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파스톨프 John Fastolf | |
생몰년도 | 1380년 11월 6일 ~ 1459년 11월 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 캐이스터 홀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 캐이스터 성 | |
아버지 | 존 파스톨프 | |
어머니 | 메리 파크 | |
아내 | 밀리센트 팁토프트 | |
직위 | 기사,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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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2. 생애
1380년 11월 6일 잉글랜드 왕국 노퍽 캐이스터 홀에서 노퍽의 젠트리인 존 파스톨프와 메리 파크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파스톨프 가문은 13세기부터 전해지는 노퍽에서 꽤 명망높은 집안으로, 본래 그레이트야머스에 거주했고 그곳의 집행관을 자주 맡다가 노퍽으로 이주했다. 이전 세대의 주목할 만한 가족 구성원으로는 세인트 데이비드 주교인 토머스 파스톨프와 아일랜드 대법관인 니콜라스 파스톨프가 있었다.그는 1435년 프랑스에서 행한 법정 증언에서 자신이 1392년에서 1393년 사이에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했다고 주장했는데, 아마도 훗날 헨리 4세가 될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성지 순례에 동행했을 것이다. 또한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398년에 추방되기 전에 모브레이의 종자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1401년 헨리 4세의 둘째 아들인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수행원이 되었고, 아일랜드로 파견되어 초대 볼턴의 스크로프 남작 리처드 르 스크로프의 지휘를 받으며 현지 아일랜드인들의 반란 진압을 수행했다.
1409년 1월 13일, 아일랜드에서 기사 로버스 팁토프트의 딸이며 상관이었던 리처드 르 스크로프의 미망인인 밀리센트 팁토프트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으로 윌트셔의 캐슬 쿰 및 배트햄튼, 글로스터셔의 옥센턴, 서머셋 및 요크셔의 여러 영지를 포함한 상당한 양의 토지를 확보했으며, 이 영지들로부터 연간 240파운드의 수입을 확보했다. 이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에서 얻은 수입의 5배에 달했다. 그는 아내가 연간 100파운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지만, 아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의붓아들 스티븐 스크로프의 권리를 무시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재산을 소유했다.
141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한 그는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아쟁쿠르 전투의 영광에 함께 하지 못했다. 1415~1416년 겨울에 프랑스의 반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아르플뢰르로 돌아갔다. 1415년 11월, 그는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루앙 인근을 급습했고, 베르넬에서 저명한 프랑스 장군을 체포한 공적을 인정받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17년 꽁데슈흐누와호의 총독에 선임되었으며, 1418년 벡 성을 공략했다. 1420년 파리의 생앙투안 수도원 총독에 선임되었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한 후 잉글랜드 국왕에 등극한 헨리 6세의 섭정을 맡은 랭커스터의 존의 그랜드 마스터로 발탁되었으며, 노르망디 일대의 국왕의 부관으로 선임되었다. 1423년 멜룬 공략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해 여러 기사를 생포한 뒤 그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13,400 파운드에 달하는 몸값을 획득했다. 1426년 2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28년 잉글랜드로 돌아갔다가 1429년 초 다시 파리로 돌아온 뒤 오를레앙 공방전을 치르는 아군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고 2월에 1,000명의 기마 궁수 및 기사를 동원하고 300대의 마차에 식량, 화살, 화약, 대포 등을 싣고 파리에서 출발했다. 화물 중에는 사순절 기간에 병사들에게 먹일 청어가 가득 실려 있었다.
