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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3:29:15

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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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청어
Herring
파일:Herring.jpg
학명 Clupea
Linnaeus, 1758
<colbgcolor=#fc6> 분류
동물계 Animalia
척삭동물문 Chordata
조기어강 Actinopterygii
청어목 Clupeiformes
청어과 Clupeidae
청어속 Clupea
태평양청어 Clupea pallasii
대서양청어 Clupea harengus
자원보호
금지체장20cm

1. 개요2. 생태3. 주요 종4. 명칭
4.1. 여러 명칭
5. 청어와 인간
5.1. 수산업
5.1.1. 한국5.1.2. 일본5.1.3. 유럽
5.1.3.1. 북유럽한자동맹5.1.3.2. 네덜란드의 독점5.1.3.3. 영국의 주도권 장악5.1.3.4. 다시 네덜란드와 북유럽으로5.1.3.5. 주요 가공품
5.2. 관련 민요와 풍속5.3. 음식
6. 여담

[clearfix]

1. 개요

청어목 청어과 청어속의 바닷물고기.

2. 생태

성체는 길이가 20~38 cm, 외견이 정어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몸 측면에 방사형 융기선이 없고, 꼬리에 정어리 특유의 비늘이 없으며, 옆구리에 검은 점이 없는 점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몸빛깔은 담흑색에 푸른색을 띠지만 배 쪽은 은백색이다. 대표적인 한해성 어류로, 3월 하순부터 수온이 4~5°C 가까이 올라가면 성숙한 성어는 깊은 바다에서 연안의 해조류가 무성하고 암초가 있는 얕은 연안이나 내만으로 떼를 지어 몰려오고, 그곳에서 12월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산란한다. 성숙하는 데는 4년 정도 걸리고 수명은 20년 정도이다. 먹이는 플랑크톤성 갑각류이다.

매년 초 노르웨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간단히 알아볼까요? 먼저, 플랑크톤 대증식이 발생하여 영양이 풍부한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청어 떼가 몰려든 후 노르웨이 피오르드 깊숙이 내려가 산란장소를 물색합니다. 이어서 대구, 대서양 대구, 참치, 광어, 고래와 같은 큰 물고기들이 청어사냥에 나섭니다. 심지어 바닷새와 곰들마저 청어와 청어알을 만찬으로 즐기러 모여듭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청어는 대서양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 노르웨이 수산조합의 대서양 청어 생태에 대한 설명.#

무리지어 생활하고 개체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생태적으로는 상위 포식자들의 먹이로 매우 중요하다.

3. 주요 종

4. 명칭

한국어 청어(靑魚), 비웃
영어 herring, shad[1]
중국어 鯡魚/鲱鱼 (fēiyú)
일본어 ニシン(니싱)
스페인어 arenque

4.1. 여러 명칭


출처

5. 청어와 인간

5.1. 수산업

물 반 청어 반이다 싶은 어마어마한 개체 수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서는 중요한 먹거리였다. 전 세계에 명물이 되어 남은 청어 보존 식품들이 그 흔적이다. 한국의 과메기[2]와 청어알젓, 일본의 미카키니싱,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유럽의 훈제 청어와 청어 초절임 등. 또한 청어 어업이 창출한 거대한 규모의 경제는 한 지역과 국가의 흥망이 청어의 어획량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대구와 함께 청어를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단 어업을 하면 엄청나게 잡혀서 예전부터 청어잡이를 할 때는 낚시보다는 그물을 사용했다. 워낙 대량으로 어획되는 탓에 기존의 시장 규모에서는 단시간에 소비가 불가능해서 냉동 유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3년 12월 기준 남해안에서 잡힌 청어(산란기라 곤이이리가 있는)의 경매가는 20 kg 한 상자에 9천 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물론 소매가는 이보다 비싸지만 그래도 타 물고기보다 싸긴 하다. 참고로 고등어는 1 Kg당 1만 원가량이다. 청어는 꽤 저렴한 생선이라 주로 양식장 물고기들의 사료로 이용된다.

5.1.1. 한국

청어는 정월에 입포(入浦)하여 해안을 따라 회유하면서 산란하는데 무수한 청어가 떼를 지어 군래하면 바다를 뒤덮는다.
- 정약전, 《자산어보》 中

동아시아에서 청어 어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으로, 고려 시대부터 그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청어 어획량이 급증한 것은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근세이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며 각 지역의 인구가 폭증하고 성리학 질서가 향촌 사회에 깊게 뿌리내림에 따라 수산물의 소비량 역시 덩달아 증가했다. 값싼 수산물을 통해 단백질을 보충하는 인구의 비율이 늘어나고, 제사 문화가 확산되며 제삿상에 필수적인 수산물을 구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이는 다시 전국을 잇는 상인 집단의 성장을 가속화했다. 전국의 수산물이 잡히는 대로 가공되어 수로를 통해 곳곳의 시장에 유통되었다. 심지어는 얼음을 채워 넣은 냉장선이 개발되어 생물을 유통하기도 했다. 가령 서울의 경우 경강상인들이 주도하여 각지의 수산물을 사들였고, 이를 다시 한양의 외어물전과 내어물전에 내다 팔았다.

