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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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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트족 전사
Picts
1. 개요2. 사료3. 어원4. 역사
4.1. 기원4.2. 청동기 시대4.3. 철기 시대4.4. 로마 제국과의 대결4.5. 픽트랜드
5. 사회6. 종교7. 예술8. 언어
8.1. 켈트어파 가설
8.1.1. 반론
8.2. 스키타이어군 가설
8.2.1. 반론
9. 픽트족의 왕
9.1. 이름과 통치 기간만 전해지는 군주들9.2. 초기 통치자들9.3. 후기 통치자들9.4. 10년 분쟁
10.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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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시기부터 10세기까지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에 거주하던 부족. 켈트처럼 타탄체크 바지를 입고, 얼굴이나 상체만 벌거벗은 채 푸른 물감[1]으로 문신그리고, 을 입히는 문화를 지녔기 때문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2. 사료

그레이트브리튼섬과 그곳에 사는 주민에 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은 기원전 5세기 고대 카르타고 여행자 하밀카르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서기 4세기 고대 로마 작가 아비에누스가 인용했다. 아비에누스가 인용한 하밀카르의 기록에 따르면, 브리튼섬에는 알비온(Albion) 족이 거주했다고 한다. 알비온은 나중에 알바(Alba)로 변형되었는데, 이는 아일랜드인이 브리타니아 주민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나중에 스코틀랜드 왕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형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기에서 브리튼 섬을 침공했을 때 그 섬의 원주민들을 브리타니(Britanni)라고 언급했고, 로마인들은 나중에 섬 전체를 이 이름의 변형된 형태인 브리타니아라고 칭했다. 로마 제국 시기 로만 브리튼의 총독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생애에 관한 저서를 집필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브리타니아에 브리타니인, 실루리아인(Silurians), 그리고 칼레도니아인이 거주했다고 밝혔으며,브리타니인은 갈리아인과 유사하지만 실루리아인과 칼레도니아인은 서로 다른 종족이라고 밝혔다. 서기 2세기의 그리스 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칼레도니아에 13개 부족이 거주한다면, 이들 부족의 이름과 지위를 밝혔다.

디오 카시우스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칼레도니아에는 마에타이족(Maeatae)과 칼레도니족(caledonii)의 강력한 부족 2개로 구성된 단 하나의 국가만이 존재했다고 밝혔다. 마에타이족은 하드리아누스 방벽안토니누스 방벽 사이에 거주했던 부족이며, 칼레도니족은 안토니누스 방벽 너머에 거주하는 부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두 종족의 이름은 훗날 '픽티(picti)'라는 새로운 용어로 대체되었다. 픽트족을 거론한 최초의 작가는 2세기 후반의 로마 수사학자 에우메니우스로, 그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칼레도니아인과 기타 픽트인"이라고 언급했다.

6세기 이후의 픽트족에 관한 사료로는 베다의 교회사 <앵글로 왕국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아돔나누스 히엔시스(Adamnanus Hiensis, 624 ~ 704)의 저서 <아이오나의 성 콜룸바[2] 전기>와 같은 성인 전기, <얼스터 연대기>, <티거나흐 연대기>, <이니스폴렌 연대기>, <네 주인 연대기> 등 아일랜드 수도자들이 작성한 연대기, 스코틀랜드 수도자들이 집필한 <클론맥노이즈 연대기>, <레보르 브레트나흐>, 더럼의 시므온이 집필한 <앵글로 왕들의 역사>(Historia Regum Anglorum), 그리고 웨일스 수도자가 집필한 <웨일스 연대기>를 들 수 있다. 노르웨이의 역사를 다룬 라틴어 연대기인 <노르웨이의 역사>(Historia Norvegiæ)에서도 언급된다. 이 책은 12세기 말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노르웨이 수도자가 집필한 저서로, 노르웨이인들이 오크니 제도에 상륙했을 때 그곳에 살았던 픽트족에 관해 설명했다.

3. 어원

학계에서는 대체로 픽트(Pict)라는 용어가 '몸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란 뜻의 그리스어 'Prettanike' 또는 그림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 단어 핀게레(Pingere)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한다.[3] 다만 일부 학자들은 픽트족이 남긴 석조 기념물을 가리키는 용어일 수도 있다고 추정하며, 일각에서는 지역 명칭이 로마어로 변형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아일랜드 게일족과 스코틀랜드의 달 리어타 왕국은 픽트족을 크루이트네(Cruithne)라고 불렀다. 중세 시대에 북동부 아일랜드에서는 크루이트네 족이 건국한 달 나라이디(Dál nAraidi)가 있었다. 웨일스인과 콘월인은 픽트족을 '프러데인'(Prydyn)이라고 불렀으며, 앵글로색슨족은 '페히트인'(pechts)이라고 불렀다.

