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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서기 1215년 ~ 1217년 | |||
장소 | |||
잉글랜드 | |||
원인 | |||
존 왕의 마그나 카르타 조인 거부.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잉글랜드 왕국 | 신성교회군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 ||
지휘관 | |||
존 왕☠ 헨리 3세 리처드 피츠로이 올리버 피츠레지스 윌리엄 마셜 휴버트 드 버그 필립 도비니 윌리엄 롱게스피 윌리엄 2세 드 페러스 팔케스 드 브레오테 라눌프 드 블론드빌 캐싱엄의 윌리엄 앵겔라르 드 시고니 니콜라 드 라 아예 피에르 데 로슈 존 3세 마셜 | 로버트 피츠월터◎ 루이 8세 헨리 드 보훈◎ 길버트 드 클레어◎ 세르 드 퀸시◎ 유스타스 드 베시† 토마 뒤 페르슈† 로베르 1세 드 쿠르트네샹피넬 수도자 외스타슈☠ 알락산더르 2세 | ||
결과 | |||
잉글랜드 앙주 가문의 승리 램버스 조약 체결 마그나 카르타 복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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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빈 전투의 패전으로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지배권이 결정적으로 카페 왕조에게 넘어가자, 존 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들이 일으킨 내전이다. 이때 잉글랜드 귀족들은 프랑스 왕국의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추대했고[1], 이에 응한 루이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면서 앙주 제국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사실 본 문서의 이름인 남작 전쟁은 옳은 표현은 아니다. 남작들만 전쟁에 참가한 것은 아니기 때문. 이는 영어명인 Barons' War를 그대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된 건데 애초에 'Baron'이라는 말은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문맥에 따라서 단순히 하위귀족으로서의 '남작'이 아니라 '(군주의 직속) 봉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여, 남작 외에도 공작이든 백작이든 왕의 봉신을 모두 의미한다. 즉 그냥 귀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제2차 남작 전쟁도 동일하다.[2]2. 배경
1204년, 잉글랜드의 존 왕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맹공으로 노르망디 공국, 렌 백국, 앙주 백국을 상실했다.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자금을 조속히 마련하려 했다. 그는 왕으로 재위한 17년 동안 세금 징수금은 11번 부과했다. 많은 경우 실제 군사 작전이 없는 상황에서 세금 징수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세금 징수금이 실제 군 복무의 대안이라는 원래의 생각과 상치되었다. 존은 영지와 성을 상속받았을 때 구제금 지급을 요구할 권리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때로는 남작의 지급 능력을 넘어서는 엄청난 금액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에 귀족과 자유민 모두 막대한 재산을 강탈당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존 왕이 "탐욕스럽고, 인색하고, 강탈적이며, 돈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또한, 존 왕은 자신에게 도전할 만큼 충분한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들을 깊이 의심했다.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며 충성심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유명한 기사 윌리엄 마셜은 존의 견제와 의심에 시달려야 했으며, 아일랜드에 영지를 소유했던 제4대 브램버 영주 윌리엄 드 브라오스는 40,000마크에 달하는 거액을 지불하라는 왕명을 거부했다가 왕의 군대에 쫓겨 해외로 망명했다가 1211년 사망했고, 아내 모드와 자식 한 명은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그의 손자들은 1218년까지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왕에게 충성하는 영주들 역시 존의 의심과 질투에 시달려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귀족들이 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만무했다.
그러던 1214년 2월, 존 왕은 필리프 2세로부터 노르망디 공국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많은 영주들이 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용병 기사들을 대거 고용해야 했다. 그는 푸아투에 상륙한 뒤 북동쪽으로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동맹 세력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이 윌리엄 롱게스피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한 뒤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전이 잘 먹히면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양분할 수밖에 없으니, 연합군은 적을 성공적으로 협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원정은 초기엔 잘 진행되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의 중앙 집권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위그 9세 드 뤼지냥과 화해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느베르 백작 에르베도 그의 편애 섰다. 그 후 존은 3월에 푸아투를 장악한 뒤 루아르강을 건너 앙주를 침공했다. 필리프 2세는 이를 막기 위해 아들 루이 왕자과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는 소뮈르와 쉬농을 거쳐 아키텐으로 향하는 존의 퇴각로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존 왕은 이를 알게 되자 앙주를 버리고 남쪽으로 재빨리 이동해 4월 3일 리모주에 도착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를 가능한 남쪽으로 유인해, 연합군이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실컷 유린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존 왕을 더 이상 쫓기를 거부하고, 푸아투의 반란 세력이 지닌 영지를 약탈한 후, 샤토루에서 수천 병력을 아들에게 넘긴 뒤 파리로 귀환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방향을 바꿔서 5월에 푸아투로 이동했다. 이후 루아르강을 빠르게 건너 앙주를 재차 침공했고, 루이 왕자의 추격을 교묘하게 따돌려 많은 마을을 접수한 뒤 6월 19일 로슈오무앵 성을 포위했다. 이후 15일간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을 때, 루이 왕자가 기욤 드 로슈와 아이머리 1세 드 크라옹이 이끄는 앙주 징집병들의 지원을 받아 인근으로 진군했다.
