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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타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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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따흑따로 진군하는 샤를 7세.jpg
1. 개요2. 상세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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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40년 8월 31일부터 1442년 6월 24일까지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에서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바치던 타르타(Tartas)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상세

타르타(Tartas) 시는 아두르 강의 지류인 미두제 강과 접한 가스코뉴 중부 도시인데 가스코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알브레 가문이 소유한 타르타 자작령의 수도였다. 알브레 가문은 흑태자 에드워드의 가신이었지만 에드워드가 실정을 저지르고 샤를 5세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던 1360년대 후반에 발루아 왕조에 복종했다. 이후 알브레 가문은 잉글랜드를 따르는 가스코뉴 일대를 지속적으로 급습해 많은 피해를 입혔고, 자연히 가스코뉴에서 나는 막대한 수입에 의존하던 잉글랜드 왕실은 이들을 거슬리는 존재로 여겼다.

1440년 8월 2일,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가 지휘하는 맨앳암즈 300명과 장궁병 2,000명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에 상륙했다. 이들의 임무는 프랑스군의 압박으로부터 가스코뉴를 보호하고 샤를 7세를 따르는 프랑스 남서부 도시 및 마을들을 공략하고 약탈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타르타를 첫번째 목표로 삼았고 가스코뉴 지방 의회는 타르타를 6개월간 포위하는 데 들어가는 군사 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토머스 램프스턴이 이끄는 100여 명의 맨앳암즈, 400여 명의 장궁병, 몇 개의 대포도 가세했다.

1440년 8월 31일, 헌딩턴 백작과 램프스턴은 타르타 포위에 착수했다. 알브레 공작 샤를 2세 달브레와 그의 조카인 로마뉴 백작 장은 타르타 인근 잉글랜드 영지, 특히 샬로세와 쿠두레스, 오디뇽, 생콜롬브, 에레스 등지를 약탈함으로써 적의 포위를 약화시키려고 했으나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포위를 굳건히 이어갔다. 하지만 타르타의 방비가 강건했기 때문에 함락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잉글랜드로 소환되었다. 램프스턴은 타르타를 포위한 잉글랜드군 사령관이 되었지만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덧 6개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자 초조함을 느낀 램프스턴은 샤를 2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마침 샤를 2세 역시 포위된 부하들로부터 성의 식량이 바닥나서 기아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심란해져 있었기에 협상에 응했다. 양자는 생세베르에서 협상을 시작했고 1441년 1월 20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2세는 타르타 마을을 어린 아들인 샤를에게 넘기고,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하는 가스코뉴 인사들의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타르타는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인사들과 알브레 가문의 공동 통치를 받는다.