때마침 소빙기의 영향으로 냉수괴가 황해까지 확장하자 한류성 어종이었던 청어 또한 서식지를 넓혀 중국 연안까지 진출했다. 당시 조선에서 청어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등푸른 생선이 된다. 수많은 등푸른 생선을 제치고 청어(靑魚)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바로 그 증거. 즉 옛 조선인들에게 등푸른 생선의 표준은 어디까지나 청어였던 것이다.

당시 청어는 전국의 바다 연안 전역에서 매우 많이 잡혀[3] 비유어(肥儒魚: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4]로 불릴 정도로 값싸고 친숙하며 맛있는 생선이었다. 이때는 시기별로 각 지역에서 청어를 잡아 올릴 수 있었으며,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만 황해도 해주산 청어도 한때 이름을 날렸다. 해당 지역은 현재는 오히려 난류성 어종인 조기 어장으로 변했다.

특히 당시 소빙기의 영향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는데, 오히려 청어는 어획량이 폭증하면서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고, 배고픈 일반 민중의 배를 채워준 고마운 식품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조선에서도 청어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가공 방법들을 개발했다. 대부분은 타국의 청어 가공품과 아주 비슷했다. 대표적인 것은 관목이라 불린 과메기로, 바닷바람에 청어를 말린 것이다. 현재는 꽁치로 만들지만 원조는 청어였다. 한편, 부엌 굴뚝에 걸어 훈연한 훈제 청어(연관목)도 있었다.

예로부터 청어죽은 보신재로 산후나 병후의 회복기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값도 싼 생선이라 어떤 선비는 "1냥에 청어 3뭇밖에 안 되는데 너무 비싸진 거 아니냐?"라고 하기도 했다. 참고로 1뭇은 10마리.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는 한술 더 떠서 "청어는 옛날에는 극히 흔하였는데 고려말에는 감산되어 쌀 한 되에 청어 40마리밖에 주지 않았다." 하고 한탄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청어잡이로 수십만 마리를 잡아 군사와 피난민들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한산도둔전을 일구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만 가지고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5] 잡은 청어들은 주로 그냥 먹기보다는 말려서 과메기로 먹었다. 청어는 내장에 지방이 많고 살이 쉽게 물러서 금방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말린 청어를 농민들과 물물교환하여 군량미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순신 본인도 구운 청어를 즐겨 먹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생선이라서 조선 수군의 체력과 사기유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여담이지만, 청어와 함께 조선수군에 기여한 또 다른 수산물은 미역.

조선에서도 청어의 포획과 소비, 가공업은 국제적이었던 유럽에 맞먹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팔도 곳곳에서 활황이었다. 소빙기와 기근, 그리고 인구 증가와 화폐경제의 발전에 맞물려 삼면의 바다에서 대량으로 잡히기 시작한 청어는 조선 후기 어업과 유통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조정의 수입 중에서도 청어 수산업에서 걷은 세금이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지역에서는 주로 어살을 설치해 잡았고,# 많은 지역에서는 세망과 정치망[6] 등을 이용했다. 이 중 경상 북부 지역에서 쓰였던 세망은 청어망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청어 어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한편 다산 정약용은 포항 유배 도중에 청어 어업에 적합한 그물을 만드는 법을 해당 지역의 어부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청어 어획량 증가에 기여했다. 원래 포항 어부들은 칡넝쿨로 만든 조악한 그물을[7] 사용했기에 청어를 많이 잡아도 그물이 터지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정약용은 명주나 면사로 그물을 짜는 방법과 그렇게 만든 그물을 소나무 껍질을 달인 물에 담가 강도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를 갈물 들인다고 하며, 이 방식으로 강화된 그물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8] 정약용의 그물은 일제강점기에도 절찬리에 쓰이다가 나일론 그물이 등장하는 1950년대에야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 근해의 청어들도 어획량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이후 청어의 이동이 시작되면서 청어 산업은 쇠퇴하고 만다. 소빙기가 끝나면서 우선 중국 연안의 청어들이 사라졌고, 한반도 서해안의 청어는 19세기부터 서서히 개체수가 감소하다 자취를 감췄다.[9] 19세기 말에 들어서는 청어 서식지가 아예 인구 희박 지역인데다 높은 산맥으로 타 지역과 고립되어 있는 동해안으로 국한되었다. 이 덕에 인구 밀집 지역인 서부 지역과 생산지가 괴리되면서 생산량도 덩달아 급감했고, 자연스럽게 청어 어업도 다른 어종에 밀려 사양세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고 고도로 발전했던 어업은 난류성 어종이라 서해안에서 원래 많이 잡히고 소비되는 조기, 그리고 삼면에서 잘 잡히는 고등어 어업이었다.[10] 한류성 어종인 명태대구(어류), 청어는 교통 및 냉장 기술이 발전한 근대에 들어서야 소비량이 다시 폭증한다.

