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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0:52

헨리 퍼시(제2대 퍼시 남작)

성명 헨리 퍼시
Henry Percy
생몰년도 1301년 2월 6일 ~ 1352년 2월 26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워크워스 성
아버지 헨리 퍼시
어머니 엘레노어 피츠앨런
아내 이도니아 클리포드
자녀 헨리, 리처드, 로저, 로버트, 토머스, 윌리엄, 엘레노어, 마가렛, 모드, 이사벨
직위 퍼시 남작, 베릭어폰트위드의 무관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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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스코틀랜드 왕국을 상대했다.

2. 생애

1301년 2월 6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에서 제1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와 제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 엘레노어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헨리 퍼시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2세 치세 동안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면서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다수의 토지를 영지로 삼았으며, 노섬벌랜드의 안위크 성을 구입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경계에서 퍼시 가문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에게 연이어 패배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확보했던 영지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이에 불만을 품고,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에르 드 가베스턴을 축출했지만, 나중에 에드워드 2세의 반격으로 제압당하고 영지를 상당수 몰수당했다.

1314년 아버지 헨리 퍼시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고, 1316년 에드워드 2세로부터 노섬벌랜드의 던바 백작 페트릭 4세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1321년 5월 에드워드 2세에 대한 반란을 꾀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주최한 북부 남작 대회에 참석했지만 에드워드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1322년 피커링 성과 스카보로 마을과 성의 총독이 되었고, 나중에 요크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해 3월 26일,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위해 초대 칼라일 백작 앤드루 하클레이의 군대에 소집되었으며, 1323년 아톨 백작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 휘하에 들어가 노섬벌랜드에서 복무했고, 안위크 성의 방어에 대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1323년 4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을 때, 스코틀랜드측 사절인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넘겨진 잉글랜드인 인질 중 한 명이었으며, 1325년 7월에는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을 감시하도록 임명된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324년 요크셔 해안 방위군 사령관을 맡았고, 1325년 노섬벌랜드 해안의 방위군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스킵턴 성주를 역임했다.

1326년 10월, 에드워드 2세의 왕비 프랑스의 이자벨과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가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여기에 동참해 에드워드 2세가 페위되고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 일조했다.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 이후 평생 군 복무 계약을 체결하고, 그 대가로 연간 연금 500마르크를 받았다. 1327년 2월 14일 의회로부터 잉글랜드 북부의 전반적인 방어를 책임지라는 지시를 맡았으며, 4월 23일 스코틀랜드와의 협상을 위한 사절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그 결과, 1328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전쟁을 종식한 노샘프턴 협약이 체결되었다.

1328년 3월 1일, 왕실은 그에게 워크워스 성과 저택을 포함해 노섬벌랜드의 클라버링 영지를 부여했다. 1331년 이자벨과 모티머를 축출한 에드워드 3세의 의회가 이를 무효로 선언하면서, 클라버링 영지를 잃었지만, 에드워드 3세는 1332년 의회의 동의를 얻고 클라버링 가문의 마지막 일원인 존 드 클라버링이 사망하면 퍼시 가문이 클라버링 영지를 상속받도록 했다.

1329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데이비드 2세는 어린 아이였고,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섭정을 맡았다.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면서 그곳의 재산을 잃은 퍼시 등 잉글랜드 귀족과 로버트 1세에 의해 반역자로 간주되어 축출된 브루스 가문 반대 세력은 이 기회를 틈타 스코틀랜드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던 중 이때 스코틀랜드의 전 국왕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이 잉글랜드 궁정으로 피신해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퍼시 등이 발리올을 지원하는 걸 막지 않았다. 1332년 여름, 발리올은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를 옹호하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뒤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스코틀랜드인들의 반란에 직면하자 잉글랜드로 도피했다.

1333년,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그가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퍼시는 100명의 전사 또는 30명의 기사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에 합세했다. 그는 그 대가로 스코틀랜드에서 연간 2,000마르크의 수입을 약속받았다. 7월 29일 잉글랜드군이 베릭어폰트위드를 공략한 후, 그는 로크마벤, 애넌데일, 모팟의 일부 지역을 받았으며, 9월 5일 스털링에서 압수된 재물 중 일부를 받았다. 또한 베릭어폰트위드의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1334년 2월 에든버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해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국왕 즉위식을 지켜봤다.

1334년 여름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인들의 반란으로 또다시 축출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그해 8월 그와 랄프 네빌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물자 수송 감독관에 선임했다. 1335년 1월 레데스데일에서 스코틀랜드군의 공격을 격퇴했고, 에드워드 3세의 1336년과 1337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1338년부터 프랑스와의 전쟁에 전력을 쏟아부으면서 스코틀랜드 전선은 소홀해졌고, 데이비드 2세는 이 틈을 타 1341년 스코틀랜드 왕위를 되찾았다. 한편, 퍼시는 공식적으로 임명되지는 않았지만 북부 잉글랜드 방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337년 10월 아룬델에 쳐들어온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했고, 1338년 초 던바를 포위했지만 던바 백작부인 아그네스 랜돌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공략에 실패했다.

1336년 워크워스 성의 소유자로 인정받았고, 1339년 2월에는 요크의 질서 유지를 위한 위원에 선임되었다. 1340년 4월 28일,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 밖에 머무는 동안 후계자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조언을 제공할 의원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1346년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연이은 요청에 응해 잉글랜드를 침공하자, 그는 그해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랄프 네빌과 함께 스코틀랜드군을 요격해 대승을 거두고 데이비드 2세를 생포했다.

1347년,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발리올은 칼라일에서 첫번째 부대를 이끌었고, 퍼시는 베릭에서 2번째 부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이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산악 지형에 의존해 농성해서 공략이 잘 되지 않는데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스코틀랜드 정복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리올은 스코틀랜드 왕위를 탈환하지 못했다. 그 대신, 잉글랜드 귀족들이 소유했던 스코틀랜드 남부 평야 지대를 대거 확보했다. 1349~1350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고, 1351년에는 노섬벌랜드의 질서 유지를 위한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1349년 9월 13일에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이 유언서에서 자신이 죽은 뒤 자식들이 스코틀랜드 정복을 이어가기를 바라며, 1,000 피렌체 플로린을 물려줄 테니 이를 군자금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1352년 2월 26일 워크워스 성에서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