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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00:22:36

리모주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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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리모주 공방전.jpg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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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70년 9월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에 항복한 리모주를 도로 공략한 뒤 철저하게 파괴한 공방전.

2. 상세

1366년, 엔리케 2세와의 내전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엔리케 2세에게 패배한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가 가스코뉴로 망명한 뒤 바욘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났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1366년 12월 엔리케 2세와 로그로뇨와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1367년 3월 페드로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군해 4월 3일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와 프랑스 장군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격파했다. 게클랭은 사로잡혔고, 엔리케 2세는 프랑스 왕국으로 달아났다. 페드로는 자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고자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70캐럿짜리 붉고 거대한 보석을 선물하니, 이것이 바로 흑태자의 루비이다. 하지만 카스티야인들은 그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에게 많은 영토를 넘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재정이 파탄난 지 오래라서 사전에 보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에드워드와 맺은 약속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실현시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라곤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에드워드는 이베리아 반도에 더 있어봐야 답이 없다고 여기고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며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페드로가 빚을 갚게 할 보증인으로 삼고자 페드로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카스티야에서 병을 얻은 채 귀환한 에드워드는 보르도에 몸져누웠고, 카스티야 원정을 치르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전비를 메꾸기 위해 그가 다스리는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의 세금을 대폭 늘려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1368년 1월 난로세를 강제 징수하기로 한 조치는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에드워드의 심복인 존 헤어웰 주교는 니오르에서 회의를 열어 푸아투, 생통주, 리모주, 루에르그 남작들을 설득해 이 세금을 받아들이게 했지만,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코밍즈, 알브레 영주들은 이에 복종하지 않았다. 여기에 에드워드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존 챈더스는 난로세를 부과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르망디 영지로 은퇴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1369년 1월 25일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에드워드가 파리에 직접 와서 명목상 주군인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프랑스 백성들에게 불법적인 세금을 매긴 것에 대한 재판에 출석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는 "기꺼이 파리로 가겠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에 투구를 쓰고 6만 병사들과 함께 갈 것이다."라고 응수했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에드워드의 건강이 너무 약해져서 말을 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전쟁을 대신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던 에드워드를 대체하지 못했고, 900개 이상의 마을 성, 요새들이 샤를 5세에게 귀순했다.

1370년 봄, 2개의 프랑스 군대가 아키텐을 전격 침공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라 레울과 베르주라크를 거쳐 기옌으로 진격했고, 베리 공작 이 이끄는 군대는 리모주를 향해 진격했다. 두 군대는 앙굴렘에서 합류한 뒤 에드워드를 포위 공격하기로 했다. 에드워드는 이에 맞서기 위해 병상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마차에 의지한 채 코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푸아투 남작, 생통주 남자, 케임브리지 백작, 랭커스터 백작, 펨브로크 백작과 합류했다.

그런데 에드워드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리모주 주교이자 에드워드의 절친한 친구였던 장 드 무라 드 크로스가 프랑스군이 리모주를 포위한 지 사흘만에 항복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이에 격분해 자신과 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그곳을 탈환한 뒤 주민들에게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코냑에서 리모주로 출진했다. 프랑스군은 일찌감치 리모주를 떠난 뒤였고, 리모주에 남겨진 수비대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잉글랜드군은 9월 14일 리모주에 당도하여 포위 공격을 개시했고 9월 19일 잉글랜드 광부들이 도시 외벽을 철거하는 데 성공하자 도시 안으로 쏟아져들어갔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3,000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를 모조리 학살하고 리모주를 초토화했다고 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하고, 실제로는 300명 가량의 민간인과 수비대가 피살되었다고 추정한다. 에드워드는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2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밝히면서도 민간인 사망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리모주가 에드워드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만은 분명하며, 이곳이 재건되려면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에드워드는 리모주를 초토화한 뒤 보르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부재 중에 큰아들인 에드워드가 6살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비탄에 잠겼고, 형제인 곤트의 존에게 가스코뉴와 아키텐의 수비를 맡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1372년 공식적으로 아키텐 왕자로서의 지위를 곤트의 존에게 넘긴 뒤 병마에 시달리다가 1376년 6월 8일에 사망했다. 푸아티에 전투의 영웅이었던 에드워드가 이렇게 사라지자, 잉글랜드 왕국의 프랑스 내의 위세는 갈수록 위축되었고 1380년 무렵엔 에드워드 3세가 백년전쟁을 개시한 이래 공략했던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