이 때문에 조선 청어 어장은 19세기부터 국제적인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18 ~ 19세기경 중국 연안까지 잠시 확장했던 청어 집단이 다시 조선 서해안 연안으로 돌아가자, 이를 쫓아 청나라 어선들이 조선 연안까지 와서 조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황당선이라고 불렸던 선단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 행위 중 가장 이른 것이다. 특히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시점이 가장 악명높았다. 당시 조선 조정과 청나라 조정 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번졌을 정도였다.

19세기부터는 일본의 청어 어업이 개항 및 산업화와 맞물려 더더욱 활황을 띰에 따라 일본 선단이 조선 어장에 침투했다. 당대 일본은 서구 국가들에 비누 및 각종 기계유의 원료인 청어 어유를 수출하였는데, 홋카이도까지 병합해서 그 근해 어군을 싹 잡아들인 결과 청어 개체수가 격감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 어선단은 점차 일본 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어업권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경술국치 이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거리낌 없이 조선 동해안의 풍부한 청어 어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편 서식지가 축소되었음에도, 19세기 말까지는 어획량이 엄청나 부산항에 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청어가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60년대부터 차차 줄어들어 7~80년대에는 1/100수준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원래 제철이어야 하는 연초 때의 어획량이 아예 0이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90년대들어 차차 늘고 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간 청어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산어보에도 이런 청어의 주기적인 이동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55년 주기로 서해에서 청어가 잡히다가 동해에서 잡히다가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에서 청어가 씨가 마르면서 청어로 만드는 과메기는 거의 사라지고 꽁치 과메기밖에 남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청어 회유로가 40년이 지날 때마다 바뀐다는 설이 있으므로, 다시 연근해가 청어 떼로 넘칠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11]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청어 어획량이 다시 늘어나고 청어 풍년인 해도 점점 늘어나는 중. 당연히 청어 과메기도 부활했다. 대한민국에서 잡히는 청어는 주로 양식장의 사료로 이용된다. 청어를 직접 식용으로 판매하기보다 청어로 넙치 같은 양식어종을 길러서 판매하기가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2020년대 초 시점에서 한국의 청어 어업은 전 세계 생산량의 약 4.3%를 차지하여, 아시아에서는 독보적 1위이자 세계 5위이다.

주요 가공품은 다음과 같다.

* 과메기
청어를 막대기에 꿰어 겨울 바닷바람에 말린 건어물. 눈을 꿰었다 해서 관목(貫目)이라고도 한다. 이 한자어가 과메기라는 말의 원조인지, 아니면 단순히 과메기란 단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공식적으로는 관목의 방언이 과메기라는 것이다. 현대 들어 청어의 개체수 감소로 인해 대체재인 꽁치로 주로 만들었지만, 청어 어획량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원조 청어 과메기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 말린 것은 요새는 통과메기라고 부르는데 이쪽이 사실 원조다. 현재 유통되는 과메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장을 제거하고 반으로 가른 편과메기는 사실 1990년대 대량공급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신식 기법이다. 실학자 서유구의 저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는 청어를 통째로 말리고, 일본에서는 반 갈라 말린다고 씌어 있다.

포항 수협의 설명에 따르면 전통적으로는 부엌의 살창에 통째로 걸어 겨울 바람에 말리는 냉훈법으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가 자연적으로 청어를 훈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별도로 연기 연(煙) 자를 앞에 붙여 연관목이라고도 불렀다. 연관목은 현재는 거의 완전히 사라져서 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본래 과메기는 동해안 전역에서 소비하는 보존식품이었지만 포항시 영일만의 청어로 만든 과메기가 특히 유명하다.

