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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ruid드루이드는 고대 영국의 켈트 신앙의 사제이다.
영국의 켈트 신앙에만 존재하는 고유 체계이나, 일부 게임에서 주술과 토착 신앙 등의 관계성으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모습이 대입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브리튼섬에 처음 정착한 이베리아인의 알려지지 않은 애니미즘이 기원이라는 썰도 있지만 스톤헨지를 제외하고는 그럴듯한 증거가 없다.
전국구급으로 유명한 드루이드는 영국의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멀린이다. 보통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후대의 기술이고,[1] 멀린의 행보와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나 지역을 보면 드루이드가 맞다.
2. 드루이드
드루이드라는 직책의 사제를 중심으로 한 드루이디즘 신앙의 형태가 유지되면 정통적인 드루이드이고 그렇지 않으면 드루이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드루이디즘을 제대로 기록하여 전하는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구전의 형태로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대 로마 시기에 일부 자료로 기록되어 이름과 대략적인 구성이 남았고, 당대의 문학 작품에 마법사의 요소로 나온 흔적이 전하는 정도이다.만약 후대의 학자들이 고문서를 연구해, 드루이드들이 스톤헨지를 신성히 여겼다는 사실과 일부 지역에 있는 성소를 지키고 종교적 의식을 대표로서 집행한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이들의 존재는 전설이나 역사 속의 직책명 정도로 분류되었을지도 모른다.
드루이드들의 철학과 방침은 아일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로 흩어진 켈트족 사회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드루이드들은 제각기 다른 신앙과 지침을 내세웠다.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도 소속된 부족이 다르면 다른 신을 섬기는 등 자유분방했으나 기본적인 자연 친화에 대한 부분만큼은 공통점이었다고 한다.
2.1. 본질
제사와 의식의 집행을 담당하는 사제로 전해지지만 그들의 행동을 모아보자면 윤리학자이자 철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에 어울려 살며 자연과 사는 법을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그러니까 유대교의 랍비같이 해당 지역의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자 카운슬러 같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각종 교양과 역사, 정치, 천문, 지리, 약학, 조제, 음악 등등 대부분의 학문에 능해야 했고, 이렇게 배운 학문들을 후대에게도 잘 교육해야 했다. 드루이드들에 대한 로마의 기록에서는 한 사람이 드루이드로서 필요한 과정을 이수하는 데 약 20년이 걸린다고 기록해 두고 있다.
이와 같이 드루이드는 당대의 최고층 지식인이었고, 제 몫을 하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면 족장은 물론 왕에 이르기까지 일단 한 수 접어줘야 하는 막강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왕의 자문가로서도 활동하며 왕족의 교육을 담당했다.
2.2. 섬긴 대상
드루이드가 무엇을 숭배했는지를 두고도 수많은 이견들이 있다.드루이드의 입장에서 제대로 남긴 자료가 없으므로 일부 구전이나 로마의 기록을 토대로 추측할 따름이다. 일단 드루이드들이 어떤 제사와 의식을 담당했음은 분명하지만, 켈트 신화의 족보가 워낙 중구난방이라 어떤 신을 섬겼는지는 불분명하다.
드루이드들의 일부가 땅을 어머니로 섬긴다는 구전이 있고, 켈트 신화의 여러 신을 동시에 섬기는 다신론적인 면모도 보인 데다가 자연 친화적인 기록이 있어, 자연 그 자체를 섬기는 범신론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냥 자기 동네에서 믿는 신격 하나만 따르는 유일신자였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기독교가 아일랜드와 앵글로색슨 7왕국에 들어온 후 일부 교파에서는 인신공양을 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한편 드루이드들이 스톤헨지를 성스럽게 여겼음은 기록으로 남았다. 드루이드들이 스톤헨지를 일종의 거대한 시계로 사용했다는 기록을 남긴 로마의 역사가인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의 '스톤헨지가 19년에 한 번 열리는 의식을 위한 알람 시계 기능을 한다'는 내용 때문이다. 사실 해당 바위 유적지는 켈트족이 섬에 처음 도착하기 훨씬 전인 이베리아인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즉, 드루이드들의 신앙(드루이디즘)은 어느 신을 따른다기보단 어떠한 형태로 숭배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을 수도 있다.