4. 역사

4.1. 기원

사람들은 기원전 7500년경부터 스코틀랜드에 살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 살다가, 기원전 4,000년경부터 농업을 시작했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숲을 개간하고 도자기를 만들었으며, 큰 무덤과 제사에 쓸 기념물을 세웠다. 이후 외부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인간 유전학 교수 브라이언 사익스(Bryan Sykes)와 스티븐 오펜하이머(Stephen Oppenheimer)는 브리튼 섬에 거주하는 인구 대부분은 중석기 시대 또는 신석기 시대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스코틀랜드 북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도거 뱅크를 통해 이주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뤘다고 추정한다.

영국 고고학자 안나 리치(Anna Ritchie)는 브리튼 섬으로 이주한 인간들의 가장 먼 조상은 기원전 3,000년에 루이스 섬에 갈라니시 등 거대한 돌 기념물을 건설한 사람들이었으며, 이후 간혈적인 이주가 종종 있었지만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에 이르기 전에는 대규모 이주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로만 브리튼 전문 역사가 피터 셀웨이(Peter Salway)는 로마인들이 언급한 칼레도니아인은 픽트족 토착부족과 브리튼 섬 남쪽에서 로마군의 침략을 피해 북쪽으로 도망친 난민들로 구성되었다고 추정하면서, 픽트족은 역사 사료에서 이름이 언급되기 전부터 스코틀랜드에 '항상'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4.2. 청동기 시대

기원전 1,000년경, 스코틀랜드는 2,000년 동안 농사가 지어지면서 숲이 대거 사라졌고, 신석기 시대의 대규모 기념비들이 사라지고 슈타인세팅(Steinsetting)[4]과 매장지가 흩어져 있는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케언패플 힐(Cairnpapple Hill) 에서는 원석을 철거하고 재사용하여 고분을 건설했다. 이 시기부터는 귀족과 왕 계급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요새화된 지역에서 전사 집단이 지배하는 소규모 부족이 형성되었다.

한편, 광범위한 무역 교류 체제가 청동을 통해 구축되었다. 스코틀랜드에는 청동이 에든버러 동쪽과 북쪽의 강 계곡을 따라 대량으로 매장되었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도 청동이 종종 채굴되었다. 그래서 청동이 부족한 유럽의 타 지역 사람들이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서 청동을 물물교환으로 확보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국제 거래를 통해 언어도 확산되었을 것이다. 특히 켈트어는 공통 무역 언어로 사용되면서 모국어와 혼합되어 방언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선사시대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켈트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4.3. 철기 시대

기원전 700년경, 청동에 비해 매장량이 훨씬 많은 이 무기와 도구의 새로운 재료가 되자, 유럽 무역 교류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소규모 부족들은 더욱 내성적이고 자립적이 되어 지역 문화를 장려했다. 기념비적인 가옥과 요새를 건설하는 데 막대한 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언어 및 문화 교류가 이러진 것은 훗날 로마 제국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을 때 부족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맞설 만큼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배경이 되었다.

철기 시대에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언덕과 능선에 수많은 크고 작은 요새가 흩어져 있었는데, 특히 포스 강과 타인 강 사이 지역에 90%에 가까운 요새들이 세워졌다. 역사가들은 팍스 로마나로 인해 스코틀랜드 남부의 농부들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면서 요새 건설을 중단했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그러나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통한 연구 결과, 로마인들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기 훨씬 전에 요새 건설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많은 지역에서 토지를 소유한 가족이나 부족은 대체로 독립적이었으며, 지역 전통이 발전하고 방언이 등장했으며, 문화적 차이가 확립되었다. 동시에 일부 부족이 국경을 설정하고 더 큰 산림 지역을 경작하는 등 더 큰 프로젝트를 위해 스스로 조직함에 따라 중앙집권화가 강화되었다.

디오 카시우스는 칼레도니아 북부 부족들은 "땅을 경작하지 않고 가축과 사냥, 특정 종류의 열매를 먹고 살았다"고 기술했으며, 신발도 없이 벌거벗고 텐트에서 살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그들을 야만족으로 간주한 로마 학자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에 신뢰할 수 없다고 본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칼레도니아인들은 붉은 머리카락과 큰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갈리아인들에 대해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 <노르웨이의 역사>(Historia Norvegiæ)는 오크니 제도 원주민들은 키가 작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로부터 스코틀랜드 선사 시대 주민들에 대한 인종적 특징을 추출하기는 어렵다.

