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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6대 국왕 제임스 4세 James IV | |
왕호 | 제임스 4세 (James IV) |
출생 | 1473년 3월 17일 |
스코틀랜드 왕국 스털링 스털링 성 | |
사망 | 1513년 9월 9일 (향년 40세) |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플로든 전투 | |
재위 |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 |
1488년 6월 11일 ~ 1513년 9월 9일 | |
배우자 | 잉글랜드의 마거릿 (1503년 결혼) |
자녀 | 제임스, 아서, 제임스 5세, 알렉산더 |
아버지 | 제임스 3세 |
어머니 |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
형제 | 제임스, 존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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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스코트어: Iames IV스코틀랜드 게일어: Seumas IV
영어 & 스코트어: James IV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6대 국왕으로 스튜어트 왕조의 왕들 중에선 그나마 제일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다. 스코틀랜드 역대 군주들 중 마지막으로 전투에서 전사한 왕이기도 하다.
2. 왕이 되기 전
무능했던 그의 아버지 제임스 3세에 실망한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당시 15세였던 제임스를 수장으로 삼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귀족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제임스는 그 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아무 결정권이 없었지만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회개했다. 그 후 매년 사순절(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고행을 기리는, 성회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부활절 일요일(Easter) 전날까지의 40일간)마다 철로 만든 참회복을 허리에 걸쳤다고 한다.3. 재위
3.1. 재위 초기
그 동안 귀족들에게 끌려다녔던 전대 국왕들과 달리 강력한 군주로 군림했다. 왕권에 대항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잠재웠고, 그간 중앙의 힘이 미치지 않던 변방의 군벌 맥도날드 가문도 복속시켰다. 이러한 중앙집권 정책으로 말미암아 왕실의 권위는 날로 높아졌고 스코틀랜드 내부의 안정을 불러왔다.또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노엄 성을 포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두쇠로 유명했던데다 이제 막 장미전쟁을 끝내 튜더 왕조를 세운 헨리 7세는 별 이득도 없고 손실만 큰 이 길고 긴 싸움을 이어갈 의지가 없었다. 결국 1507년 평화조약으로 제임스 4세가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와 결혼하면서 두 왕조 간의 혼인관계가 성립됐다.[1] 이후 헨리 7세 치세 동안은 잠시나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또한 해군력이 취약하던 스코틀랜드에 조선소를 세우고 함대를 구축해 왕립 스코틀랜드 해군의 기초를 다졌다. 그가 당시 지은 ‘위대한 마이클’(Great Michael)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함이었다고 한다.
3.2. 전쟁, 그리고 죽음
그러나 잉글랜드와의 관계는 제임스 4세의 처남 헨리 8세가 왕이 되며 악화되었다. 젊고 혈기 넘치는 데다가 군사적 영광에 심취한 헨리 8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풍족한 국고를 바탕으로 유럽의 외교판에 뛰어들었다. 이탈리아 전쟁으로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본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베네치아와 아라곤 왕국을 끌어들여 신성동맹을 결성하자 헨리 8세는 프랑스에 시비도 걸고 자신의 국제적 위상도 높일 겸 1511년 11월 동맹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처지가 난감해졌다. 오랜 동맹 관계였던 프랑스가 여러 미끼를 제시했지만 헨리 7세 이내 평온한 잉글랜드와의 관계도 깨고 싶지않았다. 하지만 제임스는 젊은 처남의 호전성을 우려했고 잉글랜드가 대륙에서 승리할 경우 다음 희생물은 스코틀랜드가 될 것이 뻔했다. 결국 깊은 논의 끝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갱신하기로 결정했다. 헨리 8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 제임스 4세는 프랑스를 돕기로 결정하고 헨리 8세에게 서신을 보내어 프랑스를 공격하지 말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것을 경고하며 스코틀랜드를 경멸하는 어투로 서신을 보냈다. 이에 격분한 제임스 4세는 의회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중무장한 4만 2천 명의 병사와 포병 전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2] 스코틀랜드군은 노럼 성을 비롯한 북부 잉글랜드의 성 4채를 불태우는 등 성과를 보였으나 잉글랜드군의 전술에 휘말려 1513년 9월 9일 플로든 전투에서 서리 백작 토마스 하워드가 이끌던 2만 6천명의 잉글랜드군에 패했다. 양군간에 처절한 전투 끝에 지휘관이던 제임스 4세는 전사하였으며[3]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병사들이 희생당했다.[4]4. 평가
동시대 르네상스 군주들처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은 왕이였다. 정치적 외에도 문화적으로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스코틀랜드에 르네상스를 들여오는데 이바지했다. 현재도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4세는 평이 좋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갓난아기였던 그의 아들한테 돌아가며 섭정직을 놓고 친프랑스파 귀족들과 친잉글랜드파 귀족들의 내분으로 스코틀랜드는 혼란에 빠졌다.[1] 이 결혼으로 훗날 제임스 4세의 증손자 제임스6세가 헨리 7세의 후손으로서 잉글랜드의 왕위를 얻을수 있었다.[2] 이 병력이 스코틀랜드가 동원한 최대의 동원 병력이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인구가 50만이었기에 전체 인구의 9%에 달하여 말그대로 총력전으로 동원했다. 다만 플로든 전투 때는 북부 잉글랜드 지역의 전투와 질병 등으로 사망하거나 일부 귀족들이 휘하 병력들을 이끌고 이탈해서 스코틀랜드군 병력이 3만-4만 명으로 줄었다. 그러다보니 플로든 전투의 패배로 스코틀랜드는 큰 타격을 받는다.[3]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잉글랜드군의 화살에 턱을 맞고 미늘창에 손을 베이고 목을 찔려 사망한다.[4] 잉글랜드 측은 사상자가 1,500명이고 스코틀랜드는 그 10배인 1만 7천명이었다. 무엇보다 좌익의 병력을 지휘하던 장군 홈 경(Lord Home, 알렉산더 홈 3세)이 제임스 4세를 돕지않고 병력들과 함께 도주하는 바람에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퇴로가 차단당하고 말았으며 국왕 제임스 4세와 귀족 및 병사들이 잉글랜드군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웠기에 사상자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군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참고로 도주한 홈 경은 이 일로 왕실에서 추궁당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코틀랜드 왕실이 보낸 군대에 패하였고 잉글랜드로 도주하다가 붙잡혀 반역죄로 참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