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샤를 1세 달브레 Charles Ier d'Albret | |
출생 | 1368년 12월 | |
프랑스 왕국 알브레 | ||
사망 | 1415년 10월 25일 | |
프랑스 왕국 아쟁쿠르 | ||
아버지 |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 | |
어머니 |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 | |
형제자매 | 루이, 마르그리트 | |
배우자 | 마리 드 쉴리 | |
자녀 | 잔, 샤를 2세, 기욤, 장 | |
직위 | 알브레 영주, 드뢰 백작, 타르타 자작, 드 마랭 자작, 닥스 자작, 드 네라크 영주, 프랑스 무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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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과 맞섰지만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368년 12월 알브레 가문의 영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는 가스코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알브레 가문의 일원으로, 백년전쟁 초기엔 흑태자 에드워드를 지지했지만 1369년 에드워드가 난로세를 강제로 거둬들이는 것에 강한 반감을 품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아키텐 원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뒤 프랑스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은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의 딸이다. 형제로 랑구아르 영주를 역임한 루이와 카프탈 드 부흐, 베누즈 백작, 카스티용 자작 가스티용 1세 드 푸아그레일리의 부인이 된 마르그리트가 있었다.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 궁정에 들어가서 샤를 6세와 함께 자랐으며, 1390년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튀니지를 거점으로 삼고 지중해 각지를 약탈하는 무어인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제노바 공화국의 십자군에 가담했을 때 따라갔다. 1392년 샤를 6세가 브르타뉴 원정에 착수했을 때 동행했다. 그러나 원정은 샤를 6세가 르망 숲을 지나던 중 광기를 드러내면서 중단되었다. 1396년 튜튼 기사단에 들어가 고대 프로이센을 상대로 벌어진 십자군 원정에 가담했다.
140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알브레 영주가 되었으며, 1403년 2월 6일 샤를 6세에 의해 프랑스 무관장이 되었다. 같은 달에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도팽에 세례식에 참석해 아기 왕자의 대부가 되어줬다. 1404년부터 1407년까지 기옌의 잉글랜드군에 대항하는 여러 원정을 이끌었다.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암살된 광경을 파리에서 똑똑히 목격하고, 암살을 주동한 부르고뉴 공장 용맹공 장에게 반감을 품고 아르마냑 편에 섰다. 1411년 부르고뉴 파의 선동으로 무관장 직위를 박탈당했고, 1412년 부르주에서 부르고뉴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1414년 아르마냑파가 부르고뉴파를 물리치고 파리를 접수하는 데 일조했고, 다시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141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부시코 원수' 장 2세 르 맹그르와 함께 출진했지만,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후 비에이-에스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리 드 쉴리(1365 ~ 1409년 12월 14일에서 1410년 1월 20일 사이): 부아벨, 쉴리, 라 샤펠 당길롱, 엑스당기옹, 생공동, 샤토메양, 생트에르민의 영주였던 루이 드 쉴리의 외동딸. 1383년 저명한 기사 기 6세 드라트레무아유와 결혼해 샤를 7세 시기에 정계에서 활약한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를 비롯한 다섯 자녀를 낳았다. 1396년 기 6세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사로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뒤 귀환하던 중 1397년 로도스에서 병사한 뒤, 1401년 샤를 1세 달브레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