4.4. 로마 제국과의 대결

서기 43년, 로마 제국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을 통해 브리튼 섬 남부를 정복하고 로만 브리튼을 창설했다. 그 후 로마군이 점진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끝에, 79년 잉글랜드웨일스 전체가 정복되었고, 브리튼 북부만 남았다. 로마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저지대에는 로디언(Lothian) 동쪽의 보타디니(Votadini), 노반테(Novantae) 와 셀고바에(Selgovae) 족이 거주했으며, 스코틀랜드 북부에는 타키투스가 총칭하여 칼레도니아인(caledonii)으로 통칭한 여러 부족이 살았다고 한다.

80년, 로마 총독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브리튼 북부 정복전에 착수헀다. 아그리콜라는 9군단을 파견해 보타디니족을 복속했고, 20군단은 애넌데일 서쪽으로 진군해 노반테 족을 복속했다. 이후 아그리콜라는 클라이드와 포스 사이의 스코틀랜드 남부에 일련의 요새를 건설해 로마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서기 82년, 아그리콜라는 재차 칼레도니아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킨타이어 또는 아가일 해안으로 항해하여 그곳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공물을 받아냈다. 도중에 칼레도니아인들이 제9 히스파니아 군단의 진영을 야습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아그리콜라가 기병을 이끌고 이들을 물리쳤다.

이 일련의 공세에 위기를 느낀 칼레도니아 부족들은 힘을 합쳐 로마 제국에 대항하기로 하고 지휘관으로 칼가쿠스를 선임했다. 그는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는 건 자살 행위라 여기고, 적의 보급로를 끊고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을 동원하여 로마군을 지치게 만들기로 했다. 83년 칼레도니아 원정을 개시한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고전했다. 아그리콜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그들을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칼가쿠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의 주요 곡물 창고를 공략해, 적에게 겨울 동안 굶어죽거나 싸우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결국 칼가쿠스는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고, 양군은 몬스 그라우피우스에서 맞붙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칼가쿠스가 이끄는 칼레도니아 연합군은 30,0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최전방 부대는 평지에 배치했지만 다른 부대는 고지대에 주둔했으며, 칼레도니아 전차는 양 군대 사이의 평야에 있었다. 이에 맞선 아그리콜라의 로마 군대는 17,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아그리콜라는 8,000명의 보조군 보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3,000명의 기병을 양측면에 배치했으며, 로마 군단병을 예비대로 세웠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칼가쿠스는 전투 직전에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이 전쟁의 기원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 우리의 연합이 브리타니아 전체를 자유롭게 할 시작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노예제는 우리 모두에게 미지의 것이다. 우리 너머에는 육지가 없고 바다조차도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로마 함대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용감한 자가 영광을 얻는 전쟁과 전투에서 겁쟁이라도 안전을 얻을 것이다. 다양한 운명과 함께 로마인들에 저항했던 이전의 부족들은 브리튼의 가장 유명한 자들로, 브리타니아의 중심부에 거주하며, 우리는 정복자들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심지어 노예의 전염에 의해 우리의 눈조차 오염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희망으로 남아 있었다.

땅과 자유의 경계에 사는 우리에게 브리타니아의 영광이라는 외딴 성역은 지금까지 지켜져왔다. 그러나 이제 브리타니아의 가장 먼 한계선이 열려 있고, 미지의 것은 항상 경이로운 것으로 통한다. 우리 너머에는 어떤 부족도 없고, 실제로 파도와 바위 뿐이다. 이보다 훨씬 무서운 로마인들에게 순종과 굴종으로 압제를 피하려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저 세계의 강도들은 끊임없이 약탈하여 땅을 고갈시키고 심연을 파괴했다. 적이 부자이면 탐욕을 채우려들고, 적이 가난하면 지배권을 갈망한다. 동쪽과 서쪽도 그들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그들은 강도, 살육, 약탈에 제국이라는 거짓 이름을 붙인다. 그들은 폐허를 만든 뒤 평화라고 부른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양측은 서로를 향해 원거리 무기를 쏟아부었다. 이후 아그리콜라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방에 배치된 보조군 부대가 정면 공격을 개시했다. 언덕 아래에 배치되었던 칼레도니아인은 순식간에 압도당하여 패주했다. 정상에 있었던 칼레도니아인들은 측면 공격을 시도했지만, 로마군 기병에게 역공당하여 격파되었다. 그들은 인근 삼림지대의 피난처로 도망쳤지만, 잘 조직된 로마군에게 추격당해 모조리 살해당했다. 이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레도니아인 10,000명이 죽었고, 보조군 360명이 전사했다. 로마 군단병은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000명 가량의 칼레도니아인은 추격대를 피해 산속 깊숙이 숨을 수 있었다.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 이후, 아그리콜라는 함대를 이끌고 칼레도니아의 동부 및 북부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칼레도니아는 이때까지 대륙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섬이었다는 것이 이 항해로 밝혀졌다. 아그리콜라는 항해를 마친 뒤 칼레도니아 고원과 북동부의 저지대 전체에 도로와 요새를 구축하여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칼레도니아 고지대와 히베르니아 섬까지 공략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기 85년 다키아 왕국이 다뉴브(도나우, 다누비우스) 강 전선을 침공해 로마 군단을 섬멸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아그리콜라에게 로마로 귀환하라고 명령하면서, 원정은 중단되었다.