평화 협약은 여기에 더해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양자는 3개월간 휴전을 맺고, 휴전 기한이 끝나는 날 프랑스와 잉글랜드 군주 또는 대리인이 타르타 마을의 소유권을 가리는 재판에 군대를 이끌고 참석해 승부를 보기로 했다. 만약 잉글랜드가 승리한다면, 알브레의 땅은 샤를 2세의 미성년 아들인 샤를에게 주어지고, 샤를 2세와 아들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한다. 만약 이것을 거절한다면, 알브레 가문 영지는 몰수되어 랭커스터 왕조의 직할지로 흡수될 것이었다. 이 특이한 조항은 샤를 7세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사고 싶지 않았던 샤를 2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잉글랜드 측은 이 조항을 넣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당시 샤를 7세는 일드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총력전을 벌이던 중이라 가스코뉴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가스코뉴의 조그마한 도시일 뿐인 타르타에 연연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설령 타르타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 해도, 샤를 7세의 본거지에서 수백 km에 달하는 먼 거리를 행군하는 동안 친 잉글랜드 영주들의 거센 저항과 잉글랜드군의 방어와 역습에 직면해야 하니, 신중한 샤를 7세가 그런 모험을 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상황은 잉글랜드가 예상한 것과는 딴판으로 흘러갔다.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소환된 이래, 잉글랜드 내부의 정쟁이 갈수록 극심해져서 가스코뉴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고, 가스코뉴 당국은 잉글랜드의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재판'에 투입할 병력을 동원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재판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442년 6월 24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는 사이, 퐁투아즈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모조리 몰아낸 샤를 7세는 타르타에 관심을 돌렸다. 조그마한 소도시인 타르타가 잉글랜드에 넘어가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프랑스 남서부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알브레 가문이 잉글랜드로 돌아서는 것은 큰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많은 귀족들이 알브레 가문을 뒤따라 잉글랜드에 귀순함으로써 프랑스 남부에 대한 발루아 왕조의 지배력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1442년 5월, 샤를 7세는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 포병대장 장 뷔로, 외 백작 샤를 다르투아 등을 대동한 12,000 가량의 대군을 이끌고 타르타로 출진했다. 6월 8일 툴루즈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6월 11일 그곳을 떠나면서 2개 부대로 나뉘어 리슈몽이 좌익을, 샤를 7세가 우익 부대를 맡았다. 리슈몽의 군대는 리슬과 그흐나드를 거쳐 잉글랜드군이 주둔한 생세베르를 우회하여 아두르강을 도하했고, 샤를 7세의 군대는 오슈, 비흐, 노가로, 르 호가를 통과했다. 여러 마을이 샤를 7세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샤를은 굳이 이 곳들을 정벌하다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주변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의 규모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주둔지를 지키기만 했다.

1442년 6월 21일 몽드아르상에서 샤를 7세와 리슈몽의 군대가 합류했다. 샤를 7세는 6월 23일 푸아 백작이 소유한 메일한에서 휴식을 취한 뒤 재판 예정일인 6월 24일에 타르타에 도착했다. 잉글랜드군과 가스코뉴 동맹군은 타르타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린 샤를과 샤를의 스승을 맡던 카우나 영주와 오제로 드 생페르는 타르타 성문 열쇠를 리슈몽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타르타를 접수한 샤를 7세는 여세를 이어가 가스코뉴 방면 공세를 개시해 닥스, 콩돔, 마르망드, 생세베르 등지를 공략했다. 다만 가스코뉴의 핵심 도시인 보르도와 바욘 공략에는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12월 8일 라 레울을 공략한 뒤 몽토방으로 철수하여 겨울을 보냈다.

1443년 봄 재차 가스코뉴 전역을 개시한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상당수 영토를 프랑스에 귀속시켰다. 가스코뉴의 친 잉글랜드파 정부는 잉글랜드에 구원을 호소했지만, 심각한 정쟁에 시달리던 잉글랜드는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 대신 샤를 7세에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하는 사절을 보냈고, 샤를 7세는 거듭된 전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 군대를 재편성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1444년 5월 28일, 양국은 샤를 7세의 조카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결혼, 노르망디 바로 남쪽에 있는 프랑스 북부의 메인 일대를 프랑스에 넘기는 내용의 투르 협약을 체결했다.

3. 여담

타르타(Tartas)라는 지명은 프랑스에서 많이 보이는데 구글 지도의 프랑스어 표기법으로 인해 '따흑따'라고 옮겨져 해병문학과 엮이기도 한다.# 다만 프랑스어 원어 발음인 [taʁtas]이 타르타가 아니라 "따흐따 혹은 따흑따"에 훨씬 더 가까운 건 엄연한 사실인데 이는 발음 기호가 아닌 Tartas로 입력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구글 지도의 프랑스어 표기법은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과는 달리 원어의 발음을 최대한 살리는 식으로 갔기 때문에 오히려 이 쪽이 훨씬 정확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로 된소리 + R발음은 흐 또는 자음이 뒤에 올 경우 흑 정도로 표기한다. 당장 프랑스인에게도 타르타라고 말하는 것보단 "따흐따"나 "따흑따"라고 해야 맞다.[1]
[1] 프랑스어는 거센 소리가 아닌 된소리의 성향을 매우 강하게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