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 Thomas Beaufort, Duke of Exeter | |
이름 | 토머스 보퍼트 Thomas Beaufort |
출생 | 1377년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공작령 |
사망 | 1426년 12월 27일 (향년 49세) 잉글랜드 왕국 켄트 이스트 그리니치 매너 |
아버지 | 곤트의 존 |
어머니 | 캐서린 스윈포드 |
형제 | 존, 헨리, 조앤 |
아내 | 마거릿 네빌 |
자녀 | 헨리 |
직위 | 도셋 백작, 엑서터 공작, 가터 기사단 기사, 잉글랜드 제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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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이자 장군.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부인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사생아였지만,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하여 친형제들과 함께 적자로 인정받은 뒤 잉글랜드 정계와 군부에서 활약했다.2. 생애
아버지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3번째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 말기와 리처드 2세 치세 초기에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곤트의 존이고, 어머니는 기사 페인 드 로에의 딸이며 존의 기사이자 젠트리인 휴 드 스윈포드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 스윈포드였다. 캐서린이 언제부터 곤트의 존의 정부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휴 드 스윈포드가 사망한 후인 1371년 11월에 처음으로 기록상에서 곤트의 존의 정부로 지목되었다. 그녀는 곤트의 존과의 사이에서 네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토머스 보퍼트는 1377년 1월에 세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자식들은 모두 '보퍼트'라는 성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 전승에 따르면, 랭커스터 가문의 재산에 귀속된 샹파뉴의 보퍼트 성과 연관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토머스 보퍼트는 아버지가 자신의 외도를 비공개로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캐서린 스윈포드가 소유한 링컨셔의 케틀소프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조용히 지냈다. 사생아였기에 아버지로부터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잉글랜드 최강의 권력자인 아버지를 뒀기에 어엿한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1386년 2월 형제 존과 함께 링컨 대성당의 챕터 하우스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곤트의 존의 후계자인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대성당 형제단에 입회하는 걸 지켜봤다.
1394년, 곤트의 존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카스티야의 콘스탄사가 사망했다. 그 후 곤트의 존은 오랜 정부인 캐서린 스윈포드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캐서린의 자식들을 합법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황청과 장기간 협상한 끝에 캐서린과의 결혼을 승인받는 데 성공했다. 결혼식은 1396년 1월 링컨 대성당에서 열렸고, 교황청은 그해 9월에 존과 콘스탄사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자녀를 합법화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리처드 2세는 즉시 합법화 특허를 발행했고, 의회도 1397년 2월에 승인했다. 그해 6월 6일, 토머스 보퍼트는 연간 100마르크에 달하는 연금을 받는 종신 왕실 기사로 임명되었다.
1399년 이복형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를 강제로 퇴위한 뒤 헨리 4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등극했다. 이후 헨리 4세는 보퍼트 가문 인사들을 중용했다. 1400년 3월 24일, 토머스는 더비셔에 있는 애쉬포드의 영지를 부여받았고, 가터 기사단 의 기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형 존 보퍼트와 함께 헨리 4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존 보퍼트는 맨앳암즈 39명, 궁수 160명을 데리고 갔지만, 당시 기사에 불과했던 토머스는 맨앳암즈 5명과 궁수 24명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
1402년 러들로 성주로 선임되었고, 1403년 북부 전선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1405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헨리 퍼시를 위시한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한 왕실군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그해 6월 8일에는 반란에 가담한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와 노퍽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를 처형했다. 1407년 2월 9일, 헨리 4세는 보퍼트 가문의 합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도 그들의 잉글랜드 왕좌를 상속받을 권리가 없다는 전제 조건을 단 규정을 반포했다. 토머스는 같은 해에 칼레의 수비대장에 선임되어 칼레 제독을 맡은 형 존 보퍼트와 함께 칼레를 지켰다.
1408년 또는 1409년 북해와 서해의 제독으로 선임되었다. 1410년 1월 31일, 헨리 4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잉글랜드를 대신 통치한 장남 몬머스의 헨리는 토머스 아룬델 대주교 대신 그를 잉글랜드 총리로 선임했다. 토머스는 이 자격으로 1411년 12월 5일 의회 회의를 주최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회복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결정된 것에 격분해 아들 헨리와 토머스 보퍼트를 꾸짖었다. 결국 토머스 보퍼트는 1412년 1월 5일 총리 직에서 물러났고, 토머스 아룬델 대주교가 다시 총리를 맡았다.
1412년, 토머스는 헨리 4세의 둘째 아들인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지휘 아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그해 7월 5일에는 도셋 백작 칭호를 받았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토머스를 아키텐 보안관이자 잉글랜드 제독으로 선임했다. 1415년 초, 토머스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과 막대한 토지 소유권 주장,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미지급된 몸값 납부 등 여러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에 포함되었다. 프랑스정부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고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토머스는 거부한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보고했다. 헨리 5세느 프랑스의 거부를 명분으로 삼고 백년전쟁을 재개했다. 그해 8월 원정을 단행한 헨리 5세와 함께 동행한 그는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한 뒤 아르플뢰르 시의 수비대장으로 선임되어 1,200명의 군인과 함께 그곳에 머물렀다.
1416년 2월 28일 노르망디 보안관이 되었으며, 그해 3월 11~13일 발몽 전투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지휘하는 대규모 프랑스군의 공세를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요양 생활을 했다. 그해 11월 18일, 그는 엑서터 공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1417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록스버그를 포위한 스코틀랜드군에 대항한 원정에 참여해 포위를 풀었다. 1418년 16,000명의 증원군을 이끌고 노르망디로 돌아와 에브뢰를 공략했지만 이브리를 공략하지는 못했다. 7월 1일 프랑스의 정복한 땅을 측근들에게 나눠준 헨리 5세에 의해 아르쿠르 백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419년 1월 19일까지 지속된 루앙 공방전에 참여했다. 루앙을 공략한후, 헨리 5세는 토머스를 루앙의 수비대장에 선임했다.
1419년 1월 31일 몽티빌리에를 독자적으로 공격해 공략했으며, 뒤이어 페캉, 디에프, 외를 복속시켰다. 그해 4월에는 샤토가야르를 포위했고, 5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9월 23일에 함락했다. 1420년 봄 프랑스와 협상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파리로 파견되었고, 그해 5월 21일 트루아 조약 체결에 공헌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멜룬을 포위해 공략했다. 헨리 5세가 스코틀랜드군의 북부 국경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떠난 후, 토머스는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선임된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와 함께 프랑스에 남았다. 그해 3월 21일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보제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사하면서 흔들리는 군심을 다잡았고, 여름에 프랑스군에 포위된 코나를 구원했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어린 국왕 헨리 6세의 후견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명되었다. 9월 21일 잉글랜드로 돌아와 헨리 5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헨리 5세의 남동생인 랭커스터의 존과 랭커스터의 험프리 등이 이끄는 섭정 위원회에 합류했고, 노스 웨일스의 재판관으로 선임되었다. 1426년 12월 27일 켄트의 켄트 이스트 그리니치 매너에서 사망했고, 서퍽에 있는 버리의 성 에드먼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랭컨셔 혼비 출신 기사 토머스 네빌의 딸인 마가렛 네빌과 결혼해 아들 헨리 보퍼트를 낳았지만, 아들 헨리 보퍼트는 어렸을 때 사망했다. 이후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영지와 재산은 왕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