존 왕은 이들을 요격하려 했지만, 앙주에서 모집한 귀족과 장병들이 그를 위해 프랑스 왕자와 싸우길 거부했다. 결국 존 왕은 7월 3일에 루아르강을 다시 건너 라 로셀로 후퇴했는데, 그 과정에서 후위대가 루이 왕자의 군대에 요격되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얼마 후, 존 왕은 1214년 7월 27일 부빈 전투에서 오토 4세, 르노 1세, 페랑이 이끄는 연합군이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완패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 후 존 왕은 필리프 2세와 협상한 끝에 앙주를 필리프 2세에게 반환하고 보상금을 지불하며, 6년간 휴전을 맺는 평화 협약을 맺고 1214년 10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존 왕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직후,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에서 귀족들이 왕의 무자비한 통치와 무능을 성토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연합군을 형성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다. 존 왕은 1215년 1월 런던에서 회의를 열어 잠재적 개혁을 논의했고 봄 동안 옥스퍼드에서 그의 대리인과 반군 간의 논의를 후원했다. 그러면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십자군을 이끌 테니 자신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의 서신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인노첸시오 3세의 서한은 1215년 4월에 도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반군 귀족들이 강력한 위세를 구축한 뒤였다. 그들은 5월에 노샘프턴에 집결해 존과의 봉건적 관계를 포기하고 에식스주 리틀던모의 봉건 귀족이자 베이너드 성의 치안관인 로버트 피츠월터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군대"라고 자칭하면서 런던으로 진군해 런던시와 링컨, 엑서터를 접수했다. 이에 존을 따르던 왕당파 귀족들이 대거 이탈했고, 존은 별수 없이 캔터베리 대주교 랭턴에게 반군 귀족들과 평화 회담을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1215년 6월 15일, 존은 윈저성 근처의 러니미드에서 반군 지도자들과 접견했다. 랭턴의 중재 노력으로 제안된 평화 협정을 담은 헌장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이다. 이 헌장은 단순히 귀족들의 특정 불만 사항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농노나 비자유 노동이 아닌 자유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광범위한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다. 헌장은 교회 권리 보호, 불법 투옥으로부터의 보호, 신속한 사법 접근, 귀족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새로운 과세, 봉건적 봉건 지급에 대한 제한을 약속했다. 또한 25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존이 앞으로 헌장을 준수하는지 감시할 것이었다. 또한 런던은 존 왕에게 돌아가고, 반란군은 해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양측은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했다. 반군 귀족들은 귀족 위원회를 강경파로 채우고, 합의한 대로 군대를 해산하거나 런던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존 왕은 이에 대응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도움을 호소하면서, 헌장이 교황청이 존의 주군이 된 1213년 협정에 따른 교황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존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고, 헌장을 "부끄럽고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불법적이고 부당하다"고 선언하고 반군 귀족들을 파문했다.이에 로버트 피츠월터를 비롯한 귀족들은 8월 26일 스테인스에서 존 왕측 인사들과 회의를 열어서 서로간의 입장차를 좁히려 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자, 로버트 피츠월터 등은 반기를 들기로 했다.