아그리콜라의 후임 총독들은 칼레도니아 원정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그리콜라가 칼레도니아에 세웠던 모든 요새들은 몇 년 안에 버려졌고, 로마 제국과 칼레도니아의 경계선은 전쟁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는 막대한 원정 비용에 비해 칼레도니아를 정복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빈약해서 굳이 전쟁을 벌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스코틀랜드 동부 테이 강의 인치투트힐에는 5,000명의 군인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다가 중단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3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가 122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세워 칼레도니아인의 침략을 저지하도록 했고, 20년 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글래스고-에든버러로 이어지는 안토니누스 방벽을 새로 세우고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 사이의 영역을 속주로 삼았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방벽은 완공 후 8년 만에 버려졌고, 칼레도니아인들은 종종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돌파하여 로만 브리튼을 약탈하고 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은 브리튼 부족들을 부추겼다.

이에 세베루스 왕조의 초대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칼레도니아인들을 완전히 복속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서기 208년에 칼레도니아를 침공했다. 세베루스의 원정은 211년까지 이어졌지만, 칼레도니아인들이 정면 대결에 응하지 않고 험준한 산지에 숨어서 게릴라 전술을 썼기에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하다가 도중에 세베루스가 병사하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어느 순간부터 픽트족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칼레도니아 전사들은 로마 정착지를 지속적으로 침공했다. 306년, 픽트족은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돌파해 남쪽으로 침투하면서 가는 곳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1세는 이들을 격퇴한 뒤 타지에서 라인 전선에서 로마군을 차출해 하드리아누스 방벽 수비대를 강화해야 했다. 픽트족은 342년, 360년, 365년에도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돌파해 방벽 남쪽 지역을 황폐화했다.

367년, 픽트족은 아일랜드의 켈트족과 게르마니아색슨족과 연합해 로만 브린튼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로마인들이 야만인의 음모라고 지칭한 이 사건에서, 색슨족은 동쪽에서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를 침공했고, 아일랜드 켈트족은 서쪽에서 바다를 건너 웨일스 지방을 공략했으며, 픽트족은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돌파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여기에 로만 브리튼 내 켈트족 상당수도 픽트족에 가세해 로마인들을 살해했다. 1년 후 대 테오도시우스가 진두지휘하는 로마군이 대대적으로 반격해 침략자들을 격퇴했고, 반란자들은 처형되었으며,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탈환되었다. 로마인들은 369년과 384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쪽 지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4.5. 픽트랜드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파일:Map_Gaels_Brythons_Picts.png
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로만 브리튼)


407년, 황제를 참칭한 콘스탄티누스 3세가 브리타니아에 주둔했던 로마군을 전부 이끌고 갈리아로 진군했다. 이후 로마군은 다시는 브리타니아에 돌아오지 않았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픽트족은 이 기회를 틈타 방벽 남쪽에 거주하는 브리튼인들을 침략했다. 일설에 따르면, 픽트족은 브리튼인을 납치해 아내로 삼는 납치혼을 풍습으로 삼았다고 한다.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족 등 게르만 계열 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해 픽트족에 대항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브리튼을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결국 브리튼인과 게르만계 민족의 전쟁이 벌어졌다. 오랜 전쟁 끝에 패배한 브리튼인은 웨일스콘월, 브르타뉴로 쫓겨나고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앵글로색슨, 데인, 노르만순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앵글로색슨으로 돌아오는 게르만 계보를 이어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잉글랜드 문서 참고.

한편, 픽트족은 일명 '픽트랜드'라고 일컬어지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일부 지역에서 여러 소규모 왕국을 건설했다. 픽트랜드의 초기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후기에는 여러 왕이 별도의 왕국을 통치했으며, 한 왕, 때로는 두 왕이 덜 중요한 이웃을 다소 지배했다고 전해진다. 중세 후기 연대기에는 총 7개의 픽트 왕국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그 왕국들의 명칭과 위치는 아래와 같다.
픽트족은 아일랜드 게일족이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을 장악하면서 건국한 달 리어타(Dál Riata)와 앵글로족이 5세기에 스코틀랜드 동부와 잉글랜드 북동부에 건국한 버니시아(Bernicia)의 강력한 압박에 시달렸고, 나중엔 버니시아와 데이라가 합병하면서 건국한 노섬브리아에게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 그러다가 포트리우의 왕 "브리데이 막 벨리"(브리데이 3세)가 685년 두인 네크타인 전투에서 노섬브리아군을 궤멸시키면서, 픽트족은 노섬브리아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났다.

