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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8:50:38

샌드위치 해전

제1차 남작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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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 해전
영어: Battle of Sandwich
파일:샌드위치 해전.jpg[1]
시기 1217년 8월 24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샌드위치 앞바다
원인 도버 공방전을 치르는 루이 왕자를 지원하려는 프랑스 함대를 향한 잉글랜드 함대의 역습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 3세 지지 세력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휴버트 드 버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필립 도비니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리처드 피츠로이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로베르 1세 드 쿠르트네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수도자 외스타슈
병력 전함 16 ~ 18척
소형선 20척
전함 10척
수송선 70척
피해 불명 전함 1척과 수송선 64척 손실
기사 36명 전사
결과 헨리 3세 지지 세력의 승리.
영향 램버스 조약 체결과 전쟁 종결.

1. 개요2. 상세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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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17년 8월 24일, 도버 공방전을 수행 중인 루이 왕자를 돕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함대가 샌드위치 앞바다에서 잉글랜드 함대의 급습으로 궤멸된 해전. 제1차 남작 전쟁의 종결을 이끈 해전이다.

2. 상세

1217년 5월,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을 잇는 관문으로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이어지는 보급 물자가 원할하게 공급되려면 반드시 공략해야 할 도버 성 공략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전에 도버 성 외곽에 진영을 세운 프랑스군 분견대가 캐싱엄의 윌리엄과 올리버 피츠레지스의 급습으로 격파당하자, 루이 왕자는 샌드위치 항에 상륙한 뒤 그곳에서 도버 성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5월 12일 도버 성 포위전을 개시한 루이 왕자는 투석기를 포함한 공성 기계로 성벽을 공격했지만, 휴버트 드 버그가 이끄는 수비대가 굳건히 버티면서 조기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병력 손실이 많아진 데다, 링컨 전투에서 자기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했던 잉글랜드 귀족들이 대거 사로잡히면서 그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물자가 간당간당해지자,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머물면서 프랑스 왕실에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루이 왕자의 아내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남편을 돕기 위해 함대와 구호 물자를 실은 수송선을 조직한 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사촌인 로베르 드 쿠르트네에게 함대 지휘를 맡겼다. 하지만 로베르는 해군 지휘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외스타슈를 해군 용병대장으로 고용했다.

외스타슈는 불로뉴 백작 보두앵 부스켓의 막내 아들로, 본래 칼레 인근의 생사메르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해적이 되어 영국해협에서 활동했으며, 1205년 사크 섬을 점령한 뒤 1205년부터 1212년까지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고용되어 함대 30척을 이끌고 프랑스 왕국이 장악한 노르망디 해안을 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1212년에 필리프 2세의 편으로 돌아서서 채널 제도을 접수했으며, 1215년부터 잉글랜드에서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자 존 왕에 대적하는 귀족들을 도왔다. 루이 왕자가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를 빠르게 점령할 수있었던 것도 외스타슈의 도움 덕분이었다.

1217년 8월 24일, 프랑스 함대가 칼레에서 출항했다. 로베르 드 쿠르테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외스타슈는 부사령관을 맡았다. 기함에는 기사 36명이 탑승했고, 다음 3개 전함에 기사 64~89명이 탑승했으며, 나머지 전함 6척엔 무장병들이 탑승했다. 그리고 수송선 70척이 그 뒤를 따라갔다. 도버 성주 휴버트 드 버그는 이 소식을 사전에 첩보를 통해 파악한 뒤 필립 도비니에게 함대를 맡겨 요격했다. 잉글랜드 측은 전함 16~18척, 소형선 20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존 왕의 사생아인 리처드 피츠로이가 전함 한 척을 지휘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먼저 샌드위치 항을 접수한 뒤, 적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지나갈 때 항구에서 출진했다. 템즈 강 어귀를 향해 긴밀한 대열로 항해하던 프랑스 함대는 처음에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선두에서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선이 프랑스 함대에게 돌진했다가 반격을 받고 방향을 바꿔 물러서자, 로베르는 적이 겁에 질렸다고 간주하고 즉시 추격해 섬멸하려 했다. 외스타슈는 갑자기 항해 방향을 바꿨다간 함대가 뒤엉킬 수 있다며, 항해를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로베르는 이 말을 무시하고 전 함대에 방향을 돌려 적 함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함선들이 지시에 따라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속도를 늦추자, 잉글랜드 함대가 바람의 힘을 받으며 적을 향해 신속하게 돌진했다. 여기에 휴버트 드 버그의 기함이 독립적으로 항해해 프랑스 함대를 후방에서 공격해 수송선 2척을 포획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궁수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적 선원과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며, 항아리에 담아뒀던 석회를 적에게 뿌려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외스타슈는 기함을 이끌고 리처드 피츠로이의 배와 교전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전함들이 하나둘씩 리처드의 배에 합류한 데 비해, 프랑스 함선들은 대열 유지에 급급하느라 기함을 지원하지 못했다.

수 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프랑스 전함 1척과 수송선 64척이 침몰하거나 포획되었고, 나머지는 겨우 탈출했다. 로베르 드 쿠르트네와 프랑스 기사들은 몸값을 위해 포로로 잡혔고, 프랑스 선원과 일반 병사들은 학살당했다. 외스타슈는 기함 구석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온 뒤 몸값으로 10,000 마크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리처드 피츠로이 등 잉글랜드 수뇌부는 그가 본래 존 왕에게 고용되었다가 배신한 걸 규탄하고, 그를 체포한 뒤 참수형에 처했다. 이날 확보한 전리품 상당수는 잉글랜드 선원 및 전투원들에게 돌아갔고, 일부는 샌드위치에 성 바르톨로뮤 병원을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

샌드위치 해전에서 프랑스 수송 함대가 궤멸되고 영국 해협이 잉글랜드 해군에게 장악되면서, 루이 왕자는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더 이상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 봐야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헨리 3세 측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1217년 9월 11일 램버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루이 왕자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대신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잉글랜드를 다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루이에게 가담했던 귀족들은 헨리 3세에게 사면받는 대가로 루이 왕자에게 10,000 마크를 지불해 철수를 서두르도록 해야 했다. 루이 왕자는 9월 말에 도버를 떠나 프랑스로 귀환했고, 제1차 남작 전쟁은 막을 내렸다.

3. 기타

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먹는 샌드위치와는 관계없다.[2]


[1] 13세기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의 연대기에 그려진 샌드위치 해전 삽화.[2] 먹는 샌드위치는 18세기에 와서야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