3. 경과
로버트 피츠월터는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존 왕의 요청에 따라 자기들을 파문한 것에 동요해 로체스터 성을 존 왕에게 넘기려 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로체스터 성으로 가서, 로체스터 수비대장인 레지널드 드 콘힐의 동의를 얻고 성을 은밀히 점령했다. 당시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반란군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용병을 모집하던 존 왕은 로체스터가 반군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수천 병력을 이끌고 로체스터로 진군했다. 선봉대가 10월 11일에 로체스터 시를 기습 점령했고, 10월 13일 존 왕이 도착한 뒤 로체스터 성채를 포위했다. 그 후 존 왕은 반란군이 집결한 런던에서 구원군이 오는 걸 막기 위해 다리를 허물었다.존 왕은 성 남쪽의 볼리 힐을 본부로 사용한 뒤 성채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반웰 연대기에 따르면, 우수한 공병대가 제작한 투석기 5개가 성벽에 밤낮으로 돌을 퍼부었고, 궁수들이 활과 석궁을 성벽을 향해 쏟아부으며 지원했다. 그 결과 외벽에 큰 구벙을 냈다고 한다. 반면에,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투석기 공격은 효과가 없었고, 존 왕은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곡괭이를 생산해 땅굴을 판 뒤 성벽에 구멍을 냈다고 한다. 반란군은 10월 26일 런던에서 기병대 700명을 파견해 로체스터 성을 도우려 했지만, 존 왕이 중간에서 이들을 요격하려 하자 물러났다.
이후 존 왕이 한 달여간 로체스터 성채를 상대로 맹공을 퍼부은 끝에, 1215년 11월 30일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존 왕은 처음에 수비대가 길고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을 강요했을 때의 전통에 따라 수비대를 전원 처형하려 했다. 이때 투아르 자작이자 몰레옹 영주인 사바리 드 몰레옹이 존에게 반란군이 왕실 수비대에게도 비슷한 대우를 할 거라며 그러지 말라고 설득했다. 존은 그 말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섬겼다가 배신한 석궁수 한 명을 교수형에 처한 것을 뺀 나머지를 포박해 코프 성 등으로 보내져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반웰 연대기 작가는 로체스터 공방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시대는 그렇게 힘들게 압박을 받고 강력하게 저항한 포위 공격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중략) 이후로는 성을 신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로체스터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존 왕은 군대를 분할하여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1개 분견대를 보내 런던 북쪽과 동부 앵글리아를 탈환하도록 했고, 본인은 노팅엄을 거쳐 북쪽으로 향해 북부 남작들의 영지를 공격했다. 두 작전 모두 성공적이었고, 반군 대부분은 런던에서 꼼짝 못 했다. 1216년 1월, 존은 반군과 동맹을 맺은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의 잉글랜드 북부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알락산더르 2세의 영지를 공략하고, 10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를 포위했다.
존 왕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공세로 궁지에 몰린 반란 귀족들은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고 싶으니,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했다. 루이 왕자는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루이 왕자는 즉시 이에 응해 함대를 조성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갈 준비에 착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존 왕은 루이가 이대로 건너가서 반란군에게 필요한 군함과 공성 무기를 가져오면 일이 틀어져 버린다고 여기고, 알락산더르 2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뒤 남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1216년 5월, 루이 왕자는 영국해협으로 출항했다. 존 왕은 그를 막기 위해 해군을 항구에 집결했지만, 불행히도 심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흩어졌다. 그 사이, 루이 왕자는 켄트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 존 왕은 루이 왕자를 즉시 공격할지 고심하다가,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자기 부하들의 충성심이 의심되기도 했기에 루이를 즉시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존은 잉글랜드 서부로 방어를 재편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그동안 그를 따랐던 윌리엄 롱게스피를 포함한 추종자 여럿이 반군에 투항해 버렸다. 그 후 루이 왕자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반란군은 여름이 끝날 무렵에 캔터베리, 로체스터, 런던, 로케이트, 길퍼드, 파넘, 윈체스터, 오디햄 등 잉글랜드 남동부와 북부 일부를 장악했으며, 루이 왕자는 귀족들에 의해 런던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루이 왕자는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바로 도버 성채를 조기에 공략하지 않은 것이었다. 도버는 도버 해협이 위치한 곳으로, 고대부터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을 잇는 관문 격으로 인식되었다.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이어지는 보급 물자가 원할하게 공급되려면 도버 성채를 반드시 장악해야 했다. 그러나 루이 왕자가 미처 도버 성채를 신경쓰지 않은 사이, 켄트 백작이자 존 왕의 수석 대법원장인 휴버트 드 버그가 기사와 무장병으로 구성된 강력한 수비대를 편성해 도버의 수비를 강화했다.
얼마 후, 루이 왕자는 아버지 필리프 2세로부터 도버를 공략하지 않는 것을 질책당하자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도버 공방전에 착수했다. 그러나 3개월간 이어진 공방전에도 휴버트 드 버그가 이끄는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에 직면해 공략에 실패했다. 여기에 캐싱엄의 윌리엄이 이끄는 윌든 궁수대가 켄트주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보급 물자가 대거 탈취되고 병력이 갈수록 줄어들자, 결국 휴버트와 협상한 끝에 10월 14일에 휴전 협약을 맺고 런던으로 철수했다.