브리데이 3세가 포트리우와 픽트족의 왕을 칭한 이래로, 포트리우의 왕이 픽트족의 왕을 겸임해 거의 모든 픽트족에 대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픽트족은 종종 아일랜드 전설과 베다 의 기록에 나오는 진술에 근거하여 모계 왕위 계승을 실행했다고 추정된다. 베다가 글을 쓸 당시 픽트족의 왕은 Der Ilei의 아들인 Bridei와 Nechtan이었으며, 그들은 이전 픽트족 왕의 딸인 어머니 Der Ilei를 통해 왕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픽트족의 왕위 계승이 반드시 모계를 통해 이뤄졌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한다.

왕권의 본질은 픽트인 역사의 수세기에 걸쳐 크게 변했다.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선출된 왕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숙련된 전쟁 지도자여야 했으며, 교회와 소규모 가족 구성원들의 지원을 통해 왕권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왕권은 점차 제도화되었고, 계승이 이뤄졌다. 후기엔 왕에 이어 강력한 위세를 갖춘 대귀족인 모르마(Mormaer)가 등장했는데, 이들이 전직 왕, 왕실 관리, 지역 귀족인지, 아니면 이들의 조합인지는 불분명하다.

729년부터 761년까지 통치한 옹구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픽트족은 달 리어타를 복속하는 데 성공했다. 768년 '백색의 아에드'(Áed Find)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아에드 막 에흐다흐(Áed mac Echdach)가 픽트족의 지배에 맞서 봉기해 달 리어타의 독립을 이뤘지만, 달 리어타는 아에드 막 에흐다흐 사후 얼마 안가서 픽트족에 도로 복속되었다. 달 리어타는 이후에도 왕을 배출했지만, 픽트족의 간접 통치를 받아야 했다. 픽트족의 왕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옹구스 2세는 달 리어타의 왕위를 겸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덤바턴에 거주하는 앵글로색슨족에 대해 동일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픽트족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8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의 침략이 개시되면서, 스코틀랜드는 브리튼 섬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큰 혼란을 겪었다. 노섬브리아는 요르빅(Jorvik, 현재 요크 일대) 왕국을 형성한 바이킹에게 복종했으며, 스코틀랜드 남부와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튼인들이 건국한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 왕국도 바이킹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포트리우의 왕 에오간과 달 리어타의 왕 아에드 막 보안타는 839년 동맹을 맺고 바이킹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얼스터 연대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들(바이킹)은 포트리우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에오간 막 옹구사, 브란 막 옹구사, 아에드 막 보안타 및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쓰러졌다."

이 여파로 포트리우 왕가의 혈통이 끊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이 벌어진 끝에 종조부가 픽트족의 왕이었던 알핀 1세이고 어머니는 달 리어타의 왕가 일원이었던 키나드 1세가 픽트와 달 리어타의 왕을 겸임했다. 이후 키나드 1세의 손자 카우산틴 2세가 픽트족의 왕으로 거론된 것을 끝으로, 픽트족이란 용어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이 시기에 픽트족과 게일족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더 이상 두 종족을 구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부터는 '알바 왕국'으로 불리다가 11세기에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변형되었다.

5. 사회

픽트족은 소규모 공동체에 거주하는 농부였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 눈에 보이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고, 돼지는 대량으로 사육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엘리트 계층이 가축의 크기를 놓고 경쟁했는데, 픽트랜드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픽트인의 바위 조각에는 개와 함께 사냥하는 모습이 나와 있지만, 아일랜드인처럼 를 활용해 사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픽트족이 재배하는 작물은 , 보리, 귀리 , 호밀로 구성되었다. 야채에는 케일, 양배추, 양파, 리크 , 완두콩, 순무당근이 포함된다. 야생 양파 , 쐐기풀 , 유채과 식물 같은 식물도 여성이 광야에서 채집했다. 양모는 의류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리넨도 흔했지만, 섬유용인지, 기름용인지, 아니면 식품용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해안과 강을 따라 어류, 조개, 물개, 고래를 사냥했다.

픽트랜드에는 갈리아와 브리튼 남부처럼 중요한 요새 주변에 조밀하게 정착한 큰 마을이나 도시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버그헤드(Burghead) 같은 왕실 요새나 수도원 주변에 소규모 정착지가 있었다. 현대적 의미의 도시는 12세기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등장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진 농촌에서 소박하게 살았다.