2월 11일, 수송 부대는 루브레(Rouvrey) 마을에 도착해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아침 루브레 마을을 떠나 오를레앙으로 향하던 중 남서쪽에서 클레르몽 백작[1] 샤를 1세와 에브뢰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장군인 단리의 존 스튜어트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 4,000명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진군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적 수송부대를 발견하자 보급품을 탈취하기로 한 것이었다. 파스톨프는 적군이 다가오자 호송대를 멈춰세운 뒤 루브레에서 1마일 떨어진 도로에서 마차를 원형으로 세우고 사슬로 묶은 후 전 병력을 마차가 에워싸고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샤를 1세와 존 스튜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마차 대열 주위를 에워싼 뒤, 가지고 온 대포 1문으로 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마차 여러 대가 파손되었고, 청어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하지만 전투를 포병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던 존 스튜어트는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린 뒤 적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명령에 따라 적을 향해 달려들자, 포병대는 아군을 맞출까봐 더 이상 포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적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격퇴했다. 뒤이어 샤를 1세의 기마병들이 돌격을 가했지만, 마차 벽을 뚫을 수 없어서 역시 격퇴되었다. 적이 연이은 패배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걸 확인한 파스톨프는 기사들에게 말에서 올라타서 마차 밖으로 나와 적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잉글랜드 기병대는 즉시 적진으로 달려가서 프랑스 포병대를 몰아내고 대포를 파괴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잉글랜드 수송부대는 파손된 마차를 수리한 뒤 이동을 재개해 오를레앙의 포위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했다. 루브레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는 120명의 기사와 600명의 군인이었다. 존 스튜어트를 비롯한 여러 고위급 장교들이 전사했고, 장 드 뒤누아는 부상을 입었지만 일부 병력을 수습해 오를레앙으로 겨우 들어갔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스톨프는 임무를 완수하고 파리로 돌아간 뒤 5월에 추가 병력과 화약 무기를 모아서 오를레앙 포위군을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프랑스군이 잔 다르크의 독려에 힘입어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그는 루아르 원정을 단행한 프랑스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오를레앙에서 북쪽으로 12마일 떨어진 잔빌로 진군했다. 멍 요새를 지키고 있던 존 탈보트는 프랑스군이 멍 요새 대신에 보장시로 진군하는 걸 보고 잔빌로 달려가서 파스톨프와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파스톨프는 프랑스군의 군세가 강력하니 일단 멍과 보장시에 남아있는 수비대를 철수해서 북쪽에 재집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탈보트는 방어를 강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는데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이지 않고 도주할 수 는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탈보트의 강권에 밀린 파스톨프는 루아르 강으로 진군해 프랑스군의 압박을 받는 수비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6월 16일, 프랑스군은 보장시의 요새화된 다리를 공격했다. 당시 보장시를 지키고 있던 기사 리처드 구스틴(Richard Guestin)과 매튜 고프(Matthew Gough)는 성채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다리 쪽 요새에 소규모 맨앳암즈와 장궁병을 배치했다. 프랑스군은 다리 쪽 요새에 맹공을 가한 끝에 공략에 성공했고, 포대가 남쪽 제방에 설치된 뒤 보장시 마을과 성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령관들은 성채가 강력한 방비를 갖춘 것을 보고 직접적인 공격을 꺼리고 포격을 가함으로써 적이 알아서 항복하기를 희망했다. 6월 17일, 멍 요새에 도착한 파스톨프는 프랑스군이 다리를 장악하고 있고 다리 북쪽 끝에 강력한 요새를 설치한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이곳을 공격했다간 큰 손실을 볼 것을 우려해 존 탈보트 및 토머스 스케일스를 불러들인 후 보장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군은 보장시에서 2마일 떨어진 언덕에 전투 대형을 형성하고 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보장시 수비대가 출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리슈몽의 보병과 공성포를 남겨뒀다. 적군이 미리 유리한 지점에 전투 대형을 편성했으며 숫자도 자기들보다 많은 것을 확인한 파스톨프는 멍으로 돌아갔다. 6월 18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멍 다리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려 시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멍 요새를 지킬 희망이 없다고 여긴 파스톨프는 탈보트를 강력히 설득한 끝에 멍 요새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게 했다. 한편, 보장시 수비대는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프랑스군에 항복 의사를 전했다. 프랑스 측은 그들이 10일 동안 프랑스군과 교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무기와 짐을 가지고 노르망디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파스톨프와 탈보트는 보장시가 이렇게 빨리 항복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잔빌을 향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수송 마차와 포병대를 보호햐기 위해 선두에 세웠기 때문에, 5,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의 행군 속도는 매우 느렸다. 파스톨프는 선두에서 수송 부대, 포병 부대, 숙영지 경비병, 소규모 기마병들과 함께 했고, 탈보트, 스케일스는 노르망디와 프랑스 점령지에서 모집한 프랑스 민병대와 함께 중군에 있었다. 후위대에는 잉글랜드 맨앳암즈 및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이 사실을 첩보를 통해 접한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 장군들은 섣불리 추격했다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같은 참혹한 패배를 겪을 것을 우려해 추격하기를 주저했다. 이때 잔이 그들을 독려했다.
"저들이 그대로 돌아가게 내버려둔다면 랭스로 행차하실 샤를 왕자님의 대관식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싸우러 갑시다! 그들이 구름에 걸려 있더라도 우리가 잡을 겁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벌하려고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쓸 때입니다!"
