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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2 17:22:47

말 콜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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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말 콜룸 4세
Máel Coluim IV
파일:말 콜룸 4세.webp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이름 스코틀랜드 게일어 말 콜룸 막 안리크
(Máel Coluim mac Eanric)
영어 맬컴 4세
(Malcolm IV)
출생 1141년 3월 20일 또는 4월 23일에서 5월 24일 사이
사망 1165년 12월 9일 (향년 24세)
재위 스코틀랜드 알바 국왕
1153년 5월 24일 ~ 1165년 12월 9일
부모 아버지: 헌팅던 백작 헨리, 어머니: 워렌의 에이다
형제 일리암 1세, 마거릿, 데이비드, 에이다, 마틸다, 마조리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27대 국왕. 미혼인 채 사망했기 때문에 Virgo("순결한 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2. 생애

1141년 봄에 알바 국왕 다비드 1세의 장남이자 헌팅던 백작인 헨리와 제2대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의 딸 에이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멜로즈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1141년 3월 20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반면에 1885년에 발행된 영국 인명 사전에 따르면, 1141년 4월 23일과 5월 24일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1152년 6월 12일 아버지 헨리가 사망하면서, 그는 다비드 1세의 상속인이 되었다. 다비드 1세는 손자의 나이가 11살에 불과한 걸 우려해, 파이프의 모르마르 돈차드 1세를 섭정으로 지명하고, 알바 왕국 전역을 돌며 미래의 게일족 신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게 했다.

1153년 5월 24일 다비드 1세가 사망한 뒤, 말 콜룸 4세는 12살의 나이로 알바 국왕이 되었다. 돈차드 1세가 섭정을 맡았고, 왕실 대집사 월터 피츠앨런, 보안관 휴고 드 모르빌, 대재판관 월터 비동, 그 외의 여러 세속 고문과 성직자 고문이 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얼마 후 노르웨이에서 몰려온 해적들이 왕국의 동쪽 해안을 습격하고 애버딘을 약탈했다. 그리고 1153년 말에 모레아에서 막 베하드의 친척인 돔날이 반란을 일으켰다. 돔날은 군도 왕국의 군주 소머레드의 지원을 받았다. 1156년, 돔날은 토벌군에게 패배해 사로잡힌 뒤 록스버러 감옥에 수감되었다. 1157년 돔날은 말 콜룸 4세와 화해한 뒤 로스의 모르마르가 되었다. 1159년, 말 콜룸 4세는 소머레드와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써 왕국의 분란을 종식했다.

한편, 알바 왕국 남쪽의 강대국인 잉글랜드 왕국에서 1138년부터 15년간 이어지던 무정부시대가 말 콜룸 4세가 왕위에 막 올랐을 무렵인 1153년 11월에 종식되었다. 그 후 스티븐 왕이 1154년에 사망했고, 헨리 2세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되었다. 헨리 2세는 무정부시대 동안 잉글랜드 왕국 북부를 갉아먹은 알바 왕국에 압력을 가하기로 했다. 1156년, 헨리 2세는 대규모 병력을 북부 국경에 배치하고 잉글랜드의 영토인 노섬브리아컴브리아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전임 알바 국왕 다비드 1세는 이 땅을 아내 모드의 이름으로 소유했으며, 다비드 1세가 사망한 후 계약이 만료되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왕국의 분란을 수습하느라 정신 없었던 말 콜룸 4세는 헨리 2세와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157년 7월 체스터로 가서 헨리 2세와 접견한 뒤, 뉴캐슬, 범버러, 칼라일 성을 포함하여 헨리 2세가 요구햇던 모든 땅을 잉글랜드 왕국에 돌려주고, 그 대가로 할머니 모드의 상속 재산 중 일부인 헌팅던 백작령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헌팅던 백작으로서 헨리 2세의 봉신이 되겠지만, 알바 국왕으로서는 헨리 2세와 동등하다는 걸 인정하는 걸 조건으로 제시했고, 헨리 2세는 수락했다.

