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슈렐 전투 영어: Battle of Cocherel 프랑스어: Bataille de Cochere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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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364년 5월 16일 | |
장소 | 프랑스 노르망디 외르주 코르슈렐 인근 평원 | |
원인 | 부르고뉴를 자기 영역으로 삼으려는 카를로스 2세의 야망 | |
교전국 | 나바라 왕국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장 3세 드 그레일리 | 베르트랑 뒤 게클랭 |
병력 | 1,500명 | 1,200명 |
피해 | 궤멸됨 | 미미함. |
결과 | 프랑스 왕국의 승리. | |
영향 | 부르고뉴를 장악하려는 카를로스 2세의 계획 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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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64년 5월 16일, 부르고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으려는 카를로스 2세가 잉글랜드 용병대와 힘을 합쳐 공세에 나섰으나 프랑스 사령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참패한 전투.2. 배경
카를로스 2세는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와 피크라디 및 메인 일부 지역의 영주였다. 그는 어머니 호아나 2세가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 밀려 프랑스 여왕이 되지 못한 것에 깊은 한을 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을 이용해 자신이 프랑스 왕으로 등극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음모를 꾸몄다.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사로잡히면서 프랑스가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에티엔 마르셀과 손잡고 파리에서 거병하라고 부추겼다. 그 결과 에티엔 마르셀이 한때 파리를 장악하고 왕위 후계자 샤를을 사실상 포로로 삼으면서 음모가 성공하는 듯했다.그러나 즉시 파리로 와달라는 마르셀의 청에 따라 파리로 향하던 그가 도중에 병에 걸려 지체되는 사이 샤를이 극적으로 파리를 탈출한 뒤 동쪽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반격하면서 일이 꼬였다. 양자간의 전쟁은 결판이 쉽게 나지 않았고, 파리 주변의 영토는 카를로스가 파견한 노르망디군과 샤를 왕자가 보낸 선봉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그러던 1358년 5월 그동안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프랑스 북동부의 농민들이 자크리의 난을 일으켰다. 에티엔 마르셀은 자크리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프랑스 북부 기사들은 카를로스에게 자크리 토벌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카를로스는 귀족들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고 1358년 6월 10일 멜루 전투에서 자크리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파리로 들어와서 민중을 소집한 뒤 자신을 "파리의 대장"으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자크리와 손잡았던 에티엔 마르셀을 토벌하지 않고 손잡는 것에 반감을 품고 샤를 왕자 쪽으로 등을 돌렸다.
이후 샤를 왕자가 귀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파리로 진군했다. 이때 파리 시내에서 반 잉글랜드 감정을 품은 주민들이 대거 봉기해 에티엔 마르셀을 포함한 친 잉글랜드, 친 나바라 성향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카를로스는 파리 외곽의 생드니 수도원에 숨었다가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를 침공해 샤를 왕자를 격파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르망디, 피카르디, 샹파뉴, 브리의 영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둔 터라 그를 프랑스를 좌지우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여겼다. 1359년 3월 24일,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는 런던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장 2세는 인질들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환한 뒤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카를로스가 소유한 프랑스 영지를 포함한 많은 영토를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삼부회는 협약 내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샤를 왕자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직접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카를로스는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맹공격으로 인해 노르망디 영지가 피폐해진 데다 잉글랜드군이 또다시 노르망디에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까지 들어오자 샤를 왕자와 화해하기로 했다. 양자는 오랜 협상 끝에 1359년 8월 19일 퐁투아즈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더 이상 영토와 돈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했고, 샤를 왕자는 그가 그동안 프랑스에 해악을 끼친 행위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59~1360년에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카를로스와 샤를 왕자가 전투에 전혀 응하지 않고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어 많은 병사가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샤를 왕자가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가 맺은 협약을 받아들일 테니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카를로스는 칼레에 도착한 장 2세와 만나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고 추종자 300명과 함께 사면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재차 맺었고, 프랑스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잉글랜드-나바라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국왕이 되려는 꿈을 일단 접었지만, 카를로스의 야심은 곧 다른 쪽으로 향했다. 이 무렵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카를로스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마르그리트[2]의 손자인 점을 이용해 자신이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베르 2세의 둘째 딸 잔의 아들인 장 2세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카를로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61년 11월 나바라 왕국으로 가서 그곳의 장정들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했다.