드루이드들의 행동은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개념에 가까워 균형과 영혼의 재생, 불멸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이는 깨달음이라는 개념에 가까워서 드루이드들이 구술로 후진을 양성한 듯하다.
3. 드루이드의 역사
드루이드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밝혀진 자료가 없다. 다만 기원전 청동기 시대쯤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최근 들어서 밝혀진 사실은 스톤헨지가 건설될 때 혹은 건설된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베리아인이 제물로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오늘날 드루이드를 연구하는 이들은 영국에 많다. 특히 영국 웨일즈의 앵글시 섬[2]이나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Iona)섬은 드루이드의 성지이자 양성 시설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들은 브리튼 군도가 단지 드루이드들 최후의 잔존 지역이었을 뿐임을 증명한다. 고대인들이 남긴 드루이드의 성소와 기념물은 거의 유럽 전역에서 발견된다. 특히 브리타니 지방과 프랑스에는 드루이드들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갈리아의 드루이드 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브리튼섬에서 왔다고 믿었다. 또한 아일랜드의 전승에 의하면 고대 아일랜드인들 역시 드루이드 교의 기원을 브리튼섬이라고 믿었다고 하므로, 브리튼 군도는 드루이드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대의 켈트 사회에서 드루이드는 지식과 지혜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재판관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고, 의학적, 약학적 지식 역시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의 기억력과 지식은 로마인들을 질리게 할 정도였으며, 그들의 지위는 왕들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들은 부족장이나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일반인들[3]은 그들을 숭배하고 따랐으며, 로마인들의 점령기에 저항 세력을 지휘했던 중심 세력도 드루이드들이었다. 때문에 로마 제국이 이들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들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은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결과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원정이 진행되었고 앵글시 섬의 드루이드들이 완전히 전멸당하면서, 드루이디즘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로마의 통치 하에서 기독교가 유입될 무렵에도 드루이드들은 아직 로마가 가한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자연히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전파는 매우 빨랐으며 드루이드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앵글로색슨족이 5세기 무렵 로마가 포기한 브리타니아로 들어와 브리튼인들을 웨일스와 콘월, 브르타뉴로 몰아내면서 7세기가 되면 웨일즈와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드루이드교가 자취를 감추었다.
17세기에 '히무스산의 숲'이라 불리는 조직이 드루이드를 표방하며 결성되었다. 1858년 캘리포니아에서도 플레이스빌이라 불리는 미국 최초의 드루이드 조직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들은 드루이드를 포함한 켈트 전통이 단절된 지 천수백여 년이 지난 뒤 남은 드루이드의 '이미지'와 근대 서양 오컬트를 결합시켰을 뿐, 실질적으로는 과거 역사에 있었던 실제 드루이드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실제로 이들 단체는 신이교 종파에서 점차 신이교 사상을 내세운 생활협동조합 비슷하게 변화하였다.
4. 교육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은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흔한 나이는 약 5~6세경이었지만 정해진 나이는 없었다. 재능이 있다고 밝혀지면 좀 늦거나 일러도 그때 당장 교육을 시작했고, 이 교육은 15-20년 정도가 걸렸지만 당연히 개인차가 심했다. 교육은 몸도 마음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힘든 과정이었다. 드루이드가 가진 힘과 지혜의 원천은 '자연'이었고, 자연의 본질은 생존이었기 때문이다.드루이드가 되려는 학생은 여러 명의 선생이 가르쳤고, 주로 드루이드 사회 전체가 지식을 나누었다. 교육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학생들조차 후배들을 가르치곤 했다. 가르침도 드루이드가 갖춰야 할 능력이었고, 이는 실습으로 가장 잘 습득되기 때문이다.
드루이드에게는 특별한 지식의 영역이 없었다. 교육 과정에는 시인이자 역사가인 바드의 교육 과정, 사제이자 예언가, 의사, 약사인 오바테의 교육 과정이 모두 포함됐고, 잡다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온갖 분야의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고 실천하게 했다. 드루이드들에게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우주 전체를 이해하고, 부족이 조언을 구하는 문제라면 그것이 어떤 분야의 문제가 되었건 올바른 해답을 줘야 했다. 따라서 드루이드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지식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온갖 분야에 걸친 다양한 지식들을 모아 들었다. 한마디로,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걸어 다니는 사전'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드루이드에게는 전통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온갖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동시에 실천하고 타인에게 전파할 이중의 의무가 있었다.