5.1.2. 일본

일본의 청어 어업은 동북아 3국 중 가장 늦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 시기인 17세기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전국적 유통망을 갖춘 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일본의 농업 생산량과 상품 작물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비료 제작 산업이 활황을 띄었다. 원래는 정어리를 가열하고 압착해 어유를 추출한 뒤 남은 깻묵으로 비료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정어리가 사라지고 소빙기의 영향으로 청어가 급증하면서 일본 북부 해안으로 넘어오자 원료가 정어리에서 청어로 변화했던 것이다. 에도 시대 어부들은 청어를 쫓아 북상하면서 마침내 당시는 아이누의 영역이던 홋카이도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일본의 홋카이도 식민지화의 첫 단계였다.

홋카이도 남부에 위치한 마츠마에 번에서는 청어와 연어를 찾아 가신들에게 특혜를 주어 홋카이도 해안 곳곳을 개척하도록 했다. 이때 일본인들이 임노동자로 아이누 부족들을 헐값에 동원하며 아이누의 생활 양식을 파괴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반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반란은 막부의 지원을 받은 마츠마에 측의 승리로 끝났고, 진압당한 아이누들은 저항의 동력을 잃고 일본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부 일본인들은 청어를 찾아 사할린까지 올라가다가 남하하던 러시아 제국과 만나기도 했다. 이는 양국의 최초 조우였다.

어쨌든 청어잡이 시즌이 되면 각지의 어부들이 마츠마에로 올라와 청어 저택이라 불리는 집단 숙소에서 묵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청어 떼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즉시 배를 타고 나가 그물을 던져 포획했다.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주로 정치망을 썼다. 이렇게 잡힌 청어들은 인근의 집산지에서 크기별로 분류되어 가공된 후, 운송업자들의 전국적인 유통망을 거쳐 일본 각지에 납품되었다. 주로 기타마에부네라고 불리는, 동해 항로를 통해 오사카홋카이도를 잇던 운송업자 조합이 청어를 운반했다.[12][13] 이들은 세토내해를 따라 조슈 번[14]의 시모노세키로 간 후 다시 쓰시마 난류를 타고 서일본 연안을 따라 홋카이도로 올라갔다가, 일을 마치고는 같은 길을 따라 오사카로 돌아왔다. 훨씬 짧은 동일본 항로를 이용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태평양 연안이 항해하기에 위험했기 때문이었다.[15] 물론 세토내해와 호쿠리쿠의 중간 기착지들에서 물건을 거래하고, 청어 염장에 필요한 소금을 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덕에 청어가 긴키 지역의 명물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주된 청어 가공 식품은 하술할 미가키니싱으로, 우리나라 연관목, 또는 유럽의 훈제 청어와 비슷한 제품이다. 우선 청어의 내장을 제거한 뒤 바싹 훈연하여 만드는 훈제품으로, 주로 상등품이 청어가 가공되었다. 청어가 나지 않는 서일본, 그것도 내륙인 교토의 명물이라는 점에서 당대 일본의 청어 산업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하급품 청어는 우선 대량으로 쪄낸 후 압착하여 청어 어유를 분리한 뒤 등유로 팔고, 남은 깻묵은 상술한 대로 비료로 가공해 각지의 농장에 팔았다. 주로 세토내해 일대에 널리 퍼져 있던 목화 재배 농가에서[16] 청어깻묵을 구입하곤 했다.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 일본이 개항한 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기존의 어유 산업이 특히 발전하였다. 어유에 수소를 첨가해 경화유로 가공하면 윤활유 등의 각종 산업적 용도로 쓸 수 있었던데다 비누의 원료도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곧 일본 근해의 청어는 남획되었고,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 동해안에도 수많은 어유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이때 가공된 청어와 정어리 어유는 일본 제국 해군 함대의 주요 동력원으로도 쓰였으며 한때는 일제가 바이오매스로 에너지 자급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청어와 정어리가 일본 근해에서 사라지며 안그래도 중일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던 일본 제국의 연료 공급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고, 일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나무에서 송근유를 채취하기에 이른다.

일본의 청어 어업은 1897년에 최고점을 찍곤 줄곧 감소세를 보여 1950년대부터는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청어 어업은 세계 10위권 밖이다.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남획과 청어 서식지 변동으로 인해 일본 근해 어군이 거의 사라졌고, 1945년에 한국이 광복을 맞으며 동해 어장 절반을 상실했다. 한편 북쪽으로는 소련이 남사할린쿠릴 열도를 접수하곤 자국 EEZ에 대한 일본 어선의 접근을 봉쇄하는 바람에 오호츠크해 어장과의 연결도 끊어졌다.[17] 다만 청어 양식업에 있어서는 여전히 높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가즈노코라 불리는 염장청어알 요리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5.1.3. 유럽

파일:bloaters.jpg
▲ 영국의 염장 훈제 청어인 블로터(Bloater).