한편, 느베르 백작 에르베 4세가 이끄는 또다른 프랑스군은 1216년 7월부터 9월까지 런던 근교의 윈저 성채를 포위 공격했지만, 윈저 수비대장 앵겔라르 드 시고니의 강력한 저항으로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그 사이, 잉글랜드 서부에서 전력을 재정비한 존 왕은 9월에 웨일즈 군인들을 이끌고 코프에서 윈저로 진군했다. 그러나 막상 윈저 성채 인근에 이른 그는 일주일간 적군과 대치하기만 하다가 잉글랜드 동부로 진군하면서 반란군 진영의 영지를 약탈했다. 이후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은 2개로 나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공격군은 존 왕이 물러난 뒤에도 윈저 성을 공격했지만, 캠브리지셔와 에식스에서 존 왕의 군대가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존 왕을 추격했다고 한다. 반면 또 다른 작가들은 느베르 백작이 존 왕이나 앵겔라르에게 매수되어 존 왕이 잉글랜드 동부에 있으니 그를 잡으러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윈저 성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윈저를 구하는 척했다가 방향을 튼 존 왕은 런던을 우회해 케임브리지까지 공격하여 링컨셔와 동앵글리아의 반군 지역을 분리했다.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링컨 성을 포위한 반란군을 격파했고, 뒤이어 린으로 이동해 더 많은 보급품을 대륙으로부터 공급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린에서 이질에 걸려 중태에 빠졌다. 한편, 알락산더르 2세는 다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8월에 칼라일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파고들면서, 잉글랜드 왕국 내 토지의 영주로서 루이 왕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존 왕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동했다가 상당한 보급물자를 잃었다.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존 왕이 워시 강을 건너다가 잉글랜드 왕실 보석을 포함한 왕의 소지품이 거센 물살에 휘말려 사라졌다고 한다. 노팅엄셔의 뉴어크 성에 도착했을 때, 존의 증세가 악화하여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다. 그는 1216년 10월 18일 밤에 사망했다. 그 후 9세의 아들 헨리 3세가 추종자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윌리엄 마셜이 헨리 3세의 보호자로 선언되었다. 이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은 헨리 3세까지 적대하는 걸 망설였다. 그들은 존 왕을 증오했지만, 잉글랜드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어린 아이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까지 적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여겼다.
여기에 윌리엄 마셜이 공정하고 정당한 통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새로운 왕의 이름으로 마그나 카르타의 개정판을 재발행하자, 많은 귀족이 이에 감화되어 헨리 3세 지지로 선회했다. 그러나 루이 왕자는 자신만이 잉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헨리 3세를 타도하려 했다. 마셜은 루이를 잉글랜드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개시하기로 하고, 먼저 레스터셔로 진군해 루이가 손에 넣었던 성들을 공략했다. 그 후 프랑스군과 잉글랜드 반란군이 포위한 링컨 성채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고, 1217년 5월 20일 링컨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고 적장 토마 뒤 페르슈를 사살하고 로버트 피츠월터를 비롯한 반란군 수장들을 대거 생포했다.
