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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5 18:37:06

일리암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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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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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일리암 1세
Uilliam I
파일:일리암 1세.webp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이름 스코틀랜드 게일어 일리암 막 안리크
(Uilliam mac Eanric)
영어 윌리엄 1세
(William I)
출생 1142년
사망 1214년 12월 4일 (향년 71~72세)
재위 스코틀랜드 알바 국왕
1165년 12월 9일 ~ 1214년 12월 14일
부모 아버지: 헌팅던 백작 헨리, 어머니: 워렌의 에이다
형제 말 콜룸 4세, 마거릿, 데이비드, 에이다, 마틸다, 마조리
배우자 보몽오멘의 에르멩가르드
자녀 알락산더르 2세, 마거릿, 이사벨라, 마조리, 이사벨라(사생아), 에이다(사생아) 등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왕비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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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28대 국왕.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 중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49년) 군주이다.

2. 생애

1242년경 알바 국왕 다비드 1세의 장남이자 헌팅던 백작인 헨리와 제2대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의 딸 에이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152년 아버지 헨리가 사망하자, 다비드 1세는 그의 형 말 콜룸 4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그를 노섬벌랜드 백작에 선임했다. 1153년 다비드 1세가 사망한 뒤 말 콜룸 4세가 왕위에 올랐고, 그는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1157년, 헨리 2세의 압력에 굴복한 말 콜룸 4세가 다비드 1세가 생전에 확보했던 노섬벌랜드와 컴브리아를 잉글랜드에 반납하면서, 그는 노섬벌랜드 백작위를 상실했다.

1165년 12월 9일 말 콜룸 4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고, 12월 24일 스콘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따. 그 후 무난하게 통치하던 1173년, 앙주 제국에서 대반란이 발발했다. 앙주 제국의 군주 헨리 2세의 세 아들 청년왕 헨리, 조프루아 2세, 리처드 1세가 반란을 일으켰고, 어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이를 사주했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7세, 불로뉴, 플란데런, 블루아 백작들이 여기에 가세했으며, 잉글랜드, 브르타뉴, 멘, 푸아투, 앙굴렘 등지에서도 반란이 빗발쳤다. 일리암 1세는 이 때를 틈타 잉글랜드를 침공해 지난날에 돌려줘야 했던 노섬벌랜드와 컴브리아를 도로 공략하기로 했다.

1173년 8월, 일리암 1세는 노섬벌랜드와 컴브리아를 침공해 반란군과 가담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있는 많은 요새화된 성을 공략하는 데 애를 먹다가 후퇴했다. 헨리 2세를 지지하는 귖고들은 이에 보복하고자 알바 왕국을 공격해 베윅을 불태우고 로디언을 약탈했다. 1174년 4월, 일리암 1세는 다시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6월에 칼라일을 포위했다. 그러나 헨리 2세의 사생아인 제프리에게 격퇴되었고, 알닉으로 후퇴했다가 지방군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다. 그 후 1174년 12월까지 연금되었다가 팔레즈 조약에 동의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에 따르면, 그는 헨리 2세에게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헨리의 부하들에게 알바 왕국의 주요 요새 5개를 넘겨줘야 했다. 또한 헌팅던 백작령이 몰수되었으며, 시몽 3세 드 상리스가 그 땅을 접수했다.

1174년, 갤러웨이의 두 공동 영주인 길리브리테와 우트레드가 일리암 1세가 포로 생활하는 틈을 타 알바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175년 10월 9일, 두 영주는 헨리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일리암 1세는 그들을 섣불리 응징하려 했다가 헨리 2세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그들의 독립을 용인해야 했다. 1179년 초, 일리암 1세는 동생 데이비드와 함께 로스 원정을 개시하여 크로마티 퍼스 북쪽 해안의 던스케이스 성과 뷰리퍼스의 에디르두어 성을 요새화했다.

1181년, 돈카드 2세의 손자이자 스카프턴과 크레이븐의 영주 윌리엄 피츠던컨의 아들인 돔날 막 일리암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오크니 제도의 지배자 하랄드 마다드손의 지원을 받고 자신에게 알바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일리안 1세는 돔날 막 일리암을 진압하려 했다가 오크니 제도의 노르드인과 충돌했다간 그들의 주권자인 노르웨이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섣불리 진압하지 못했다.

1185년 1월 갤러웨이 공동 통치자 길리브리테가 사망한 뒤, 우트레드의 아들 라클런은 일리암 1세의 사주를 받고 길리브리테의 아들 돈카드의 영지를 빼앗았다. 이에 헨리 2세가 1186년 칼라일로 가서 갤러웨이 분쟁에 개입했고, 라클런은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돈카드의 영지 소유를 인정받았다. 그러자 일리암 1세가 라클런에게 압력을 행사해 도로 복종을 받아냈다. 그 후 일리암 1세는 1186년 9월 5일에 헨리 2세의 심복인 보몽 자작 리샤르의 딸이자 헨리 1세의 손녀인 보몽오멘의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하면서 헨리 2세와의 분쟁을 종식했다. 이때 헨리 2세는 일리암 1세에게 에든버러 성을 지참금 형식으로 알바 왕국에 돌려줬다.

