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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39:36

앤드류 머레이

성명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생몰년도 1298년 ~ 1338년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미상
사망지 스코틀랜드 왕국 오몬드 성
아버지 앤드류 머레이
아내 크리스티나 브루스
자녀 존 머레이, 토머스 머레이
직위 아보크, 페티, 보스웰 영주, 스코틀랜드의 호국경, 기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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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아버지 앤드류 머레이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 맞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던 윌리엄 월레스의 동지로, 1297년 9월 11일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1297년 후반에 사망했다. 그는 유복자로서 1298년 오순절에 출생했다고 전해지나, 출생지는 전해지지 않으며 어머니가 누군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5살 때인 1303년 잉글랜드군에게 붙잡힌 뒤 11년간 잉글랜드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배넉번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포로 교환이 이뤄지면서 1314년 가을에야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1315년 할아버지 앤드류 머레이의 영지였던 아보크, 보함, 페티의 영주권과 삼촌인 윌리엄 머레이의 영지였던 라나크셔의 보스웰의 영지를 계승받고 에어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했다. 1328년 3월 17일 에든버러의 홀리루드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의 평화 협약인 노샘프턴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참여했다.

1329년 6월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어린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고 로버트 1세의 외조카인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랜돌프는 1332년 6월에 갑자기 사망했고, 스코틀랜드 정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워졌던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 때를 틈타 로버트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거나 영지를 잃어버린 여러 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이들은 1332년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섭정인 마르 백작 돔놀 2세를 전사시키고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쳤다. 이후 1332년 9월 24일 스콘에서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머레이는 프랑스로 망명한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하여 에드워드 발리올에 맞설 섭정으로 선임되었지만, 록스버그에 갇힌 스코틀랜드 기사 랠프 골딩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다가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 외에는 누구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했고, 1333년 4월 더럼으로 이송되었다. 1334년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뒤 스코틀랜드에 돌아오자마자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는 알락산더르 드 모브레이와 함께 뷰컨으로 진군하여 던다그 성에서 헨리 드 보몽을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포위했다. 이때 수도관을 절단해 적군이 물 부족에 시달리도록 했고, 결국 견디지 못한 헨리 드 보몽과 수비대는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받는 것을 조건으로 항복했다.

1335년 4월, 머레이는 스코틀랜드 왕실 청지기를 맡은 로버트 스튜어트와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데어시 성에서 소집한 의회에 참석했다. 이후 두 사람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군세에 밀려 항복을 결정하고 1335년 8월 18일 퍼스 조약을 체결했을 때, 그는 제9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와 리데스데일의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에트릭 포레스트와 팬트랜드 둔덕에서 은신해 저항군을 규합했다. 그해 9월, 덤바턴에서 집결한 반란군은 윌리엄 월레스의 전우로서 에드워드 1세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인 그를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으로 추대했다.

1335년 10월, 에드워드 발리올에 의해 북부 스코틀랜드 보안관을 맡은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는 프랑스로 망명한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누이인 크리스티나 브루스가 방어하던 킬드러미 성을 포위했다. 이에 머레이는 자신의 아내이기도 한 크리스티나 브루스를 구하기 위해 킬드러미 성으로 향했다. 1335년 11월 30일, 머레이의 군대는 에버딘셔의 컬블린에서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조우했다.(컬블린 전투) 머레이는 병력을 둘로 나눴고, 윌리엄 더글러스가 선봉을 맡았다. 스트라스보기가 전투 준비를 하자, 윌리엄은 마치 적의 방어 태세에 직면하여 망설이는 듯 멈춰 섰다. 이에 스트라스보기는 적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여기고 진영에서 출진해 단숨에 끝장내려 했다. 이에 윌리엄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면에서 항전했고, 그 사이에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후위대가 적의 노출된 측면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트라스보기는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토머스 코민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후 머레이는 파이프의 쿠파르 성을 공략하고, 뒤이어 로진도르브 성을 포위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3세가 파견한 잉글랜드군이 접근하자 후퇴했다. 에드워드 3세가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한 뒤, 머레이는 던노타 성과 로리스톤 성을 공략했고, 뒤이어 킨카딘과 앵거스 일대를 황폐화했다. 1337년 초, 마르 백작, 파이프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의 지원을 받고 파이프 주를 통과하여 포클랜드 마을을 파괴했으며, 루카르 성을 점령한 뒤 3주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세인트 앤드류스 성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뒤이어 그해 3월에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보스웰 성을 탈환했다.

1337년 중순, 머레이는 군대를 이끌고 칼라일로 진군했고, 이후 에딘버러를 포위했다. 인근에 있던 잉글랜드군이 구원에 나섰지만, 크라이튼 전투에서 머레이에게 격파되었다. 하지만 그는 에딘버러 공방전 도중에 질병을 얻어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337년 베릭 성의 수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1338년 초 아보크 영지에 있는 오몬드 성으로 이동했고, 1338년 사순절에 그곳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로즈마키 예배당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덤퍼린 수도원에 옮겨졌다.

그는 생전에 로버트 1세의 독립 전쟁을 도운 스코틀랜드 영주 크리스토퍼 세튼의 미망인이자 로버트 1세의 자매인 크리스티나 브루스와 결혼해 두 아들 존과 토머스를 낳았다. 존 머레이는 맨티스 백작부인 마거릿 그레이엄과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고, 토머스 머레이는 스트래턴 백작 모리스 드 모라비아의 딸인 조앤 드 모라비아와 결혼했지만 역시 자식을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