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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5 20:02:30

2차 캉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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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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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17년 8월 14일 ~ 9월 20일,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이 센강 남쪽의 노르망디 중심지인 을 공략한 공방전.

2. 상세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헨리 5세는 칼레로 이동했다가 잉글랜드로 귀환한 뒤 노르망디 원정을 대대적으로 준비했다. 1417년 3월부터 사우샘프턴에 집결한 병력은 15,000명의 맨앳암즈 및 장궁병,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고용된 선박들을 포함한 1,500척에 달하는 함대였다. 여기에 포병, 공병, 광부, 갑옷 제작자 및 기타 보조원들까지 합치면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417년 7월 20일, 잉글랜드 함대는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들이 지난날 공성전을 벌여서 공략한 아르플뢰르에 상륙하거나 볼로뉴 인근에 인근에 상륙하리라 예측했지만, 헨리 5세는 센 강의 남쪽 제방에 있는 작은 마을인 뚜끄 마을 인근 해변에 상륙했다. 이후 46명의 새로운 기사를 임명하고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토머스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삼고 앞장서서 각지의 성과 마을들을 공략하고 철저히 약탈하게 했다. 클라렌스 공작은 상륙 3일 만에 여러 마을을 공략하고 수많은 이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하고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여인이 겁탈당했는데, 수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리시유 주교인 토머스 베이신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같이 기술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공포가 밀어닥쳤다. 그 누구도, 거의 누구도 도망하는 것 외에는 안전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도시와 요새에서 대부분의 마을과 요새에서 수비대를 가진 지휘관들이 성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리고 주민들이 제지되지 않았다면, 확실히 몇몇 곳에서 일어났듯이 마을들이 텅 빈 채로 남겨졌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오랜 평화와 질서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잉글랜드인들이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흉포한 짐승들이며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잉글랜드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루앙에서 군대 소집령을 내리고 잉글랜드군의 행보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그의 정적인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파리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관심은 그 쪽으로 향했다. 이로 인해 노르망디인들은 프랑스군의 별다른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잉글랜드군의 침략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캉으로 진격했다.

캉은 노르망디의 문화, 정치, 종교 및 금융 중심지였다. 1345년 7월 26일 에드워드 3세캉을 공략하고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캉을 되찾은 프랑스인들은 도시의 방어를 대폭 강화했다. 총 12개의 문루와 32개의 탑이 있었으며, 성벽이 새로 건축되었고, 언덕 위의 구 시가지를 감싸는 캉 성과 그 밑의 신 시가지를 감싸는 새로운 성벽이 세워졌다. 수비대는 공격자들이 이용가능한 교외 건물들을 철거하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8월 14일 클라렌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선발대가 도착했을 때 생트리니티 수도원과 생테티엔 수도원은 여전히 철거되지 않고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이 수도원들을 곧바로 확보한 뒤 수도원의 두꺼운 벽 뒤에 포대를 설치했다.

그 후 현장에 도착한 헨리는 8월 18일부터 신시가지를 향해 포격을 가하게 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크고 단단한 돌덩이나 가연성 물질로 채워진 철 포탄을 발사하는 중포와 납탄을 소나기처럼 발사하는 경포를 갖추고 있었다. 이 포탄들은 성내 석조 주택들을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치명적인 파편을 사방에 흩뿌려 수비대와 시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수비대는 새로 지어진 성벽 위에 설치된 소형 대포로 반격했지만, 위력이 떨어졌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잉글랜드 공병들은 성벽 아래에 터널을 뚫으려 했지만, 수비대가 성벽에 큰 물 그릇을 올려놓고 잔물결을 통해 터널 공사를 탐지하고 반대편에서 터널을 뚫어 이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시민들은 잉글랜드군이 포격을 중단한 밤마다 돌, 목재 덩어리, 모래주머니로 손상된 성벽을 수리했고, 성벽 뒤에는 참호를 파고 말뚝을 꽂았다. 헨리 5세가 사절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지만, 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헨리 5세는 9월 4일 3번의 미사를 치른 뒤 신시가지를 향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첫번째 공격은 불타는 기름, 생석회 가루, 끊는 물을 퍼붓고 석궁 화살과 투석기를 앞세워 항전한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에드먼드 스프링하우스라는 이름의 기사는 파손된 성벽 틈으로 들어갔다가 그 뒤에 있는 참호에 빠진 뒤 프랑스군에게 붙들린 후 성벽 위로 끌려가 잉글랜드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산채로 불태워졌다. 이후 2번째 공세 역시 격퇴되었지만, 헨리는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 공세를 단행했다. 잉글랜드군은 격전 끝에 파괴된 성벽 틈을 파고 들어서 시내 중심가로 진입했다. 수비대와 시민들은 처절하게 싸웠지만 끝내 제압당했다.

헨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찾을 수 있는 모든 시민을 시장으로 몰아넣은 뒤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최소 2,000명이 학살되었고, 핏물이 거리를 가득 흘러내렸다고 한다. 헨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중 가슴을 빨고 있는 아기를 안고 있는 머리 없는 여인의 시신을 보고 학살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 대신, 병사들이 약탈과 강간을 자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가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손을 쭉 뻗으며 자비를 호소했지만 무시당했다.

언덕 위의 구 시가지와 성채는 좀더 버텼지만 신시가지에서 도망쳐온 피난민들로 인해 곤경을 겪다가 16일 후인 9월 20일에 항복했다. 헨리는 구 성채를 지킨 병사들에게는 말, 무기, 장비, 그리고 각각 2,000에쿠스의 동전을 챙기고 떠나도록 허용했다. 반면 민간인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도시에 남거나 입고 있는 옷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700~2,000명의 시민이 도시를 떠났다고 한다. 이리하여 캉을 공략한 헨리는 잉글랜드인들을 캉으로 이주시키게 한 뒤 아르장탕, 팔래스, 셰르부르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공략했다. 뒤이어 당시 파리에 이은 프랑스의 두번째 도시로 취급되던 루앙 공략에 착수해 장기간의 공방전을 치른 끝에 함락시켰다. 이후 캉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다가 1450년 포미니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에 의해 프랑스의 영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