1158년 1월, 말 콜룸 4세는 칼라일에서 헨리 2세와 만나서 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1159년 4월이나 5월에 록스버러를 방문한 뒤 세인트앤드루스의 새 주교 선출을 확정했다. 1159년 6월 16일, 말 콜룸 4세는 툴루즈 백작을 정벌하는 걸 도와달라는 헨리 2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동생 일리암 1세와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넜고, 6월 24일 푸아티에에서 헨리 2세와 합류했다. 그는 1159년 7~9월 툴루즈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헨리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툴루즈 원정이 끝난 뒤, 말 콜룸 4세는 알바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스트래선 백작 페르샤르드와 갤러웨이 모르마르 퍼거스를 포함한 다섯 영주들이 말 콜룸 4세가 알바 왕국을 통치하지 않고 잉글랜드 국왕의 뜻에 따라 머나먼 툴루즈로 간 것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말 콜룸 4세를 폐위한 뒤 일리암 1세를 새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반란군은 퍼스에서 말 콜룸 4세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그 후 말 콜룸 4세는 갤러웨이로 3차례의 원정을 감행해 평정한 뒤 그 지역을 왕실 직할지로 삼았다. 이후 알바 성직자들의 중재로 갈등은 종식되었다. 말 콜룸 4세는 1160년 크리스마스에 퍼스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왕국의 모든 중요 인물이 여기에 참석했다. 1161년, 말 콜룸 4세는 모레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부하들을 그곳의 집행관으로 배치했다.

말 콜룸 4세의 치세 동안 시토회, 베네딕토회, 클뤼니회 수도원 및 교회들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시토회에서는 쿠파 앵거스, 노스 버윅 등지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베네딕토회는 헌팅던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클뤼니회는 페이즐리에 수도원을 세웠다. 또한 여성을 위한 베네딕토회 수녀원이 링컨에 개원되었다. 또한 그는 앵거스의 레스탠넷 수도원 토지를 경작하던 농민들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에게 당장 수도원으로 돌아가라고 경고하는 칙령을 내리면서, 수도원에 도망자를 수색할 권한을 부여했다.

한편, 말 콜룸 4세는 요크 대주교가 알바 왕국의 모든 교회를 자신의 배하에 두려고 시도하는 걸 단호히 거부했다. 1159년 여름, 말 콜룸 4세는 모레이 주교 일리암, 시종장 니콜라스를 교황청에 사절로 보내 세인트 앤드류스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격상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세울 수는 없지만, 모레이 주교 일리암을 교황 특사로 세우고, 세인트앤드루스 주교의 추천으로 이뤄진 것으로 간주한다고 답했다.

1163년, 말 콜룸 4세는 동생 데이비드와 함께 잉글랜드를 방문했지만 돈케스터에서 중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해 7월 건강을 회복하고 의회가 개최된 우드스톡으로 여행을 떠났다. 영국 인명 사전에 따르면, 말 콜룸 4세는 1163년 7월 1일 헨리 2세에게 봉신 서약을 재차 하고 동생 데이비드 및 몇몇 젊은 귀족을 인질로 넘겼다고 한다. 그 후 알바 왕국으로 돌아온 그는 1164년 군도 왕국의 군주 소머레드의 침략에 직면했다. 소머레느는 글래스고를 약탈했지만, 뒤이언 렌프루 선투에서 월터 피츠앨런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1165년 12월 9일, 말 콜룸 4세는 체드버러에서 사망했다. 얼스터 연대기는 그가 머리가 많이 컸다고 밝혔으며, 영국 인명 사전에서는 그가 머리와 다리에 심한 통증을 겪었다고 서술했다. 일부 학자들은 파제트병[1]에 시달렸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죽기 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순례할 계획을 세웠지만 끝내 가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일리암 1세가 뒤이어 알바 국왕이 되었다.


[1] 뼈에 비정상적인 교체가 나타나 뼈가 비대하고 연약해지는 만성 골격 질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