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플뢰르 공방전 영어: Siege of Harfleur 프랑스어: Siège d'Harfleur | ||
시기 | 1415년 8월 18일 ~ 9월 22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아르플뢰르 | |
원인 |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헨리 5세| ]][[틀:깃발|라울 6세 드 고쿠르 | ]][[틀:깃발| ]][[틀:깃발| ]]
병력 | 2,300 맨앳암즈, 9,000 장궁병 | 400 무장병, 시민 수천 명 |
피해 | 사상자 3,000명, 질병으로 귀국한 병사 5,000명 | 무장병 200명 사상, 상당수의 시민 사망. |
결과 | 잉글랜드군의 아르플뢰르 함락. | |
영향 | 잉글랜드군의 전력 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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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15년 8월 18일 ~ 9월 22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아르플뢰르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배경
1413년 3월 21일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영광의 시대를 재현하겠다는 야망에 불탄 인물이었다. 그는 국내의 불만 세력을 모조리 처단해 귀족들이 왕권에 도전할 생각을 못하게 한 뒤 프랑스 원정을 준비했다. 때마침 프랑스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려서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가 이끄는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이끄는 부르고뉴파가 최고 권력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온 나라가 두 패로 갈라져 대규모 내전이 벌어졌다.1414년 아르마냑파가 파리를 공략하여 기선을 제압한 뒤 부르고뉴로의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헨리 5세의 사절이 파리에 도착했다. 헨리 5세는 1356년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포로가 된 뒤 지불해야 했던 몸값 중에서 현재까지 지불되지 않은 160만 크라운을 즉시 지불하고, 노르망디, 투르네, 앙주, 브르타뉴, 플란데런 백국, 그리고 아키텐의 토지 소유권을 넘겨주고,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게 해준다면 에드워드 3세 대부터 이어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르마냑파 지도자 샤를 1세 달브레는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고, 샤를 5세가 공략한 아키텐 일부를 돌려주고, 카트린과 결혼시키면서 지참금 60만 크라운을 보내는 정도로 끝내려 했다.
1414년 12월, 헨리 5세는 의회를 소집한 뒤 프랑스인들이 사절을 박대하고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우스갯거리로 취급해 자신과 잉글랜드를 모욕했다며, 프랑스에게 빼앗긴 정당한 유산을 되찾기 위해 전쟁 보조세를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해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냈다. 그 후 1415년 4월 19일 대평의회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해 역시 승인받았다. 이후 사우샘프턴에 2,300 맨앳암즈와 9,000 장궁병, 수십 척의 함대를 집결시킨 헨리 5세는 1415년 8월 7일 기함 트리니티 로얄에 탑승한 뒤 출항했다. 목표는 지난날 잉글랜드 해안을 주기적으로 습격한 프랑스 해적들이 근거지로 삼은 아르플뢰르였다. 이리하여 아르플뢰르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415년 8월 17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센 강의 지류인 레자르드 강 하구의 아르플뢰르 해안에 상륙했다. 당시 프랑스 수뇌부는 헨리가 좀더 서쪽인 셰르부르 반도에 상륙할 거라고 오판했기에 그쪽 방면에 제대로 신경쓰지 않아서, 아르플뢰르에 주둔한 수비대는 3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르플뢰르는 26개의 탑과 3개의 요새 성문을 갖췄으며, 2.5마일에 달하는 성벽에 해자를 이중으로 갖춘 강력한 요새였다. 여기에 항구 입구에 날카로운 말뚝을 박고 요새화된 성문 앞에 나무 바비칸을 세웠다. 그래서 헨리는 무력으로 공략하기보다는 외교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도시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프랑스의 정당한 왕으로서 돌아왔으니 즉시 복종하라고 요청했다.시민들은 한 때 수비 병력이 너무 적다고 여겨 항복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프랑스 장군 라울 6세 드 고쿠르가 병사들을 이끌고 들어오면서 수비대 병력이 400명으로 늘어나자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레자르드 강의 수문을 폐쇄해 마을 북쪽 지역을 침수시켰다. 헨리 5세는 외교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공성전을 준비했다. 잉글랜드 본대는 8월 17일 아르플뢰르 서쪽 언덕인 몽 르콩트를 점령하고 숙영지를 건설했고, 8월 18일 클라렌스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가 레자르드 강을 건너 아르플뢰르 동쪽 언덕인 몽 카베르를 점거했다. 또한 잉글랜드 선원들은 소형 보트를 타고 침수 지역을 순찰해 적이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았다.
