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1:31:22

푸앙세 공방전


백년전쟁의 전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킹혼 전투 더플린 무어 전투 아난 전투 할리돈 힐 전투 컬블린 전투
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던바 공방전 네빌스 크로스 전투 네스빗 무어 전투 베릭 공방전
번트 캔들마스
제1기
카잔트 전투 아르네뮤이덴 해전 영국 해협 전역 캉브레 공방전 슬로이스 해전
생오메르 전투 투르네 공방전 베르주라크 전투 오베르슈 전투 에기용 공방전
1차 캉 공방전 블랑슈타크 전투 크레시 전투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 1차 칼레 공방전
루나롱주 전투 칼레 전투 윈첼시 해전 생장당젤리 공방전 아르드르 전투
긴 공방전 흑태자의 슈보시 브레퇴유 공방전 푸아티에 전투 자크리의 난
샤르트르 공방전
브르타뉴 내전
샹토소 전투 엔봉 공방전 반 공방전 브레스트 해전 모를레 전투
생폴드레옹 전투 라 로슈데리앙 전투 30인의 결투 모롱 전투 렌 공방전
오레 전투
제2기
브리네 전투 코르슈렐 전투 나헤라 전투 몬티엘 전투 리모주 공방전
퐁발랭 전투 라 로셸 해전 시세 전투 곤트의 존의 슈보시 와트 타일러의 난
루즈베케 전투 이프르 공방전 브레스트 공방전 마게이트 해전 오터번 전투
포르투갈 공위기
아톨레이로스 전투 리스본 공방전 알주바호타 전투 발베르데 전투
글린두르의 난
마이니드 헤드겐 전투 브린 글라스 전투 슈루즈버리 전투 스톨링 다운 전투 푸울 멜린 전투
제3기
아르플뢰르 공방전 아쟁쿠르 전투 발몽 전투 셰프드코 해전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보제 전투 모 공방전 크라방 전투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생잠 요새 공방전 몽타르지 공방전 오를레앙 공방전 루브레 전투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1차 파리 공방전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
콩피에뉴 공방전 안통 전투
제4기
푸앙세 공방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제르베로이 전투 생드니 공방전 2차 파리 공방전
2차 칼레 공방전 타르타 공방전 퐁투아즈 공방전 디에프 공방전 포미니 전투
잭 케이드의 난 블랑크포르 전투 카스티용 전투 }}}
푸앙세 공방전
프랑스어: Siège de Pouancé
영어: Siege of Pouancé
시기 1432년 1월 6일 ~ 2월 22일
장소 프랑스 왕국 푸앙세[1]
원인 브르타뉴 공국과 알랑송 공국의 갈등
교전국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국 파일:800px-Alençon_Arms.svg.png 알랑송 공국
지휘관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장 5세 드 브르타뉴
파일:Famille_de_Laval.svg.png 기 14세 드 라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파스톨프
파일:800px-Alençon_Arms.svg.png 장 2세 달랑송
파일: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Ambroise_de_Loré.png 앙브루아즈 드 로레
병력 6,000명, 포병 7문 2,000명
피해 미상 미상
결과 브르타뉴 공작과 알랑송 공작의 화해
영향 푸앙세 평화 협약 체결.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32년 1월 6일 ~ 2월 22일,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와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이 푸앙세 요새를 놓고 벌인 공방전.

2. 상세

1396년, 알랑송 공작 장 1세 달랑송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딸 마리 드 브르타뉴가 결혼했다. 이때 마리는 30,000 크라운 리브르를 지불하기로 했지만 1431년까지 15,000 리브르가 미지급되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장 1세 달랑송이 전사한 뒤 알랑송 공작에 선임된 장 2세 달랑송은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했다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힌 뒤 200,000 크라운 리브르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영지 상당수가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정복으로 인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는 막대한 빚에 시달려서 몸값을 좀처럼 지불하지 못했다.

이후 잔 다르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해 프랑스군의 승승장구에 기여하면서 잉글랜드에 내야 할 몸값 마련에 골머리를 앓던 장 2세 달랑송은 외삼촌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에게 푸제르 요새를 매각하는 대가로 12만 크라운을 챙겼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던 그는 1431년 크리스마스 때 낭트를 방문해 장 5세에게 어머니의 지참금 중 아직 미지급된 15,000 크라운을 달라고 요구했다. 장 5세가 시원한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외삼촌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사촌인 몽포르 백작 프랑수아[2]를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대신 낭트의 주교이자 장 5세의 총리였던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푸앙세로 끌고 갔다.

장 5세는 자신의 총신을 납치한 그에게 분노해 렌과 그 주변 지역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사위인 기 14세 드 라발에게 지휘권을 맡겨 푸앙세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메인과 하부 노르망디에 주둔한 잉글랜드 중대가 존 파스톨프의 지휘하에 그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브르타뉴군은 1432년 1월 6일부터 푸앙세를 포위하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장 2세 달랑송에 의해 푸앙세 수비대장에 선임된 앙브루아즈 드 로레에게 번번이 격퇴되었다.

장 2세 달랑송은 푸앙세를 구원하기 위해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및 여러 영주들로부터 무장병 2,000명을 지원받았다. 프랑스군은 도시를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는 브르타뉴군을 습격하려 했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브르타뉴군에게 요격당해 패퇴했다. 이후 브르타뉴군이 포병을 앞세워 성벽을 계속 공격해 여러 곳이 허물어지면서 함락이 가시화될 무렵, 프랑스 무관장이자 장 5세 드 브르타뉴의 형제였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중재에 나섰다. 장 2세 달랑송과 장 5세 드 브르타뉴는 리슈몽의 중재에 따라 2월 22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랑송 공작은 일전에 납치했던 장 드 말레트르와와 모든 잉글랜드인 및 브르타뉴인 포로를 석방하고, 플라스 드 라 게르슈를 담보로 제공하고 50,000 크라운의 벌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또한 장 5세는 1년 후 플라스 드 게르슈를 돌려주며, 마리 드 브르타뉴의 지참금 중 나머지 금액, 즉 15,000 크라운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1] 현재 프랑스 페이 드라 루아르 지역 푸앙세[2] 훗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