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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알락산더르 2세 Alaxandair II | ||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 ||
이름 | 스코틀랜드 게일어 | 알락산더르 막 일리암 (Alaxandair mac Uilliam) |
영어 | 알렉산더 2세 (Alexander II) | |
출생 | 1198년 8월 24일 | |
사망 | 1249년 7월 8일 (향년 50세) | |
재위 | 스코틀랜드 알바 국왕 | |
1214년 12월 4일 ~ 1249년 7월 8일 | ||
부모 | 아버지: 일리암 1세, 어머니: 보몽오멘의 에르멩가르드 | |
형제 | 마거릿, 이사벨라, 마조리 | |
배우자 | 잉글랜드의 조안 (1221년 결혼/1238년 사별) 마리 드 쿠시 (1239년 결혼) | |
자녀 | 알락산더르 3세, 마조린 (사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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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29대 국왕.2. 생애
2.1. 초기 생애
1198년 8월 24일 헌팅던에서 알바 국왕 일리암 1세와 보몽 자작 리샤르의 딸이자 헨리 1세의 손녀 에르멩가르드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마거릿, 이사벨라, 마조리가 있었다. 그는 1201년 10월 12일 머스버러에서 알바 귀족들로부터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1209년과 1212년에 아버지와 잉글랜드의 존 왕이 체결한 조약에 증인으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아버지가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으로서 소유한 타인데일과 헌딩턴 영지의 계승자로 인정받는 대가로 존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1212년 3월 4일 미들섹스의 클러컨웰에서 존 왕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했으며, 1212년 여름 로스 백작령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트레드 막 일리암을 상대로 한 원정을 단행해 반란군을 섬멸했다.2.2. 잉글랜드 왕국과의 관계
1214년 12월 4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다음날 스콘에서 대관식에 참석해 알바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1215년 6월 15일,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을 때, 그는 헌팅던 백작의 자격으로 이를 지켜봤다. 그 후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를 거부하고 귀족들이 반발하면서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1215년 가을, 알락산더르 2세는 트위드 강을 건너 노섬벌랜드를 침공하고 노럼을 포위했다. 그 해 10월 19일, 일리암 1세의 사생아 딸들의 남편이었던 알릭 영주 유스타스 드 베시, 워크온트위드 영주 로버트 드 로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알락산더르 2세를 자신들의 주군으로 추대했다. 알락산더르 2세는 잉글랜드 북부 반란군과 합세한 뒤 12월 뉴캐슬을 공략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분노한 존 왕은 용병을 끌어모아 잉글랜드 북부로 진군했다. 그는 1216년 1월 칼라일과 리치더먼드 등 반란군의 성채들을 공략했다. 요크셔의 반란군 영주들은 알바 왕국으로 망명해 알락산더르 2세의 보호를 받았다. 존 왕은 뒤이어 알바 왕국으로 진군해 버윅을 점령하고 로디언을 파괴했다.
1216년 2월, 알락산더르 2세가 반격을 개시해 알바 왕국 경내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몰아냈다. 그 후 7월에 칼라일을 며칠간 포위해 공략했고, 9월 중순 프랑스의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받들었다. 1216년 10월 존 왕이 사망한 후, 헨리 3세가 뒤이어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잉글랜드 귀족들은 헨리 3세 쪽으로 돌아섰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반란군 연합은 1217년 5월 20일 링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헨리 3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영주들을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여기엔 알락산더르 2세도 있었다. 이에 알락산더르 2세는 칼라일로 후퇴했다.
1217년 12월 1일, 알락산더르 2세는 노샘프턴에서 헨리 3세와 접견한 뒤 타인데일과 헌팅던 백작으로서 경의를 표했고, 어린 헨리 3세를 대신해서 국정을 이끈 초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은 그가 내전 기간에 벌인 무력 활동에 대해 사면하기로 했다. 1218년 초, 호노리오 3세는 스코틀랜드 왕국에 적용했던 성무 금지령을 해제하고 알락산더르 2세의 파문을 취소했다.