바이킹들의 식사를 소개하는 영상. 청어포가 나온다. 얼마나 단단하면 먹기 전에 막대기로 두들긴다

유럽에서도 흔하고 친숙한 식재료였다. 일명 "바다의 (The Silver of the Sea)". 중세 유럽에서는 금육일에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로 소비되던 것이 훈제 청어일 정도였다. 게다가 비타민 D 함량이 많은 음식 중 하나라서 우중충한 날씨가 일상적인 북유럽에서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수산조합은 청어가 유럽 식문화에서 감자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고까지 설명한다.#

유럽에서도, 청어 어획량은 늘 들쑥날쑥해서 청어가 잡히는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한자동맹의 성장과 몰락에 청어 서식지의 변경이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으며,[18] 대항해시대 시절 네덜란드도 청어 어획고가 감소하자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줬을 때 그 밑바탕이 된 것이 엄청난 청어 어획고로 벌어들인 돈이었다고. 대구와 함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청어는 매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5.1.3.1. 북유럽한자동맹
유럽에서 청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9세기경이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리로 인해 사순절과 같은 시기에는 육류의 취식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동물성 단백질은 반드시 보충해야 했으므로 이는 곧 종교적 제한에 걸리지 않는 청어와 대구 가공품의 급격한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되었던 곳은 발트 해 연안, 그 중에서도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방이었다. 스코네 어시장(덴: Skånemarkedet/스: Skånemarknaden)은 청어 어업의 핵심적인 장소로, 덴마크 정부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다.[19]

초기에는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가 주도하였으나 곧 북해와 발트해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도시 공동체인 한자동맹이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청어 가공의 중심지는 독일 북부의 뤼겐 섬. 이 지역은 독일 동부와 폴란드 일대에서 캐낸 암염을 조달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덴마크령 스코네보른홀름, 에스토니아 등에서 잡힌 청어는 뤼겐 섬으로 모여 뤼네부르크산 암염으로 염장된 후 한자동맹 상인들을 거쳐 독일 서부의 베스트팔렌 지역의 상회들로 이동했고, 여기서 다시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이는 물론 덴마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발트 해의 도서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패권국이었던 덴마크는 한자동맹이 자신들의 영해에서 이득을 보는 꼴을 좌시하지 않았고, 한자로부터 청어 산업의 주도권을 방어하고자 계속 시도했다. 온갖 규제와 통제가 도입되었고, 한자 상인들은 스코네 어시장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그리고 덴마크는 1109년에 아예 뤼겐 섬을 공격해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독일 북부의 뤼베크로 중심지가 이동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동유럽 슬라브 계통의 가맹도시 출신 상인들은 꾸준히 청어를 실어 뤼베크로 가져왔고, 이를 가공한 한자동맹의 청어 어업은 계속 번창했다. 1370년 한자동맹은 아예 덴마크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슈트랄준트 조약을 맺어 발트 해 전역에서 독점적인 어업을 할 권한을 덴마크로부터 받아내면서 힘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한자동맹과 발트 해 청어 어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청어의 주 산지인 발트 해에서 한자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해지자 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새로운 무대를 찾아내었고, 이는 곧 청어 어업의 무대가 북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단순히 청어 어업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해 한자동맹이 몰락하는 반면에 이들 국가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며 청어 어업에서 한자의 지분을 잠식해 들어갔다. 때마침 청어들이 이동하여 발트 해에서 어획량이 급감하기도 했다. 때문에 발트 해의 청어 어업은 현대까지 이어지지만, 다시는 이때의 위상을 복구하지 못했다.
5.1.3.2. 네덜란드의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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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발명한 칼과 청어를 든 빌럼 뵈컬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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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청어 어업의 핵심이던 청어잡이 원양어선 하링부이스(Haringbuis). 오른쪽의 작은 선박은 소형 어선인 도거(Dogger)다. 출처: 대영박물관 #