1362년 5월 추종자들을 부추겨 노르망디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했으나 실패하자 1363년 나바라 해군을 노르망디로 파견해 그곳을 장악하고 나바라 육군을 형제 루이에게 맡겨 가스코뉴인들과 힘을 합쳐 부르고뉴를 공략하게 했다. 1364년 1월, 카를로스는 아헨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나 잉글랜드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아키텐 공국에 나바라 왕국군이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고, 샤를 왕자는 카를로스를 응징하기 위해 노르망디를 공격할 병력을 모집했다.
1364년 3월, 가스코뉴 귀족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나바라 왕국-가스코뉴 연합군을 이끌고 나바르에서 아키텐을 거쳐 북부 프랑스로 행진했다. 한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 1,200명은 노르망디의 롤부아즈를 공격해 4월에 함락시키고 뒤이어 망트, 베르누이, 묄렁을 잇따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 3세는 카를로스에게 복종하는 도시들이 더 이상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게클랭을 격파하기로 하고, 노르망디 서부의 수비대, 메인,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용병대 등을 규합해 총 1,500명을 규합한 후 게클랭에게 접근했다. 이리하여 코르슈렐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364년 5월 14일, 에브뢰에서 출발한 장 3세의 군대는 망트를 향해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외르 강변 고지에 도착했을 때 외르 강 다리 앞 언덕에 게클랭의 프랑스군이 주둔한 것을 확인했다. 두 군대는 이틀간 두 언덕 위에서 대치했다. 그러던 5월 16일 프랑스군 일부가 다리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자, 잉글랜드 용병대장 존 주엘이 장 3세에게 게클랭이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 부담을 느끼고 안전한 곳으로 철수하려 하는 게 분명하니 즉시 추격해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3세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저들은 우리를 언덕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저리 나오는 것뿐일세."
그러나 존 주엘은 상관의 말을 듣지 않고 병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따르도록 하라! 나는 전장에 뛰어들겠다!"
이후 적을 향해 달려들자, 장병들은 "성 조지!"를 외치며 뒤따랐다. 그 광경을 본 장 3세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도 빨리 언덕을 내려가자. 존 주엘 경은 나 없이는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장 3세는 일부 기병대를 다리 쪽으로 보내 적의 퇴로를 차단하게 한 뒤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나바라-노르망디-잉글랜드 연합군이 언덕에서 평원으로 내려오자, 게클랭은 적이 위장 후퇴에 속은 것에 기뻐하며 외쳤다.
"우리가 오늘 내내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졌다!"
프랑스군은 게클랭의 지시에 따라 돌아서서 자신들을 쫓아오는 적과 맞붙었다. 이후 반나절 동안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쉽사리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이때 게클랭은 브르타뉴 출신 기병 예비대에게 적 측면을 돌아서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이 명령대로 따르자, 나바라-노르망디-잉글랜드 연합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무너졌다. 프랑스군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적을 밤늦게까지 추격해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장 3세는 30명의 부하들과 함께 도끼를 휘저으며 분전했으나 끝내 사로잡혔고, 존 주엘은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오직 로버트 스콧이 이끄는 잉글랜드 용병대 일부만 온전히 후퇴할 수 있었다.
4. 이후
샤를 왕자는 게클랭의 승리 소식을 전해들은 다음날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로 즉위했다. 즉위 후 내린 첫번째 조치는 부르고뉴 공국의 차기 공작으로 동생 필리프 2세가 선임되는 것을 기정사실화한 것이었다. 이에 카를로스는 로드리고 데 우라즈가 이끄는 나바라군을 추가로 끌어들이고 노르망디 전역에서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한편 카를로스의 동생 루이는 아키텐 공국을 지나 가스코뉴군과 합세한 후 9월 23일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러다가 코르슈렐 전투 소식을 전해듣고 부르고뉴 침공을 포기하고 코탕탱 반도를 탈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그러나 루이는 부하들이 프랑스 마을들을 심하게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카를로스에게 등을 돌렸다. 여기에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국경지대인 앙스 마을을 초토화한 루이의 부하 세갱 드 바드폴을 파문하는 등 교회마저 등을 돌리자, 카를로스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샤를 5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365년 5월, 카를로스와 샤를 5세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정복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추종자들의 사면을 받아냈으며, 처형된 나바라인들의 유해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포로들이 몸값없이 상호 석방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확보한 영토는 하나같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익이 없었으며, 부르고뉴 공작위에 대한 요구는 교황의 중재에 회부되기로 했지만 교황청이 이에 대해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카를로스는 이후에도 잉글랜드와 손잡고 샤를 5세를 도모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프랑스 왕국은 샤를 5세와 게클랭의 활약으로 백년전쟁의 승기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