월,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스코틀랜드 왕국에 귀환했다.
1346년 10월 데이비드 2세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하고 생포되었을 때, 발리올은 여전히 잉글랜드 국경지대의 명목상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를 붙잡아둬서 스코틀랜드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뜯어낼 생각만 했을 뿐, 발리올을 복위시키는 데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발리올은 단독으로라도 왕위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스코틀랜드로 잠입해 갤러웨이에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뒤 1355년까지 갤러웨이의 일부 지역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지만, 에드워드 3세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스코틀랜드군의 반격을 피해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356년 1월 20일, 발리올은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 국왕 칭호를 에드워드 3세에게 넘겨줬다. 이후 여생을 요크셔 인근에서 살다가 1364년 1월 자녀를 두지 못한 채 던케스터의 휘트리 힐즈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