픽트족은 로만 브리튼 해안을 따라 해적 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바이킹이 그랬듯이 해적질만 하지 않고 상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을 것이다. 픽트랜드에서 장거리 무역 활동을 했는지는 증거가 부족해서 불분명하지만, 갈리아 무역 선박이 아일랜드 해까지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와 도자기가 발견되었고, 선교사, 여행하는 성직자 및 망명자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교역 상인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걸 볼 때 실제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파일:무사의 브로치.jpg
스코틀랜드 셰틀랜드 남동부의 작은 섬인 무사(Mousa ) 서쪽에 세워진 브로치. 기원전 1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테이 호의 크레노그.jpg
스코틀랜드 테이 호에 재건된 크레노그.

초기 픽트족은 두꺼운 돌담이 둥근 형태로 건설된 브로치(Broch) 양식의 주택에 거주했다. 이 독특한 주택 유형은 오직 스코틀랜드에서만 사용되었다. 이 브로치는 철기 시대 이전에 자주 사용되었지만, 기원전 100년경에 쇠퇴했다. 이후 크래노그(Crannóg)라는 목조 형태의 집이 사용되었다. 크레노그는 호수의 죽마 위에 서있는 플랫폼에 뾰족한 목조 주택이 있는 섬 또는 인공 섬이었다.

갈리아 전기에서는 갈리아인들이 특정 상징이나 색상으로 몸에 그리거나 칠했다는 내용이 줄곧 언급되었고, 픽트족의 이름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문신을 했다고 흔히 묘사되었지만, 이것을 확증할 증거는 부족하다. 픽트족이 세운 석조 기념물에선 뚜렷한 문신이 없는 고위 픽트인, 사냥꾼, 전사, 남성과 여성의 자연주의적인 묘사가 종종 등장한다.

6. 종교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의 픽트족 종교는 켈트 신화와 유사하다고 추정되나, 오늘날엔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에서 인용된, 픽트족이 말, 양, 까마귀, 돼지 등 동물들을 부르는 명칭에서 파생된 지명으로만 전해진다. 픽트족이 자기들이 사는 지명에 동물 이름을 붙인 건 토템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픽트족 지배층이 언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6세기 아일랜드의 수도자인 아이오나의 콜룸바가 픽트족의 왕 브리데이 1세와 접견해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부터 픽트족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콜룸바 이전에도 픽트랜드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베다는 성 니니안(360 ~ 432)이 안토니누스 방벽 너머의 남부 픽트족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픽트랜드의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는 포트마호맥, 센리그모나이드(이후 세인트 앤드류스), 던켈드, 애버네시, 로즈마키가 있었다. 이들 지역은 픽트족 국왕들의 상당한 후원을 받고 왕권 유지에 기여했다.

성인 숭배는 다른 유럽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픽트랜드에서도 중요했다. 주로 사도 안드레아스 같은 널리 알려진 성인들을 공경했지만,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성인들도 숭상되었다. 올드 디어(Old Deer) 수도원 창립자이자 픽트족의 성인인 드로스탄은 초기에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광범위한 추종자를 거느렸지만, 12세기에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컬로스의 서프'는 가나안의 왕과 아라비아 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스코틀랜드로 건너간 뒤 컬로스에서 활동하면서 지팡이로 용을 죽이고 많은 기적을 행하고 교회들을 여럿 설립했다고 한다. 이 인물은 6세기부터 픽트랜드에서 성인으로 공경되었지만 역시 잊혀졌다.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도, 픽트족이 믿었던 고유 종교의 일부 특징은 고스란히 남았다. 일부 픽트인들은 자신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알려진 콜룸바가 얼굴에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무수히 있는 것을 보고 '분쟁과 전쟁의 승리자'로서 숭배했다고 전해진다. 콜룸바가 사망한 뒤 반 세기 후, 콜룸바가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준다는 전승이 픽트랜드 전역에 퍼졌고, 이는 스코틀랜드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는 행운을 불러오기 위해 그의 유물을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스코틀랜드 서부에 거주하는 노르드 게일족은 콜룸바를 특별한 후원자로 여기고 그에게 북유럽 신 오딘이 소유했던 것과 동일한 특성을 부여했다.

7. 예술

파일:힐튼오브캐드볼스톤.jpg
1811년 스코틀랜드 북부 하이랜드 지역의 이스터 로스의 힐튼 오브 캐들볼에서 발굴된 픽트인의 석조 기념물.

