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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0:31

헨리 드 보몽

성명 헨리 드 보몽
Henry de Beaumont
생몰년도 1280년 ~ 1340년 3월 10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브리엔
사망지 플란데런 백국
아버지 루이 드 브리엔
어머니 아녜스 드 보몽
형제 장, 루이, 마거릿, 이자벨, 조앤, 마리
아내 앨리스 코민
자녀 존, 엘리자베스, 캐서린, 이사벨라, 아그네스, 조앤
직위 초대 보몽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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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에드워드 2세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전쟁에 참여했으며, 백년전쟁 초기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원정에도 참여했다.

2. 생애

아버지 루이 드 브리엔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자 라틴 제국의 섭정을 맡았던 장 1세와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의 차남으로, 라틴 제국의 적들에 맞서 군사적 지원을 구하기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한 라틴 황제 보두앵 2새의 수행원이었다. 그는 보몽 여자작 아녜스 드 보몽과 결혼해 루이 9세의 동생 샤를 당주의 가신이 되었다. 두 사람은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헨리는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에 유산을 받을 가망이 없었다.

1279년 또는 1280년, 누이 이자벨이 베시 남작이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심복이었던 존 드 베시와 결혼했다. 그 후 그는 형제 루이와 함께 잉글랜드로 건너갔고, 루이는 나중에 더럼의 주교가 되었다. 헨리는 곧 에드워드 1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1297년 왕실의 기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정기적으로 참여했고, 에드워드 1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307년 에드워드 왕자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로 즉위한 후, 헨리는 빠르게 출세했다. 1308년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에 선임되었고, 1309년 3월 4일 보몽 남작이라는 이름으로 의회에 소환되었다. 또한 랭커스터셔에서 수많은 영지를 확보했으며, 1310~1312년 맨 섬의 지배권을 에드워드 2세로부터 물려받았다. 귀족들은 왕이 헨리를 지나치게 밀어준다고 여겨 강한 불만을 품었다. 1309년,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잉글랜드의 개혁을 도입하기 위한 조례 집행 위원회를 세우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위원회는 1310년 3월 17일에 다음 18개월 동안 "법과 상식에 따라 왕국과 왕실을 임명하고 강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311년, 위원회는 국왕에게 헨리와 누이 이자벨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좋은 잉글랜드인"이 요직을 차지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헨리는 1323년까지 왕실에 남았으며, 정기적으로 해외 선교에 활용되었다.

1317년,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에게 체포된 뒤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1322년 왕실군에 가담해 보로브리지 전투에서 토머스를 격파하고 사로잡은 뒤 에드워드 2세를 설득해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한편, 헨리는 1310년경에 애버딘 보안관 알락산더르 코민의 딸이자 제7대 뷰컨 백작 존 코민의 조카인 앨리스 코민과 결혼했다. 그는 이를 통해 로버트 1세에게 몰수된 아내의 스코틀랜드 유산을 요구할 권리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1323년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정을 맺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끝내 협정이 맺어지자, 에드워드 2세에게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그의 속내를 깨닫지 못한 채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의 후견인 중 한 사람으로 그를 선임했으며, 1325년 9월 프랑스 국왕에게 잉글랜드 왕실의 프랑스 내 영지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326년, 그는 프랑스의 이자벨이 남편 에드워드 2세를 폐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이자벨과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에 의해 폐위되고 에드워드 왕자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로 등극한 뒤, 헨리는 레스터셔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1328년 로저 모티머와 이자벨이 노샘프턴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써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종식하자, 헨리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1238~1329년 제3대 레스터 백작 랭커스터의 헨리의 반란에 가담했지만,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1330년 에드워드 3세가 로저 모티머를 처형하고 이자벨을 유폐한 뒤, 헨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이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고 아내의 영지를 되찾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332년 7월 31일, 에드워드 발리올을 지지하는 헨리를 비롯한 잉글랜드 귀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그들은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제8대 마르 백작 돔놀 2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고, 파스에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2세의 지지자들이 곧 반격을 가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은 1332년 12월에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발리올은 왕관을 되찾기 위해 에드워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스코틀랜드 남부 전체를 잉글랜드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1333년 7월 19일,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헨리는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할리든 힐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의 지지자들을 격파했고, 발리올을 다시 스코틀랜드 왕위에 앉혔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뷰컨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모레이 백작과 스코틀랜드 호국경을 역임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지원을 받은 데이비드 2세의 추종자들이 재차 봉기했고, 발리올은 또다시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이때 헨리는 스코틀랜드 호국경을 자처한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던다그 성에서 8월부터 포위되었고, 식량난에 시달린 끝에 1334년 11월에 항복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1335년 여름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로 재차 원정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뛰어들면서 스코틀랜드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아내의 영지를 되찾을 가망이 사라졌다. 헨리는 이후에도 뷰컨 백작으로서 잉글랜드 의회에 1340년까지 소환되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뷰컨 백작령을 장악했기 때문에 명목상의 직위일 뿐 실권은 전혀 없었다. 1338년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백국 원정에 참여했지만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1340년 3월 10일에 그곳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링컨셔의 워터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영지는 장남 존 드 보몽에게 상속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