이러한 주도권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빌럼 뵈컬손(Willem Beukelszoon), 영어로는 윌리엄 버클스(William Buckels)라는 네덜란드 어부였다. 그는 1380~1386년 시기에 갓 잡은 청어의 [20]이리[21]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 대신 함수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했다. 옛날부터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중요하고 비싼 필수품이었고, 특히 연중 일조량이 적은 기후 탓에 바다에서 소금을 만들기 어려웠던 북유럽과 서유럽은 더더욱 소금이 귀했다. 이 때문에 기껏 청어를 잡아도 오래 보존하려면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소금이 부족해서 충분한 양을 수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소금 대신 바닷물을 끓여서 수분을 날려 굉장히 짜게 만든 소금물(함수)을 소금 대신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완전히 증발시켜 고체를 만들거나 암염광산에서 캐내어 정제해야 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함수는 그저 바닷물을 끓이기만 하면 얻을 수 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거기다 네덜란드는 발전한 자국의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원양어선 하링부이스 선단을 구성하여 북해의 청어를 쓸어담았고, 강대한 네덜란드 해군 함대는 이들의 안전한 활동을 보장했다. 네덜란드는 이 방법으로 청어를 기존보다 수십 배나 많이 생산했고, 기존의 노르웨이, 스웨덴, 한자동맹 등 경쟁 세력들을 밀어내고 대성공하였다. 당대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했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청어절임은 지금도 여전히 먹고 있는데 그것이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하링(Haring)이다.

다만 이후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영국인들이 청어의 주 어장인 영국 연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네덜란드 함대를 무너뜨리면서 점차 쇠락했다. 이후 유럽 청어 어업은 네덜란드인들의 청어 어업 기법을 배우고 강대한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5.1.3.3. 영국의 주도권 장악
유럽 대서양 청어의 주된 어장은 북해, 그중에서도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연안과 북해 중앙의 거대한 모래톱인 도거 뱅크이다. 이 해역은 수온이 낮고 템스 강라인 강에서 흘러드는 영양 염류가 풍부하며, 수심도 매우 얕아 청어의 중요한 산란지이다. 특히 잉글랜드 동남부 노퍽 주의 그레이트야머스(Great Yarmouth), 일명 야머스 시의 앞바다가 가장 경제성 있는 청어 어장이었다. 야머스 앞바다에는 해저에 헤이즈버러 사주(Haisborough Sands) 등의 길다란 모래톱이 곳곳에 분포하여 여러 해양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22]

덕분에 중세 이래로 야머스의 어민들은 백사장에서 보트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청어로 만선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잡힌 청어들은 썩기 전에 바로 가공된 후, 야머스 시내를 지나는[23] 야레 강(River Yare)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노리치에 도달했다. 노리치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제2의 도시였고, 그 이후에도 이스트 앵글리아의 중심지였기에 전국의 많은 상인들이 모였다. 야머스산 청어도 여기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부터 야머스의 청어 산업은 확장된 철도망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량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세기 이전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가 암스테르담이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는 야머스였다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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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야머스 부둣가. 빽빽하게 몰려든 어선들 전부가 청어잡이 어선이다.

청어잡이 시즌만 되면 수백 대의 어선이 야머스와 남쪽 로웨스토프에 몰려들었고, 유망[24] 또는 저인망[25] 이용해 날마다 엄청난 양의 청어를 잡아들였다. 육지에서는 청어 가공 공장에서 날마다 청어를 가공,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완제품을 납품했다.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 그리고 폴란드에서도 많이 수입해갔지만, 주된 고객은 남유럽 국가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남유럽에서는 아무래도 앤초비 젓갈 등으로 익숙해서 그런지 청어 절임을 많이 수입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야머스 항의 이 많은 트롤어선들은 세계대전 당시에 징발되어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함으로 쓰이기도 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 당시 프랑스로 달려간 어선들도 상당수 있었다.
▲ 1920년 스코틀랜드의 스카보로 항구와 1925년 잉글랜드 그레이트야머스 항구에서 스카치 큐어 방식으로 청어를 손질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

특기할 만한 이들이 있다면 바로 '피셔 걸(Fisher girl)'이라 불린 이들이다. 야머스의 향토사 박물관인 Time and Tide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피셔 걸들은 부둣가에서 어선들이 잡아온 청어의 내장을 손질하던 스코틀랜드인 여성 계절노동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건 간에 걸(girl)로 불렸다. 또는 영상에서처럼 피셔 래시즈(Fisher Lasses)나 스코티시 래시즈(Scottish Lasses), 또는 헤링 래시즈(Herring Lasses)라 불리기도 했다. Lass는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방언으로, 젊은 여성을 뜻한다.