교육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완성이 없다는 점이다. 약 20년의 교육을 거치면 드루이드라는 칭호를 부여받기는 했지만, 교육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드루이드는 결코 배움을 멈추어서는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든 교육 과정은 입에서 입으로만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책을 읽고 쓰는 과정보다 난이도가 더 어려운 셈. 이 때문에 지식이 후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덧붙여지거나 빠지는 내용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5. 바드, 오바테, 드루이드
기원전 1세기에 스트라보는 "갈리아인 중에는 특히 존경받는 세 부류가 있었는데, 바드(Bard), 바테(Vate), 드루이드이다. 바드는 시인이자 가수였고, 바테는 점술사이자 과학자였으며, 드루이드는 과학자이면서 윤리학자이기도 했다."라고 기록했다.바드, 오바테 혹은 바테, 드루이드의 관계는 현대인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요소이다. 종종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직업군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어떤 때에는 마치 바드와 오바테가 드루이드의 하위 개념에 속하는 것처럼 설명되기도 하며, 다른 때에는 바드와 오바테가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 거쳐 가야 할 중간 과정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과연 바드, 오바테, 드루이드는 독립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면 드루이드라는 넓은 개념 안에 바드와 오바테가 포함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바드와 오바테는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 거쳐가야 할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세 가지 모두 '그렇다.'이다.
바드, 오바테, 드루이드는 기본적으로는 모두 독립된 직종이다. 스트라보가 기록했듯, 바드는 흔히 말하는 음유시인이었고[4], 바테는 자연과 신들을 연구하고 미래를 점치는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드루이드는 앞서 이야기했듯, 기본적으로 철학자였다.
혼란은 드루이드가 이론적인 철학자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데서 온다. 그들의 역할이 책상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종교,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해당 사회 전반에 걸쳐 요구되었음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철학을 실천하고 그 실천을 전파하는 자로서, 그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의사, 재판관 등등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다. 간단히 말해, 드루이드의 역할 속에는 바로 바드, 즉 시인의 역할과 오바테, 즉 사제의 역할이 함께 녹아든 것이다.
자연히, 드루이드의 교육 과정 역시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과 오바테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했다. 이 중 바드의 교육 과정이 선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기는 했으나, 웨일즈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오바테의 교육 과정을 먼저 수료하게 하는 등, 지역과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과정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지역, 어느 부족이라도 차이가 없었다.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오바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그 위에 드루이드에게만 요구되는 교육을 또 받아야만, 한 사람의 드루이드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는 최소한 20년이 소요되었다고 카이사르는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드루이드를 항상 노인으로 표현하는 오늘날의 고정 관념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이러한 드루이드의 교육 과정이 바드와 오바테를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바드인 동시에 오바테이기도 하고, 또한 그 이상이 되어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드와 오바테가 독립된 직업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스트라보가 기록했듯, 드루이드 못지 않은 존경을 받는 엄연히 다른 직업군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드와 오바테는 드루이드라는 범주 속에 포함되는 하위 개념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드루이드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때에만 이해가 가능하다. 좁은 의미의 드루이드란 앞서 설명한 대로, 바드와 오바테와는 구별되는 '철학자'로서의 드루이드이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를 중심으로 한 해당 계층 전체, 즉 혈통이 아닌 재능과 노력에 의해 사회 전반의 존경을 받게 된 지식인 계급 전체를 드루이드라 부를 수도 있다. 이때의 드루이드는 바드와 오바테, 좁은 의미의 드루이드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드와 오바테, 드루이드는 비록 전문 분야가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된 일 역시 공통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것은 현대인의 혼란을 야기하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비록 드루이드만이 본격적인 철학자였고, 바드는 시인과 역사가의 직책에, 오바테는 사제와 의사의 직책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재생과 균형의 철학을 공유하며 이를 실천하고 전파한다는 면에서 분명 '드루이드'라 부를 수 있었다.