한편, 루이 왕자는 도버에 사절을 보내 귀순을 권고했지만, 도버 수비대장 휴버트 드 버그는 헨리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그를 위해 성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여기에 도버 수비대가 루이 왕자와 프랑스 간의 물자 공급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루이 왕자는 도버를 기필코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휴버트는 루이 왕자가 다시 포위할 것을 예상하고 캐싱엄의 윌리엄과 올리버 피츠레지스와 연락해, 프랑스 수송 함대와 합류해 보급을 받기 위해 이동하던 루이 왕자를 루이스 시 인근에서 매복 공격하게 했다. 루이 왕자는 이 매복 공격으로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고 윈첼시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프랑스 함대와 만나면서 기사회생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217년 5월 전력을 재편성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루이 왕자는 도버 성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전에 도버 성 외곽에 진영을 세운 프랑스군 분견대가 캐싱엄의 윌리엄과 올리버 피츠레지스의 급습으로 격파당하자, 루이 왕자는 샌드위치 항에 상륙한 뒤 그곳에서 도버 성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5월 12일 도버 성 포위전을 개시한 루이 왕자는 투석기를 포함한 공성 기계로 성벽을 공격했지만, 휴버트가 이끄는 수비대가 굳건히 버티면서 조기 공략에 실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력 손실이 많아지고 잉글랜드 반란 귀족들이 링컨 전투에서 대거 생포되면서 보급 물자를 지원받기 어려워지자,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머물면서 프랑스 왕실에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루이 왕자의 아내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남편을 돕기 위해 함대와 구호 물자를 실은 수송선을 조직한 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사촌인 로베르 1세 드 쿠르트네샹피넬에게 함대 지휘를 맡겼다. 하지만 로베르는 해군 지휘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수도자 외스타슈를 해군 용병대장으로 고용했다. 1217년 8월 24일, 프랑스 함대가 칼레에서 출항했다. 로베르 드 쿠르테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외스타슈는 부사령관을 맡았다. 기함에는 기사 36명이 탑승했고, 다음 3개 전함에 기사 64~89명이 탑승했으며, 나머지 전함 6척엔 무장병들이 탑승했다. 그리고 수송선 70척이 그 뒤를 따라갔다. 도버 성주 휴버트 드 버그는 이 소식을 사전에 첩보를 통해 파악한 뒤 필립 도비니에게 함대를 맡겨 요격했다. 잉글랜드 측은 전함 16~18척, 소형선 20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존 왕의 사생아인 리처드 피츠로이가 전함 한 척을 지휘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먼저 샌드위치 항을 접수한 뒤, 적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지나갈 때 항구에서 출진했다. 템즈 강 어귀를 향해 긴밀한 대열로 항해하던 프랑스 함대는 처음에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선두에서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선이 프랑스 함대에게 돌진했다가 반격을 받고 방향을 바꿔 물러서자, 로베르는 적이 겁에 질렸다고 간주하고 즉시 추격해 섬멸하려 했다. 외스타슈는 갑자기 항해 방향을 바꿨다간 함대가 뒤엉킬 수 있다며, 항해를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로베르는 이 말을 무시하고 전 함대에 방향을 돌려 적 함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함선들이 지시에 따라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속도를 늦추자, 잉글랜드 함대가 바람의 힘을 받으며 적을 향해 신속하게 돌진했다. 여기에 휴버트 드 버그의 기함이 독립적으로 항해해 프랑스 함대를 후방에서 공격해 수송선 2척을 포획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궁수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적 선원과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며, 항아리에 담아뒀던 석회를 적에게 뿌려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외스타슈는 기함을 이끌고 리처드 피츠로이의 배와 교전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전함들이 하나둘씩 리처드의 배에 합류한 데 비해, 프랑스 함선들은 대열 유지에 신경 쓰느라 기함을 지원하지 못했다.
수 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프랑스 전함 1척과 수송선 64척이 침몰하거나 포획되었고, 나머지는 겨우 탈출했다. 로베르 드 쿠르트네와 프랑스 기사들은 몸값을 위해 포로로 잡혔고, 프랑스 선원과 일반 병사들은 학살당했다. 외스타슈는 기함 구석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온 뒤 몸값으로 10,000 마크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리처드 피츠로이 등 잉글랜드 수뇌부는 그가 본래 존 왕에게 고용되었다가 배신한 걸 규탄하고, 그를 체포한 뒤 참수형에 처했다. 이날 확보한 전리품 상당수는 잉글랜드 선원 및 전투원들에게 돌아갔고, 일부는 샌드위치에 성 바르톨로뮤 병원을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
샌드위치 해전에서 프랑스 수송 함대가 궤멸되고 영국 해협이 잉글랜드 해군에게 장악되면서, 루이 왕자는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더 이상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 봐야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헨리 3세 측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1217년 9월 11일 램버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램버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존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잉글랜드 귀족 전원을 사면한다.
2. 채널 제도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3. 루이 왕자는 10,000마크를 보상받는 대가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잉글랜드를 다시는 침공하지 않는다.
4.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도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대를 철수한다.
2. 채널 제도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3. 루이 왕자는 10,000마크를 보상받는 대가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잉글랜드를 다시는 침공하지 않는다.
4.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도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대를 철수한다.
그 후 루이 왕자는 9월 28일 프랑스로 돌아갔고, 헨리 3세는 잉글랜드의 유일무이한 군주로 등극해 50여 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재위 말기에 마그나 카르타를 따르는 문제를 놓고 귀족들과 첨예한 갈등을 벌인 끝에, 시몽 드 몽포르가 주도하는 제2차 남작 전쟁에 직면했다.
4. 주요 전투
제1차 남작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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