이들은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했는데, 두 명이 내장을 제거하면 남은 한 명이 이를 받아 나무 통에 담는 방식이었다. 현지에서는 이를 스카치 큐어(Scotch Cure) 방식이라 하는데, 사실 빌럼 뵈컬손이 개발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위 영상에서 그들의 작업 방식을 잘 볼 수 있다. 작업 시간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였으며, 주로 노동요를 함께 부르며 고된 작업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거대했던 그레이트야머스의 청어 어업은 1950년대까지 성업하였으나,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과[26] 1953년의 대홍수로 시내가 파괴되면서 주춤하기 시작했다.[27][28] 결정타는 바로 청어 어획량의 감소였다. 남획과 청어의 서식지 이동으로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1960년의 청어 어획량은 전성기인 1913년의 2~3%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야머스 항의 마지막 유망(Drifter) 어선 역시 1963년에 팔려나갔고, 청어 조업은 1968년 가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한때 야머스 항구를 가득 채웠던 피셔 걸들 역시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이렇게 어업이 쇠퇴한 대신, 석유 시추 산업이 성장했다. 오늘날의 야머스는 소규모 석유 정제 및 물류 기점이자 국내 관광도시로 재개발되었다. 한때 성업했던 청어 어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단 두 곳 뿐이다. 시내 인근에 정박해 있는 야머스의 마지막 유망 어선인 YH 89 리디아 에바(Lydia Eva) 호,[29] 그리고 실제 청어 건조장을[30] 개조한 시간과 조류(Time and Tide) 박물관이 바로 그곳. 리디아 에바 호는 남쪽 로웨스토프의 마지막 트롤어선인 LT 412 민카를로(Mincarlo) 호와 함께 한데 묶여 '리디아 에바와 민카를로'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종종 항해도 한다. 한편 Time and Tide 박물관은 야머스의 어업사뿐만 아니라 도시의 지역사까지 총망라하는[31] 향토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5.1.3.4. 다시 네덜란드와 북유럽으로
오늘날 청어 어업의 주도권은 다시 네덜란드북유럽 국가들에게 돌아왔다. 2020년대 시점에는 네덜란드가 전 세계 청어 어획량의 36% 가량을 공급하여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인 노르웨이가 24% 가량을 공급한다. 두 국가가 쌍벽이며, 3위인 미국[32] 9%를 차지한다. 그 뒤로 독일, 한국, 아이슬란드, 에스토니아라트비아가 이어진다. 한때 독보적 1위였던 영국은 고작 1~2%를 생산하여 9위이다.[33]
5.1.3.5. 주요 가공품
유럽의 주요 청어 가공품들은 다음과 같다.
브리티시 파테에 소개된 키퍼 제작 방법. 1948년, 그레이트야머스에서 촬영.

5.2. 관련 민요와 풍속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한국전라남도 서남부 도서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통 놀이인 '청어엮기놀이'는 강강술래의 일종으로, '고사리 꺾자'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원을 그리며 모여 '청어 엮자'를 자진모리중중장단으로 반복해 부르며 손을 엮은 후, '청어 풀자'라고 하며 서서히 다시 푸는 것을 반복한다. 민속학자들은 어로 작업을 무용화한, 풍어를 기원하는 생산굿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ヤーレ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にしん来たかと 鴎が騒ぐ
야렌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청어가 왔는가, 갈매기가 우는구나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의 어부들이 청어잡이 어선에서 조업 도중 잠을 쫓기 위해 부르던 민요인 '소란부시'가 유명하다. '소란, 소란' 하는 반복되는 후렴구가 특징이다. '요사코이소란마츠리'라는 축제는 삿포로의 명물이다.

And you wish you were a thoosand miles awa fae Yermouth quay.
넌 야머스 항구에서 천 마일은 먼 곳에 있고 싶구나
영국의 경우, 상술한 '피셔 걸'들이 청어 내장을 손질하며 피로를 잊기 위해 스코트어로 노동요를 부르곤 했다. Song of the Fishgutters, 일명 '생선손질노래'라고 불리는 해당 노래는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노퍽주의 그레이트야머스 일대에서 전승되어 왔다. 각 절마다 '야머스 부둣가(Yermouth quay)'로 끝난다는 것이 특징. 스코틀랜드 출신 계절노동자들인 피셔 걸들이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던 마음이 담겨 있다.

5.3. 음식

비늘이 얇지만 넓고 질긴 편이라 먹으면 소화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청어를 어획후 알만 빼서 버리는 지역에선 이걸 주워 먹은 바다표범들이 비늘 때문에 위장병에 걸려서 빼빼 말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요리를 할 경우, 얇은 비늘이라 방심하지 말고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6. 여담