1221년 6월 19일, 알락산더르 2세가 헨리 3세의 누이인 잉글랜드의 조안과 결혼하면서, 양국간의 갈등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알락산더르 2세는 노섬벌랜드 백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 대가로 컴벌랜드의 일부 영지를 받았다. 같은 해 누이 마거릿과 켄트 백작이자 잉글랜드의 권신 휴버트 드 버그가 결혼했고, 1225년에는 알락산더르 2세의 또 다른 누이 이사벨라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가 결혼했다. 알락산더르 2세는 두 누이의 지참금을 제공하기 위해 10,000 파운드의 특별세를 부과했다.
그 후 알락산더르 2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1223년 7월 우스터에서 헨리 3세와 만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고, 1229년 12월 요크에서 재차 만나 우정을 쌓았다. 1235년 여동생 마조리를 펨브로크 백작 길버트 마셜과 결혼시켰다. 그러던 1238년 조안 왕비가 사망한 뒤, 1239년 5월 15일 록스버러에서 피카르디의 쿠시 영주 앙게랑 3세 드 쿠시의 딸 마리 드 쿠시와 재혼했다. 헨리 3세는 이 결혼이 알락산더르 2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를 협공하는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해 군대를 동원했다. 알락산더르 2세 역시 군대를 준비했지만, 이후 협상을 통해 긴장이 해소되었고, 1244년 8월 14일 뉴캐슬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바 국왕은 방어를 목적으로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잉글랜드 왕국에 대한 적대 행위를 선언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이 협정에는 알락산더르 2세의 후계자인 알락산더르 3세와 헨리 3세의 장녀 마거릿의 약혼에 관한 조항도 포함되었다.
2.3. 교회와의 관계
알락산더르 2세는 스코틀랜드 교회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스콘, 콜딩엄, 던펌린, 앵거스, 멜로즈, 뉴배틀, 마누엘, 아브로스 등지의 수도원에 잇달아 기부했으며, 1227~29년 어머니 에르망가르드와 함께 파이프의 발메리노에 시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1230년경 모레이의 플루스카든에 발 데 슈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은 브리튼 제도 최초로 부르고뉴 수도회가 주도한 수도원이었다. 1230~31년 탁발 수도회가 주도하는 수도원이 스코틀랜드 최초로 세워졌으며, 그 외에도 도미니코회 수도원 9개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3개가 그의 치세에 추가로 세워졌다.1218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특권을 확대하는 칙령 <Filia specialis>("특별한 딸")을 반포했다. 그는 스코틀랜드가 세인트 앤드루스, 덤블레인, 글래스고, 던켈드, 브레친, 에버딘, 모레이, 로스 및 케이스네스의 주교구가 있는 사도좌의 '특별한 딸'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2.4. 스코틀랜드 북부 평정
1215년 1월, 돈카드 2세의 후손인 돔날 막 일리암이 알바 국왕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로스의 지역 귀족인 파콰르 막 태거트가 진압에 착수했고, 돔날 막 일리암은 그해 6월 19일에 생포된 뒤 처형되었다. 1221년 초, 알락산더르 2세는 하이랜드에서 반란을 일으킨 돔날 막 닐을 진압하기 위해 인버네스로 진군했다. 돔날 막 닐을 처단한 뒤, 그는 1221~22년에 아가일을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벌였고, 그 결과 킨터이어 반도와 카월이 왕실의 직할지가 되었으며, 타버트는 요새화되었으며 왕의 별궁이 자리잡았다. 1222년 9월 스코틀랜드 북부 수석 대리인인 케이스네스 주교 아담이 살해되자, 그는 같은 해 가을에 주교를 살해한 현지인들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파견했다. 살인자들은 체포된 뒤 신체 훼손형에 처해졌고, 케이스네스 백작 욘 하랄드손이 주교를 보호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영지 일부를 일시적으로 몰수했다.1228년 길레스부이그 막 윌리엄이 무리를 끌어모아 모레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부컨 백작 윌리엄 코민이 진압에 착수했다. 길레스코프는 토벌대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고, 그의 수급은 포파 시내에 전시되었다. 이리하여 돈카드 2세 후손의 대가 끊겼다. 그 후 알락산더르 2세는 월터 코민을 하이랜드의 베드녹과 로커버 영주로 삼고, 파콰르 막 태거트를 로스 백작에 세웠으며, 서덜랜드 백작을 설치해 케이스네스 주교구를 지키도록 했다. 1231년 욘 하랄드손이 살해되자, 앵거스의 매그너스를 오크니 백작이자 케이스네스 백작으로 세움으로써 오크니 제도 및 스코틀랜드 최북부를 알바 왕국의 일부로 완전히 편입했다.