1187년 7월, 일리암 1세는 돔날 막 일리암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하기로 하고, 자신의 봉신이 된 갤러웨이 영주 라클런에게 토벌을 맡겼다. 라클런은 맘 가르비아 전투에서 돔날 막 일리암을 격파하고 그의 수급을 베어서 일리암 1세에게 바쳤다. 1189년 12월 5일, 일리암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자금 확보에 공을 들이던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와 캔터베리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일리암 1세는 10,000 마크에 달하는 자금을 제공해주는 대신, 헨리 2세가 빼앗았던 여러 성을 돌려받았다.

한편, 일리암 1세 치세에서도 요크 대주교가 스코틀랜드 교회 전체를 관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1176년 노샘프턴에서 열린 공의회는 이 문제를 논의헀지만, 양자간의 대립이 심했기에 결론 없이 끝났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교황 칙서 <Super anxietatibus>("걱정에 대하여")를 반포해, 요크 대주교가 자신의 권리를 증명할 때까지 스코틀랜드 주교들의 요크 수위권을 해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알락산데르 3세는 일리암 1세에게 요크 대주교가 스코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라고 권고했지만 통하지 않자, 1181년 일리암 1세를 파문하고 알바 왕국 전역에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3세가 사망한뒤 이 조치는 흐지부지되었고,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1192년 일리암 1세의 설득에 응해 요크 대주교가 스코틀랜드 전역을 관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배제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독립을 옹호하는 최종 칙서<Cum universi>("전 세계와 함께")를 반포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교회는 요크 대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1194년, 오크니 제도의 지배자 하랄드 마다드손이 노르웨이 국왕 스베레 시구르손에 대한 음모에 관여했다가 발각되면서, 양자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1196년, 일리암 1세는 노르웨이의 지원을 얻지 못하게 된 오크니 제도에 대한 원정을 단행했다. 하랄드 마다드손은 1197년에 생포되었고, 일리암 1세는 그에게서 케이스네스 백작령을 박탈했다. 하랄드는 록스버러 성에 투옥되었다가, 아들 토르핀을 인질로 넘기고 풀려났다. 케이스네스는 일리암 1세에 의해 소머레드의 아들인 라그날드에게 넘겼다. 이후 오크니 제도에서 하랄드 마다드손과 하랄 3세 에릭손 간의 내전이 1년간 이어졌다. 일리암 1세는 하랄 3세 에릭손을 지원했지만, 하랄드 마다드슨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하랄 3세 에릭손을 처단했다.

<오크니 제도 사가>에 따르면, 일리암 1세는 라그날드를 사주했다. 하랄드 마다드손에 맞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하랄드가 승리하면서 케이스네스를 탈환했다. 다만 일리암 1세의 봉신을 자처하고 충성을 맹세해, 알바 왕국의 예상되는 보복을 회피했다. 얼마 후, 하랄드는 그 후 하랄드는 존 왕에게 잉글랜드 왕국에 충성을 바칠 테니 알바 왕국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케이스네스의 주교 존이 이 사실을 일리암 1세에게 밀고하자, 하랄드는 존 주교의 거점에 손님으로 방문했다가 돌변해 존을 체포하고 실명과 혀를 베는 형벌에 처했다. 일리암 1세는 케이스네스 주교를 가혹하게 처분한 하랄드 마다드손을 신앙의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인질로 보내졌던 토르핀을 실명과 거세형에 처했다. 그 후 대규모 알바군이 1201~1202년에 오크니 제도로 진군하자, 하랄드는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한 뒤, 케이스네스 수입의 1/4을 일리암 1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1209년, 일리암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노섬벌랜드컴브리아를 접수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잉글랜드의 존 왕은 즉각 알바 왕국으로 쳐들어가서 스코틀랜드 저지대를 파괴한 뒤 일리암 1세를 압박해 그해 9월에 노럼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일리암 1세는 존에게 15,000 마크를 지불하고 두 딸 마거릿과 이사벨라를 인질로 제공해야 했다.

1211년 돔날 막 일리암의 아들인 고트레드 막 돔날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스에 상륙해 추종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일리암 1세의 아들 알락산더르 2세가 갤러웨이의 영주 라클런의 아들인 아솔 백작 토마스가 이끄는 갤러웨이군과 합세한 뒤 반격 작전에 착수했고, 고트레드는 1212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생포된 뒤 처형되었다.

1214년 12월 4일, 일리암 1세는 스털링에서 향년 71~72세로 사망했다. 사후 아브로스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장남 알락산더르 2세가 알바 국왕이 되었다.

3. 가족

3.1. 왕비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이사벨라
(Isabella)
1193년 1259년 11월 25일 켄트 공작 휴베르 드 버러
슬하 1녀
2녀 마거릿
(Margaret)
1195년 1263년 10월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
1남 알락산더르 2세
(Alexander II of Scots)
1198년 8월 24일 1249년 7월 6일 잉글랜드의 조안
마리 드 쿠시
슬하 1남[1]
3녀 마조리
(Marjorie)
1200년 1244년 11월 17일 펨브로크 백작 길버트 마셜
슬하 1녀


[1] 알락산더르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