세계의 전통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시인은 노래를 수단으로 한 종교적,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자였고 점술가는 현대의 애널리스트, 혹은 데이터 사이언스 전문가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드루이드가 철학을 근거 있는 과학으로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식에 대한 이해가 모두 높아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고대의 종합적 지식인의 유사한 사례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5.1. 바드
바드는 부족의 전통을 보존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 세상의 신성함을 수호하고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의 첫 단계가 바드이기는 했지만, 바드가 드루이드의 도제일 뿐이라거나 드루이드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바드 안에도 여러 등급이 있었고,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은 그중 아주 낮은 단계에 속했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바드는 오바테나 드루이드와 마찬가지로 존경받았으며, 그들 못지 않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다.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은 무척 길고 힘든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즈의 바드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았으나, 그것이 오랜 시간과 엄청난 노력을 요한다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었다.
아일랜드 바드의 교육 과정을 예로 들자면, 갓 입문한 학생은 1년 동안 올리레, 타반, 그리고 드리사크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바드의 기초 과정을 배웠는데, 올리레는 바드의 원칙을, 타반은 시학을, 드리사크는 풍자를 교육받았다. 또한 문법과 오검 문자를 완벽히 터득하고 스무 개의 이야기를 암기하는 것 역시 요구되었다.
이 과정을 무사히 졸업한 학생은 청동 가지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다음 네 해 동안, 그는 한 해에 각각 열 가지의 이야기, 백 가지의 오검 문자 조합, 열두 가지의 철학적 교훈, 그리고 셀 수 없는 시들을 암기해야 했다. 또한 이 동안 그들은 2중 모음의 조합법과 특권층에 관한 법률, 그리고 문법의 사용법 등도 완벽히 터득해야 했다.
여기까지 요구되는 교육을 모두 마치면 그는 비로소 클리, 즉 '기둥'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클리가 된 학생은 한 해 동안 시 48수와 이야기 20여 가지를 암기해야 했다.
클리의 과정을 졸업한 학생에게는 은 가지가 수여되었다. 그는 안루흐, 즉 '고귀한 흐름'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그로부터 아름다운 말들이 흘러나오고, 부가 그에게 흘러들기 때문이었다. 안루흐의 교육 과정은 모두 3년이었는데, 이 동안 그는 95 가지의 설화와 175 가지 이야기의 레퍼토리를 모두 익혀야 했다. 운율과 시어, 문체, 구성 등 시작에 필요한 모든 것과 여러 가지 시의 형식을 배우는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외에도 신에게 기원하여 예언을 하는 법과, 아일랜드 전역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완전히 터득하는 것 역시 요구되었다.
안루흐의 과정을 마치면 에케스, 즉 학자와 필리, 즉 시인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케스는 모든 시형과 구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고, 필리는 시 100수와 논설 120가지를 암기하고 네 가지 시학을 터득해야 했다. 그러면 350가지 이야기를 모두 터득한 그 학생은 마침내 올라브, 즉 시의 대가가 되어 황금가지를 수여받을 수 있었다.
청동, 은, 그리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각각의 가지들에는 모두 종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강당으로 걸어들어가 시를 낭송(朗誦)을 할 때면, 항상 지팡이에 달린 종이 울리곤 했다. 이 종소리는 청중들에게 조용히 할 것을 고하고, 시나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을 힘을 시인의 내면 세계로부터 소환하는 소리였다.
바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와 영감이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었으며, 영감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 주었다. 그것이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드의 교육 과정을 밟아야만 하는 이유였다. 바드의 웅변술 역시 드루이드에게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역사를 통한 자기 부족의 이해와 영감을 통한 자연의 이해였던 것이다.
세대를 관통하는 힘과 자연에서 샘솟는 힘을 이해하고 다루는 것은 바드의 조건인 동시에 드루이드의 조건이기도 했다.