2.5. 스코틀랜드 서부 평정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헤브리디스 제도엔 노르드인과 게일인의 혼혈인 족장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갤러웨이 영주 앨런은 1220년대에 알락산더르 2세의 동의를 얻어 스카이, 루이스, 맨 섬에 대한 군사 작전을 벌여 울라프 2세 그드뢰다르손을 몰아냈다. 그러나 이 행위는 헤브리디스 제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던 노르웨이 국왕 호콘 4세의 반발을 샀다. 1230년 1~21월, 울라프 2세 그드뢰다르손은 호콘 4세의 부관인 우스파크 하콘이 지휘하는 함대와 함께 돌아와서 헤브리디스 제도를 탈환하고 왕위에 복귀했다. 1230~1231년, 노르웨이, 오크니 제도, 헤브리디스의 연합 함대가 알바 왕국의 영토인 뷰트와 킨타이어 반도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러던 중 원정대 지휘관인 우스카프 하콘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고, 노르웨이군은 철수했다.1234년 갤러웨이의 영주 앨런이 정실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딸과 사생아 토마스를 남긴 채 사망했다. 이에 알락산더르 2세는 선왕 때 알바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던 갤러웨이를 복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왕위 계승에 대한 게일인의 관습을 무시하고 세 상속녀와 그들의 앵글로색슨-노르만 남편 사이에 일일이 분할 상속하도록 했으며, 사생아 토마스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이후 갤러웨이인들이 얼스터로 망명한 토마스를 위해 봉기하자, 알락산더르 2세는 1235년 7월 로스 백작 파콰르 막 태거트와 함께 진압에 착수해 반란군을 섬멸했다. 그 후 맨테스 백작 월터 코민을 갤러웨이의 보안관으로 세웠다. 1235년 말 헤브리디스와 아일랜드 전사들을 거느리고 갤러웨이에 상륙한 토마스는 월터 코민에게 토벌되어 체포된 뒤 종신형에 처해졌고, 아일랜드 지휘관 2명은 에든버러에 감금되었다.
그 후 알락산더르 2세는 헤브리디스 제도 전체를 자신의 왕국에 편입하기로 마음먹고, 1244년 하콘 4세에게 이 섬들에 대한 권리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하콘 4세는 단호히 거부했고, 1248년 이웬 막 두걸을 헤브리디스 제도로 보내 그곳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해 여름, 알락산더르 2세는 대규모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이웬 막 두걸을 축출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항구도시 오반 앞바다의 케라라 섬에서 열병에 걸려 1249년 7월 8일에 급사했고, 멜로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유일한 아들인 알락산더르 3세가 8살의 나이에 알바 국왕이 되었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마리 드 쿠시 (Marie de Coucy) | ||||
1남 | 알락산더르 3세 (Alexander III of Scots) | 1241년 9월 4일 | 1286년 3월 19일 | 잉글랜드의 마거릿 슬하 2남 1녀 |
욜란데 드 드루아 | ||||
사생아 | ||||
1녀 | 마조린 (Marjory) | - | - | 알란 던와드 슬하 3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