픽트 예술은 석조 기념물, 금속 세공품, 돌과 뼈로 만든 작은 물체에서 발견된다. 특히 인버네스에서 라나크셔까지 픽트랜드 전역에 위치한 많은 석조 기념물이 대표적인 픽트 예술품으로 꼽힌다. 브리튼 섬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 이 독특한 석조 기념물에는 다양한 상징과 패턴이 새겨졌다. 상징은 실제 동물, 신화 속의 동물 등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형상과 거울, 빗, 초승달 등 의 사물로 구성된다. 패턴은 꼬임이 있는 곡선으로 구성된다. 석조 기념물에 새겨진 상징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이 상징에 대해 많은 난해한 설명이 제시되었지만, 가장 간단한 설명은 돌을 세운 사람의 이름이나 특정 개인을 기념하는 이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파일:헌터스톤 브로치.jpg
헌터스톤 브로치.

픽트인의 금속 세공품의 흔적은 픽트랜드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전문 기술자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헌터스톤 브로치는 바늘을 천에 밀어 넣은 후 긴 바늘 머리에 있는 구멍을 통해 부착되는 타원형 고리가 달려 있으며, 브로치는 은으로 주조하고, 금, 은, 호박으로 도금하고 동물 형상을 세공으로 장식했다. 중앙에는 부활한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와 황금빛 후광이 있다. 이 브로치는 켈트 예술의 형태와 앵글로색슨 예술의 유산을 각각 담고 있으며, 픽트랜드의 공예 전통이 이웃 국가들보다 뒤처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8. 언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스코틀랜드/언어 문서
2.2.2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들은 픽트어를 사용하였는데 서기 8세기경부터 아일랜드에서 넘어온 게일인들에 의해 픽트어는 소멸하고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대체되었다. 픽트어로 남겨진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데 이 픽트어가 어느 계통인지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진다.

8.1. 켈트어파 가설

현재 정설로서 유물이나 문화, 지명, 인명 등을 고려하였을 때 켈트계로 보는 입장이 우세하다.

다만 인도유럽어족 켈트어파 내에서도 어느 언어군에 속하느냐로 논쟁이 있다. 켈트어파는 크게 대륙켈트어군(Continental Celtic)과 도서켈트어군(Insular Celtic)으로 나뉘는데 대륙켈트어군은 유럽 대륙의 갈리아인들이 사용했던 언어인 갈리아어가 속해 있는 어군으로 현대에는 사멸했다. 도서켈트어군은 크게 게일어군과 브리튼어군으로 나뉘는데,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가 게일어군에 속하고 웨일스어가 브리튼어군에 속한다. 현재로서는 픽트어는 인도유럽어족-켈트어파-도서켈트어군-브리튼어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8.1.1. 반론

하지만 바다 건너에서 와서 정착했다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기원 설화 등에선 자신들을 스키타이인으로 칭하는 등 아일랜드나 영국 본토의 원주민은 아니었다는 시선이 있다. 하지만 역사학과 고고학계에서는 스키타이에 대해서는 허세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대륙 유럽인들은 어차피 스키타이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 알던 시절이고 스키타이와 동류로 보이는 유물과 유적도 없다. 그냥 강해보이려고 유럽 대륙에서 폭력과 힘의 상징이던 스키타이를 갖다 썼다는 설이 많다.

켈트족 자체도 영국의 원주민이 아니라 더 먼저 상륙한 이베리아인(현재의 스페인 땅에서 살다가 건너왔다고 추정하는 고대 종족)이 따로 있고 그 뒤에 켈트족이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 종족을 이베리아켈트(지금의 스페인땅에 살던 켈트족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어서 그들이 일종의 켈트냐 아니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베리아인보다도 더 먼저 상륙한 선주민은 현재의 북아프리카 혹은 중앙아프리카에서 기원했으며 켈트족보다 훨씬 오래 전에 북아프리카에서 바다로 매우 가까운 스페인 해안 쪽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 내 광범위한 지역에 정착했다. 흑인은 아니지만 작은 키에 긴 목과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갈색 피부를 가진 인종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들이 아일랜드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종족인 포모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유럽 이주 후 유럽 원주민인 백인과의 반복적 혼혈로 생물학적 백인의 특성도 섞여있었다고 추정하며 켈트의 일종으로 보아 이베리아켈트라는 용어도 쓴다. 이들의 특성에 대해 남은 증거가 부족한 관계로 학자별 입장이 갈린다.

더불어 이들이 쓰던 픽트어로 게일어와 같은 다른 켈트어파와 이야기하려면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서로의 언어체계가 달랐다고 해서 켈트라 보기 힘들단 설도 강하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켈트족의 일파가 맞다는 주장에 의하면 이들이 쓰는 언어가 켈트어파에 속하는 건 맞으나 그중에서 다른 어군에 속했기에 같은 켈트계 민족들과 통역이 필요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켈트어파스코틀랜드 게일어아일랜드어가 속한 도서 켈트어군과 사멸한 갈리아어가 속한 대륙 켈트어군으로 나뉜다. 그리고 같은 도서 켈트어파로 분류되는 브르타뉴어와 아일랜드어도 서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켈트족은 유럽 종족 중에서 라틴족이나 게르만족, 슬라브족처럼 문명이 생길 때까지 특정 지역에 안정적으로 장기간 모여서 정착했다가 나중에 뿔뿔이 헤어진 형태의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생물학적이기만 한 개념.