5.2. 오바테
오바테는 죽음과 부활의 비밀을 이해하며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미래를 예견했고, 조상들과 이야기했으며, 저승으로 여행하여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곤 했다. 바드가 '말의 힘으로 문을 여는' 자였다면, 오바테는 '시간의 문을 여는' 자였다.예언과 예견의 대가인 오바테는 시간을 뛰어넘어 여행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의 켈트 족이 믿었던 시간의 순환론에 기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불교도나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드루이디즘의 신자들은 영혼이 불멸하며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대 켈트 인들에게 조상들의 땅은 단지 사자의 땅이 아니었다. 환생을 기다리는 조상들이 거하는 그곳은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었으며,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지혜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으로 여행한 오바테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조언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시까지 얻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바테는 다른 누구보다도 저승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사자의 축제인 사윈 의식에서 그들의 역할은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바테 역할이 음울한 것은 아니었다. 켈트 인에게 죽음과 재생이 하나였던 것만큼, 오바테는 죽음의 사제인 동시에 곧 삶의 사제이기도 했다. 오바테가 의사이자 약사이기도 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무의 지혜는 오바테의 지혜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죽음과 재생, 희생과 변화, 그리고 시간의 비밀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나무처럼 좋은 스승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무들의 뿌리는 알 수 없는 과거와 무의식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고, 씨앗을 숨기고 있는 열매와 잎새는 미래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따라서 오바테가 약초학에 정통한 약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바테는 몸이나 마음이 자연의 조화에서 벗어나 있을 때 인간이 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약초와 천체의 순환에 힘입어 몸의 병을 고쳤으며, 죽음과 재생에 대한 지혜로써 마음의 병을 고쳤다. 인간은 죽음을 직시해야 하며, 죽음으로써만 인간은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인간은 추구하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오바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 출처: 티르 나 노그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화 정책에 의해 모든 특권 계급은 그대로 남겨두었지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경멸하는 로마인들은 그들을 그다지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점점 로마화되어 가는 갈리아에서는 이후 제정 시대에 드루이드 계급은 퇴출되게 되며 그 때문에 브리타니아, 즉 영국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위대한 마법사요 아서왕의 인도자인 멀린이 신통력으로 돌을 옮겨 스톤헨지를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전설로, 고고학적 발굴 결과 켈트족이 영국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천 년쯤에 스톤헨지가 만들어졌으며 세 번 증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6. 기타
- 웨일즈 록밴드 고르키스 자이고틱 멍키의 리더 유로스 차일드의 아버지가 드루이드 사제라고 한다. 정확히는 드루이드를 위시한 켈트족 전통을 연구하고 이어가려는 자에 가깝겠지만.
- 매체에서 드루이드들은 친환경주의자로 많이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위커맨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 위커맨은 현대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주제여서 단언하기는 이르다.
- 2차 세계 대전 무렵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드루이드교의 신도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영국의 르포 전문 작가인 데이비드 사우스웰의 저서 <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인데, 드루이드들이 하얀 옷을 즐겨 입은 것처럼 처칠도 하얀 옷을 즐겨 입었고, 실제로 1908년 '고대 드루이드교'라는 드루이드교 모임에 가입을 했으며, 롤라이드 스톤스에서 열린 하지점 축제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정설이 아니며, 확인되지 않았기에 아직 확실한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로완 윌리암스 남작은 캔터베리 대주교 승좌를 앞둔 2002년에 명예 드루이드 서품을 받아 웨일스 드루이드 협회인 고세드 컴리(Gorsedd Cymru)[5]의 명예회원이 되었고, 이 때문에 성공회 신자들로부터 "범신론자"라는 비난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고세드 컴리는 종교단체가 아닌 웨일스 자치정부의 지원을 받는 지역문화협회 내지는 친목 단체이고, 웨일스 자치의회 의원들에 크리스천들까지 드루이드로서 가입해 있어서, 이 논란은 얼마 안 가 일단락되었다.
-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비롯한 각종 게임의 영향인지 실제 자연인, 특히 동물이나 식물과 친화적인 사람들을 드루이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령 동물들이 신기할 정도로 잘 따르거나, 식물을 놀라운 수준으로 키워내는 등.
7. 서브컬처에서
서브컬처에서는 던전 앤 드래곤의 드루이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습을 띤다. 대체로 동물이나 자연의 힘을 부리는 마법사 & 사제 & 클레릭 같은 공격과 방해 마법도 쓰고 회복과 강화도 걸어주고 근접 싸움도 가능한 하이브리드 클래스.일반적으로 대게 마법사하면 소서러나 소서리스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해리포터나 디아블로 시리즈를 떠올리면 드루이드가 마법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다. 원하는 동물로 변신하며, 회오리나 폭풍을 일으키고 소환도 부리니까.