헨리 5세는 8월 19일 재차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하자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잉글랜드 포병들은 여러 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교대로 복무하면서 성벽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하지만 아르플뢰르 탑에 설치된 포대가 이에 맞서 포격을 가해 상당수의 잉글랜드 병사를 사살했고, 주민들은 낮 동안 적의 포격으로 피해를 입은 성벽을 밤새 복구했다. 잉글랜드 공병들은 성벽 아래에 땅굴을 팠지만, 적군이 이에 맞서 땅굴을 파내어 그들을 공격하여 몰아낸 뒤 잉글랜드인들이 만든 땅굴에 불을 질러 파괴했다. 잉글랜드군이 해자를 메꾸기 위해 나무 토막을 던지자, 수비대는 불을 붙인 기름 통을 그 쪽으로 던져 나무 토막을 불태웠다. 이렇듯 수비대가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잉글랜드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성벽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부시코 원수 장 2세 르 맹그르를 구호군 사령관으로 삼고 1415년 8월 말 프랑스 전역에 소집령을 내렸다. 또한 플란데런과 브르타뉴에서 선원과 선박을 고용했고, 루앙에서 썩어가던 갤리선을 수리했다. 그러나 병력 집결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으면서, 아르플뢰르 구원 작전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는 사이 잉글랜드군 진영에서 이질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몸져누웠지만, 도시 내에서도 이질이 퍼져 많은 이가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보급품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잉글랜드군의 대포 사격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많은 방어 시설이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
9월 15일, 라울 드 고쿠르는 클라렌스 공작에게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요청하면서 10월 6일까지 휴전하자고 제의했다. 클라렌스 공작으로부터 적의 요청을 전해들은 헨리 5세는 9월 18일까지 휴전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협상은 거의 진전이 없었고, 헨리 5세는 9월 17일 아르플뢰르가 다음날 오후 1시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저녁, 수비대는 헨리 5세에게 9월 22일까지 구원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헨리는 수락했다.
이후 12명의 수비대 장교로 구성된 일행이 마을을 떠나 버논에 있던 도팽 루이에게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루이로부터 그들을 도울 방도가 없다는 답변을 듣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기로 했다. 9월 22일, 라울 드 고쿠르는 도시 내 주요 관료 및 장교들과 함께 아르플뢰르 성문 열쇠를 가지고 헨리 5세를 찾아가 넘겨줬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입성했지만, 몇몇 프랑스군은 정문에 있는 탑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결국 제압되었다. 라울 드 고쿠르를 포함한 수비대 생존자 260명은 칼레로 보내져서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억류되었고,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을 사람들은 계속 머무르는 게 허용되었지만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4. 이후
헨리 5세는 한달여간의 공방전 끝에 아르플뢰르를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다수는 이질로 인한 병사자였다. 코트니 주교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도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 또한 약 5,000명은 너무 아파서 프랑스에서 원정을 계속할 수 없어서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이렇듯 피해가 막심했기에, 국왕 평의회는 헨리 5세에게 프랑스 침공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자고 권고했다.하지만 헨리는 이를 거부하고 원정을 이어가기로 했다. 1,200명의 수비대를 아르플뢰르에 배치한 뒤, 900명의 맨앳암스와 5,000명의 장궁병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칼레로 들어가서 군세를 회복하려 했지만, 샤를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솜 강 여울목을 미리 선점하자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적 수비대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후 도하 가능 지점을 극적으로 찾아내어 솜 강을 건넜다.
그러나 10월 24일 칼레로 재차 향하던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에서 최소 14,000명, 최대 25,000명에 달하는 프랑스군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매우 열세한 데다 힘겨운 공성전에 이은 고된 행군으로 인해 장병들이 거의 탈진 상태였던 잉글랜드군으로서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헨리는 결전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1415년 10월 25일,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과 샤를 달브레의 프랑스군이 아쟁쿠르에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