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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2 19:18:31

니콜라 드 라 아예

성명 니콜라 드 라 아예
Nicola de la Haye
생몰년도 미상 ~ 1230년 11월 20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스와턴
아버지 리처드 드 라 아예
어머니 마틸다 드 베논
남편 윌리엄 피츠어네, 제라르 드 캔빌
자녀 리처드 3세 드 캔빌
직위 링컨 성주, 링컨셔 보안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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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링컨 여성 성주이자 링컨셔 여성 보안관. 제1차 남작 전쟁 시기 링컨 전투에서 루이 왕자를 추종하는 잉글랜드 반란군으로부터 링컨 성을 지켰다.

2. 생애

노르망디 공국 코탕탱 반도에 있는 라아예뒤퓌트에 거주하던 노르만 가문 출신이다. <노르망디 연대기>에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한 이들 중 "드 라 하이에의 귀부인"( le sire de la Haye)이 언급되었다. 그녀의 아들 라눌프는 윌리엄 1세의 이복형이자 모르탱 백작 로베르의 세네샬이었다. 라눌프의 아들인 로베르 드 라 아예는 링컨의 성주 콜스와인의 손녀이자 상속녀인 무리엘과 결혼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링컨셔에서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고 링컨 성의 세습 성주이자 링컨셔 보안관을 맡았다. 또한 그는 서식스에 있는 할나커 마을을 장원으로 뒀다. 그의 아들 리처드 드 라 아예는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했고, 윌리엄 드 베논의 딸인 마틸다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세 딸이 태어났는데, 그중 장녀가 니콜라다.

1169년 아버지 리처드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재산과 링컨 성주, 링컨셔 보안관을 물려받았다. 그녀는 두 번 결혼했다. 첫번째 남편 윌리엄 피츠어네와의 사이에서 성명 미상의 딸을 낳았다. 윌리엄 피츠어네가 1185년 이전에 사망한 뒤, 1185년 제라르 드 캔빌과 재혼했다. 그녀는 명목상 링컨 성주와 링컨셔 보안관 직위를 맡았지만, 실제로는 두 남편이 직무를 수행했다.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하자, 니콜라와 제라르는 노르망디 공국의 바르플뢰르로 여행해 새로운 국왕 리처드 1세에게 경의를 표한 뒤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는 헌장을 받았다.

그 후 리처드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고, 잉글랜드의 통치는 엘리 주교이자 대법원장 윌리엄 드 롱챔프에게 맡겨졌다. 1191년, 롱챔프는 제라르를 링컨 성주와 링컨셔 보안관 직에서 해임하고 성을 넘기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이 거부되자, 롱챔프는 군대를 파견해 링컨 성을 강제로 점령하려 했다. 당시 제라르는 노팅엄에서 존 왕자와 함께 했고, 니콜라가 기사 30명, 기병 20명, 보병 300명, 공병 40명으로 구성된 적군이 링컨 성을 포위 공격하는 것에 맞서 한 달간 버텼다. 니콜라의 활약으로 링컨 성 공략에 실패한 롱챔프는 제라르와 타협하여 그를 두 직위에 복귀시켰지만, 그 후 그를 파문했다. 하지만 롱챔프는 얼마 안가 엘리 주교에서 폐위된 뒤 축출되었고, 파문은 자동 취소되었다. 리처드 1세는 1194년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제라르를 두 직위에서 해임했다.

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한 뒤 존 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니콜라와 제라르는 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존 왕은 제라르가 링컨 성주와 링컨셔 보안관으로 다시 인정했다. 그 후 제라르는 1215년 1월에 사망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했고, 니콜라는 남편이 사망한 뒤 단독으로 직책을 맡았다. 1216년 존 왕이 링컨에 찾아왔을 때, 그녀는 성의 열쇠를 손에 쥔 채 찾아와서 왕에게 바치면서, 자신은 이제 매우 나이가 든 과부이니 더 이상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 왕은 자신에게 충실한 그녀가 그 직책을 계속 맡도록 했다. 그 대신, 노팅엄의 보안관 필립 마크를 링컨셔의 공동 보안관으로 세웠다.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한 후인 1217년, 페르슈 백작 토마가 이끄는 루이 왕자의 프랑스군과 잉글랜드 반란군이 포함된 연합군이 링컨에 쳐들어갔다. 그들은 시민들의 호응으로 도시를 장악했지만, 니콜라가 버티는 성을 조기에 공략하지 못했다. 어린 국왕 헨리 3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던 윌리엄 마셜은 링컨을 구하기 위해 출진했고, 1217년 5월 20일 링컨 전투에서 적군을 섬멸하고 페르슈 백작 토마를 사살하고 반란군 지도자들을 대거 생포했다. 이후 반란군을 환영했던 링컨 시민들은 왕실군의 철저한 약탈에 시달렸다.

그 후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의 아들이며 니콜라의 손녀 이도네아의 남편인 윌리엄 2세 롱게스피가 니콜라가 성을 통치하기에는 너무 늙고 무능하다며, 자신이 링컨 성주와 보안관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니콜라는 1226년이 되어서야 링컨 성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링컨셔에 있는 스와턴 영지로 이사했고, 1230년 11월 20일에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