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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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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_French_attempt_to_recapture_Calais_from_England_(1350).jpg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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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50년 1월 1일, 조프루아 드 샤르니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칼레를 탈환하기 위해 기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전투.

2. 상세

1347년 9월 28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1348년 7월 7일까지 9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한 '칼레 휴전'을 체결했다. 하지만 중세 흑사병이 창궐하는 등 여러 악재가 닥쳤기 때문에, 양국은 휴전 기한을 계속 연장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1차 칼레 공방전으로 인해 잉글랜드에 빼앗긴 칼레를 어떻게든 되찾으려는 마음을 품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 북동부 사령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였다.

조프루아는 마상창시합에서 맹활약하면서 명성을 쌓고 1342년 모를레 전투에 프랑스군 기사로 참전했다가 생포된 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1344년 튀르크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스미르나 항구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결성된 십자군에 가담하여 용맹을 떨쳤다. 이후 프랑스로 귀환하여 에기용 공방전에 참전했고, 1346년 8월 베쑨느 시에 파견되어 플란데런군이 이 도시를 공략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134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의해 참의원이자 장군으로 선임되어 프랑스 북동부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칼레를 기필코 되찾고 싶었지만, 병력 모집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잉글랜드 약탈자들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프랑스군이 칼레를 무력으로 되찾는 건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 기책으로 칼레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칼레 성문 한 곳의 열쇠를 소지하고 있던 파비아 출신의 랑고르바르드인 용병대장인 아이머리(Aimery)에게 접근했다. 이 사람은 잉글랜드인이 아니며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매일 급료를 받으며 전투를 치르는 용병이기 때문에 잘만 하면 매수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아이머리는 이전에 프랑스 왕실에 고용된 제노바 갤리선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행정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아이머리를 왕의 갤리선 선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그가 이끄는 배에 탑승한 선원들은 줄무늬 천으로 제작된 망토를 특별히 착용했다. 이로 볼 때, 에드워드는 그를 상당히 총애하고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인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프루아는 그에게 막대한 금을 보여주면 넘어갈 거라 확신하고 요원을 비밀리에 보내 2만 에퀴(약 3500파운드)[1]를 제공할 테니 프랑스군이 칼레 시에 진입하도록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아이머리는 흔쾌히 수락했고, 조프루아는 5,000명의 병력을 비밀리에 모아서 칼레 공략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이머리는 에드워드 3세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1349년 12월 말 그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드워드는 12월 30일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근위병을 포함한 900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일반인으로 변장한 채 칼레로 향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월터 매니의 깃발을 빌림으로써 그가 칼레에 온 것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칼레에 도착한 뒤 성 안의 지하실, 금고 등 여러 방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벽을 세우고 병사들을 숨겼으며, 성 도개교의 거대한 들보 중 하나를 부분적으로 절단한 뒤 적병이 성안에 다 들어오면 탑 위에서 돌을 떨어뜨려 그 들보를 깨트려서 성문이 저절로 닫히게 함으로써 적을 성안에 가두기로 했다고 한다.

1350년 1월 1일 밤, 조프루아의 부관인 우다르 드 렌티(Oudart de Renti)가 이끄는 100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2만 에퀴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칼레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아이머리는 그들로부터 금을 수령한 뒤 프랑스인들을 성채로 이끌었다. 잠시 후 숨어있던 잉글랜드군이 튀어나와 그들을 덮쳤고, 우다르와 프랑스 장병 100명은 즉시 항복했다.한편, 조프루아는 칼레 남쪽 문 근처에 주력군을 이끌고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해가 떠오르면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쇠창살이 들어올려진 뒤 성문이 열리자, 잉글랜드 기사와 궁수들이 "에드워드! 성 조지!"를 외치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프루아의 군대 절반은 갑작스러운 급습에 "배신당했다!"라고 외치며 달아났지만, 그는 남은 병력을 모아 적의 돌격을 막아낸 뒤 반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은 압살될 뻔했지만, 북쪽 성문에서 출격한 흑태자 에드워드의 또다른 군대가 프랑스군의 좌측면을 요격하면서 프랑스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2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하고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생포되었다. 생포된 이들 중에는 조프루아 드 샤르니도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조프루아를 포함한 많은 수감자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고 조프루아를 사로잡은 자에게 100 파운드(2021년 기준 70,000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날 저녁, 에드워드는 고위층 포로들을 식사에 초대한 뒤 그들과 즐겁게 식사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조프루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프루아 경! 내가 싸워서 손에 넣은 것, 지금까지 많은 돈을 쏟은 것을 그대가 밤을 틈타 내게서 빼앗으려 했으니 내가 경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그러니 경을 이리 한가하게 만든 것이 몹시 기쁘오. 경은 이곳을 나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그러니까 2만 에퀴로 손에 넣으려고 했소.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경이 실패하고 말았군.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마음이 내키신다면 나의 더 커다란 사업을 도와주실 거요."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기사 유스타스 드 리브몽(Eustace de Ribbemont)의 용기를 칭찬하고 그에게 진주로 장식된 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국왕의 기수인 기 드 브라이언(Guy de Brian)도 전투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연간 200마르크의 연금을 받았다. 아이머리는 적절한 봉사를 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평생 16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잉글랜드 왕과 싸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되었지만, 조프루아는 잉글랜드로 끌려간 뒤 몸값을 전액 지불할 때까지 18개월간 런던에 억류되었다. 1352년 5~7월 긴 공방전을 수행하고 귀환하던 그는 아이머리가 프레툰에 새로운 보루를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시 그곳을 급습하여 순찰대를 몰아내고 아이머리를 체포해 생오메르로 끌고 갔다. 이후 수많은 민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쇠를 달궈서 고문을 가한 뒤 도끼로 쳐 죽였다. 아이머리의 유해는 생 오메르 성문 위에 전시되었다. 그 후 조프루아는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 참전했고, 대다수 프랑스군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군기를 끝까지 사수하며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1] 프랑스의 에퀴 금화는 1337년 처음 주조되었을 때는 약 4/5투르리브르이자 잉글랜드 페니 은화 48개, 즉 1/5스털링파운드 가치였으나 점차 가치가 하락했고 장 왕 치세에는 34페니, 즉 1/7파운드까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