8.2. 스키타이어군 가설

기원이 불분명한 점과 모계 사회라는 점 때문에 사실 픽트족의 기원이 동유럽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8.2.1. 반론

물론, 스키타이족중부유럽까지 도달했다는 증거는 있지만 서유럽까지 도달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에 대한 반론이 많다. 게다가 스키타이는 기본적으로 기마유목민족이다. 유목민족이 정착을 한다는 건 보통조건으로 할 수 없는 것인 판에, 하필 농사와 정착이라는 대결단을 내리기 힘들게 기후가 엄청 더러운 브리튼섬, 그것도 스코틀랜드는 유럽을 위협할 정도의 기마유목민족 스키타이가 일부러 손해보려고 배를 타고 건너가서 정착할만한 메리트[5]가 전혀 없는 땅이다. 거기 정착하느니 지중해쪽을 노리든지 다른 유럽 대륙에 정착하는 게 낫다.

그리고 모계 사회부족 사회에서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사실 픽트족이 영국 밖에서 건너온 민족이라는 말도 이들이 켈트족의 일파라는 가설과 결부하여 설명할 수 있다. 본래 켈트족은 오늘날의 독일 일대에서 발원한 이들로[6] 이들이 처음 독일 영역을 벗어난 것이 기원전 6세기경쯤이라고 추정된다. 당연히 로마인들이 오늘날의 잉글랜드 지역을 정복했을 당시에는 픽트족을 포함한 브리튼 제도켈트계 원주민들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시점이니, 이들이 처음 영국에 도달했을 시에는 거의 빈 땅이던 상태에서 처음 정착을 시도한 것이 외지인의 기록에 남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픽트족이 켈트계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할 건 없다.

9. 픽트족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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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통치 기간만 전해지는 군주
브레스 막 부후트 비포이그 카누툴라차마 우라데치 우에클라 가르트나이트 1세
탈로크 막 아키우이르 드레스트 1세 탈로그 1세 네크탄 1세 드레스트 2세
갈란 에릴리흐 드레스트 3세 드레스트 4세 가르트나이트 2세 카일트람
탈로그 2세 드레스트 5세 갈람 켄날라스
초기 통치자들
브리데이 1세 가르트나이트 3세 네크탄 2세 치니오크 가르트나이트 4세
브리데이 2세 탈로그 3세 탈로간 1세 가르트나이트 5세 드레스트 6세
후기 통치자들
브리데이 3세 타란 브리데이 4세 네크탄 3세 드레스트 7세
알핀 1세 네크탄 3세 옹구스 1세 브리데이 5세 키니오드 1세
알핀 2세 탈로간 2세 드레스트 8세 탈로간 3세 코날 막 테이그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 옹구스 2세 드레스트 9세 탈로간 4세 에오간
10년 분쟁
우라드 브리데이 6세 키니오드 2세 브리데이 7세 드레스트 10세
키나드 1세 }}}}}}}}}}}}}}}

9.1. 이름과 통치 기간만 전해지는 군주들

9.2. 초기 통치자들

9.3. 후기 통치자들

9.4. 10년 분쟁


이후 키나드 1세의 손자 카우산틴 2세까지 픽트족의 왕을 칭했지만, 전통적으로 키나드 1세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10. 창작물



[1] 예부터 파란색 천연안료의 재료로 쓰이는, 대청이라고 부르는 유럽쪽풀을 빻은 가루에 과 함께 오줌을 섞어 발효시킨 것으로 출진 전에 몸에 워페인트를 그렸다.[2] 스코틀랜드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가톨릭 성인[3] 영어의 "pict"ure와도 연관이 있다.[4] 원형, 정사각형 또는 타원형 원을 형성하는 융기된 소규모 석재로 구성된 선사 시대 기념물에 대한 총칭[5] 데인족이야 사는 곳이 얼어죽는 생지옥이던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땅이니 영국도 좋다지만, 위도가 거기랑 비슷해서 엄청 춥고 농사 짓기 힘들게 고원까지 많은 스코틀랜드는 심지어 데인족 기준에서도 별로다.[6] 이곳에서 발생한 할슈타트 문화가 이들의 산물이다. 오늘날의 영국의 선주민은 이베리아 반도원주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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