또한 마법사나 성직자(클레릭, 프리스트) 직업군과 달리 동양권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켈트 문화 유래의 클래스다보니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다. 어지간한 고유명사들도 한국어로 잘 옮겨놓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나 디아블로 같은 게임에서도 드루이드는 한국어에서 대체할 단어가 없어 단순히 한글로 음차한 표기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나마 비슷한 성향이 있는 집단이라면 도사가 있겠지만.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드루이드의 복식에는 녹색이나 갈색 계통의 배색이 많으며, 특히 여성 드루이드는 비키니 아머의 영향인지 그 의상에서 유독 어깨나 배를 드러내는 식으로 노출이 많다. 의상 구성 또한 아예 나뭇잎이나 나무껍질과 같은 장식 혹은 아예 예의 재료를 엮어서 만들었다는 재질 설정과 묘사가 돋보인다.
7.1. 게임
- 가디언 테일즈 - 칸나
- 그랜드체이스 - 라이언 우드가드[6]
- 녹스 - 소환술사 직업이 드루이드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 다크 소울 3 - 밀우드 기사
- 디아블로 시리즈 - 드루이드(디아블로 시리즈)
-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 드루이드(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 던전앤파이터 - 드루이드 미아(던전 앤 파이터)
- 도타 2 - 고독한 드루이드
- 로그 호라이즌 - 세라라
- 로드 오브 히어로즈 - 이카테스톨
- 리그 오브 레전드 - 우디르
- 리버스: 1999 - 드루비스
- 마비노기 - 타르라크, 베이릭시드, 케이, 멀린, 음유시인 엔
- 바하무트 - 배틀 오브 레전드 - 드루이드, 루키 드루이드, 아크 드루이드 르웬
- 발로란트 - 스카이
- 배틀렐름 - 드루이디스
- 블룬스 TD 6 - 오빈, 드루이드
- 사이퍼즈 - 드루이드 미아
- 소울 나이트 - 드루이드
- 오버워치 시리즈 - 라이프위버
- 워머신&호드 - 서클 오르보로스
- 울티마 3 - 플레이어 클래스로 드루이드를 선택 가능. CRPG에서 드루이드가 등장한 최초의 게임이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드루이드(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제5인격 - 선지자
- 천외마경 풍운 카부키전 - 제아미
-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 히라비아스, 테케후
- Fate 시리즈
- Rewrite - 칸베 코토리
- Dark and Darker - 드루이드(Dark and Darker)
- 클래시 오브 클랜 - 드루이드(클래시 오브 클랜)
7.2. 소설
- 감옥학원에서 나만 힐링할거다 - 니케 모케모케
- 나 혼자 네크로맨서 - 보리스[7]
- 낙인의 플레인워커 - 애쉬 그레이브[8]
- 드루이드입니다 - 신수환
- 렌탈 마법사 - 호나미 타카세 엄블러
- 서울역 드루이드 - 박수호
- 아카데미 플레이어를 죽였다 - 유엘, 둠노릭스 등
- 아카데미에 위장취업당했다 - 벤트민을 비롯한 엘프들의 클래스
- 약먹는 천재마법사 - 이파사등 드루이드들
- 오버로드 - 마레 벨로 피오레, 데켐 호우간, 공포공
- 전지적 1인칭 시점 - 네비다
- 천재 흑마법사 - 셰이머스등 드루이드들.
7.3. 만화
[1] 드루이드가 마법사로 바뀐 것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컸다. 당장 멀린이 등장하는 아서 왕 전설만 보더라도 켈트 계통의 문화에 기독교 문화가 덧씌워진 부분을 여럿 찾을 수 있다.[2] 로마 시대엔 라틴어로 모나(Mona)라고 불렀다.[3] 평민들은 물론, 귀족과 왕족까지 포함.[4] 음유시인이라고 하지만 바드가 가진 그 사회적 지위는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5] '고세드'는 켈트계 단어로써 옥좌라는 뜻이다. 고세드 컴리는 1792년 에드워드 윌리엄스라는 웨일스 시인이 세운 신흥종교단체로 시작해, 이후 고세드라는 이름이 붙는 켈트 문화협회들의 모체가 된다.[6] 사실 게임에서 묘사되는 캐릭터 모습은 도끼를 들면서 자연을 숭배하고 늑대나 다른 동물들로 변신하는 등 아일랜드 드루이드보단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에 더 가깝다. 다만 전투에서 도끼를 사용하는 것은 실제 켈트족들이나 앵글로색슨족도 해당된다.[7] 직업이 '에이션드 드루이드'다.[8] 사령마술과 드루이드의 능력을 가진 네크로드루이드.[9] 설정이 일반적인 마법사보다 드루이드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