프랑스 수뇌부는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1,500명의 기마병이 선두에서 질주하는 동안, 장 2세, 잔, 리슈몽 등이 이끄는 프랑스 본대가 뒤따라갔다. 한편, 맹렬한 여름 더위에 시달리며 느릿느릿 행진하던 잉글랜드군은 6월 18일에 파테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마일 떨어진 블루아-파리 도로와 오를레앙-샤르트르 도로의 교차점에 이르렀다. 이때 정찰병들이 적 기병대가 근처에 이르렀다는 첩보를 전했다. 파스톨프는 탈보트, 스케일스와 함께 전쟁 회의를 열어 어찌 대응할 지 논의한 끝에 적군의 추격을 따돌릴 가망이 없으니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적을 격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들이 전투 대형을 갖춘 곳의 지형은 작은 숲 몇 곳이 산개할 뿐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등 매우 평탄해서 방어상의 이점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했다. 파스톨프는 대포와 짐을 블루아-파리 도로 서쪽의 조그마한 언덕인 라가렌에 올려놓게 하고, 탈보트에게 500명의 장궁병들을 데리고 울타리가 앞에 쳐져 있는 숲에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프랑스 기병대에게 기습 사격을 가해 상당한 손실을 입힌 뒤 즉시 물러나서 본대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탈보트의 궁수들은 오후 1시 30분까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교차로 바로 남쪽의 블루아-파리 도로 맞은편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장궁병들이 기병들의 돌격을 저지할 말뚝을 충분히 박지 못했다. 장궁병들이 숲속에 자리를 잡은 직후, 프랑스 기병대가 탈보트의 장궁병들에게서 반 마일 떨어진 생페라비에 도착했다. 이때 큰 사슴 한 마리가 기병들의 접근에 놀라 숲에서 뛰쳐나와 장궁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궁수들은 갑작스러운 사슴의 돌진에 당황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피했다.
프랑스 기병들은 그 비명을 듣고 적이 숨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즉시 라 이르에게 잉글랜드군을 발견했고 적이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라 이르는 적이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2시, 프랑스 기병들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적 궁수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엉성하게나마 전방에 서 있는 말뚝을 회피해 장궁병의 측면을 강타했고, 뒤이어 장궁병들을 에워싸서 섬멸했다. 얼마 안남은 장궁병들이 가까스로 그들을 피해 본대로 도주했다.
장궁병들이 형편없이 깨져서 달아나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패닉에 빠졌다. 특히 잉글랜드군이 최근에 노르망디와 프랑스 점령지에서 징집한 민병대가 도주하기 시작했다. 파스톨프가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을 때, 라 이르의 프랑스 기병대가 적 본대를 향해 돌진해 적 대열을 돌파하고 적병들을 마구 베었다. 한 시간 남짓 지속된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프랑스 기병들은 그런 적을 추격해 무참히 학살했다. 탈포트는 울타리 뒤에서 체포되어 파테 마을에 있는 집으로 이송되었고, 토머스 스케일스 역시 생포되었다. 파스톨프는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와 잔빌로 돌아가려 했지만, 장빌의 주둔군은 아군을 버리고 달아난 그를 도시 안에 들여보내길 거부했다. 결국 파스톨프는 파리로 돌아가야 했고, 잔빌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베드퍼드 공작 존은 파테 전투에서 아군이 궤멸되었고 파스톨프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몹시 분노해 그를 가터 기사단에서 제명했다. 또한 프랑스군에 잡힌 뒤 4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433년에 석방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간 탈보트는 파스톨프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파테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며 파스톨프를 오랫동안 적대시했다. 하지만 파스톨프는 아르플뢰르 대장, 베르누이, 캉의 대장을 포함한 여러 군사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고, 명예 회복을 위해 가터 기사단에 복직해달라는 취지로 오랫동안 소송전을 벌인 끝에 1442년에 비로소 기사단에 복직했다. 그러나 전장에서 도주했다는 대중의 인식을 희석하지는 못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6세>는 그를 프랑스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존 탈보트를 저버리고 달아난 비겁한 기사로 묘사했다.
1432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함께 푸앙세를 포위 공격했으며, 바젤 공의회에 파견된 잉글랜드 사절단의 일원이었고, 1435년 아라스 조약 협상에 참여했지만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한 것을 막지 못했다. 1435년 1월, 코탕탱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반란군이 캉으로 진격했다. 이에 르망에 머무르고 있던 파스톨프가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을 기습해 400명 이상을 죽였다. 사기가 떨어진 반란군은 다음날 대부분 탈영했다. 한편, 파스톨프는 프랑스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접근 방식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공성전을 기반으로 한 현재의 군사 정책을 비판하고, 대규모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여 프랑스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백년전쟁이 프랑스 쪽으로 많이 기울자, 그는 프랑스 내 재산을 매각하고 잉글랜드 쪽 재산 관리에 전념했다. 1439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노퍽의 영지 관리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민중의 적의는 지속되었고, 1450년 반란을 일으킨 잭 케이드는 그를 잉글랜드 재난의 원흉 중 한 사람으로 규탄했다. 1450년 4월 15일, 노르망디의 잉글랜드군이 포미니 전투에서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당국은 파스톨프에게 3,000명의 새로운 군대를 창설해 노르망디를 돕게 했지만, 그가 출발하기 전에 노르망디 전역이 잉글랜드에 석권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캐이스터 성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59년 11월 5일 사망했고, 세인트 베넷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아내 밀리센트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고, 그의 재산 대부분은 그가 생전에 후원했던 옥스퍼드의 마그달렌 대학에 기부되었다. 마그달렌 대학은 오늘날에도 그를 후원자로 기리며 사회재단인 파스톨프 협회를 세웠다.
[1] 훗날 부르봉 공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