[1] 청어 무리[2] 본래 과메기는 청어와 꽁치 둘 다 사용하여 만드는 것이었다. 과메기 참조.[3] 기록에서 보면 청어 떼가 너무 많아 배가 나아가질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4] 청어의 순우리말인 비웃을 음차한 것(또는 비유어가 비웃이 된 것)이다. 절인 청어는 자반비웃아라 한다.[5] 또한 전쟁 중엔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동물성단백질 섭취가 필수였을 테니, 이를 그나마 구하기 쉬운 생선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순신의 인품이 훌륭함을 어느 정도나마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해산물을 포함한 지역 특산물의 경우 지방관이 중장에 뇌물로 바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뇌물로 바치기는커녕 군사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데 썼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의 인격에 감탄하게 된다.[6] 설치식 그물. 고기떼의 예상 진행 방향에 입구를 두고 설치하여 알아서 들어가 갇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그물로 만든 어살 또는 거대한 통발이라 생각하면 된다. 형태에 따라 여러 세부 종류가 있다.[7] 갈망이라 한다.[8] 정확히 말하자면 갈물 들이기는 원래 서해안 지역에서 널리 퍼졌던 기술이다. 연평도를 비롯한 조기 어장에서 주로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참나무해당화를 달인 물을 썼다. 나일론 그물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사라졌고, 대신 갈물을 끓이던 가마인 '갈가마'라는 단어만 섬 서쪽의 몇몇 숙박업소와 식당 이름에 남아있다.# 연평도의 향토 해양사 박물관인 조기역사관에서 당시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9] 다만 서해 하층의 냉수괴에 청어 군집이 남아 있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10] 다만 한국 내 고등어의 주 생산지는 동해와 남해다. 서해로 올라오는 건 가을 한 철.[11] 맛의 달인에서는 청어-고등어-꽁치-정어리 순으로 순환이 일어난다는 설을 제시했다.[12] 이들은 청어 외에도 말린 연어, 말린 해삼, 그리고 우치우라만 일대에서 채취해 가공한 건다시마 역시 긴키로 가져왔다. 연어는 일본 내에서 소비되었고, 건해삼과 건다시마는 더 남으로 내려가 사쓰마 번류큐 왕국을 통해 중국에 팔렸다. 중국에서 진미로 치던 해삼과 약재로 쓰이던 다시마는 매우 쏠쏠한 이익을 남겼다. 사쓰마는 이 다시마 무역과 아마미 제도에서의 설탕 플랜테이션, 그리고 도자기 수출을 통해 근대화 자금을 모았다.[13] 반대로 기타마에부네가 오사카에서 마츠마에로 올라갈 때에는 마츠마에에서 나지 않는 각종 공산품과 쌀, 그리고 청어 가공에 필요한 소금을 싣고 올라갔다.[14] 오늘날의 야마구치현.[15] 특히 이와테현 일대의 산리쿠 해안이 그러했다. 산리쿠는 홋카이도에서 몰려오는 추운 고위도 저기압으로 인해 거칠기 짝이 없었으며 지진해일의 위협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주로 이와테에서 센다이로 이어지는 기타카미 강의 수운을 이용하고, 센다이에서부터 에도로 바닷길을 이용했다. 게다가 미개척지가 대부분이었던 산리쿠 해안 일대는 좋은 시장이 많지 않아, 상단 입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개발된 서일본 항로를 항해하는 것이 안전하면서도 더 수익이 좋았다.[16] 원래 일본은 조선에서 면직물을 수입했으나, 에도 시대부터 자체적인 면직물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생사의 원료가 되는 목화와 염료로 쓰인 쪽의 재배 면적이 급격하게 늘어났으나, 이로 인해 지력 악화 문제가 대두되면서 비료 제작 산업 역시 덩달아 발전한 것.[17] 현재 일본 어선들은 한국 원양어선들이 그렇듯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오호츠크에서 조업한다. 그러나 쿠릴 열도 분쟁 때문에 종종 잡음이 발생하고는 한다.[18] 출처 "이야기로 읽은 부의 세계사".[19]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스코네는 덴마크의 영토였다. 스웨덴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이다.[20] 간의 효소가 염장된 청어에 발효 과정을 일으켜 풍미를 이끌어낸다.[21] 청어의 이리는 진미로 인정받는 고급 부위다.[22] 헤이즈버러 사주 위로 더 올라가면 노포크 사주(Norfolk banks)라 불리는 일련의 해저 모래톱들이 늘어서고, 그 북쪽에 도거 뱅크가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는 해저 모래톱에 들이받고 좌초한 침몰선 역시 많다.[23] 야머스 시 자체가 야레 강 하구 사주에 생긴 도시다.[24] 물에 흐르는 그물로, 고기떼의 진행 방향을 가로막으며 친다. 그럼 고기떼는 유망을 가로지르려다 그물코에 끼어 잡히게 된다. 유자망이라고도 한다. 보통 정어리나 청어, 또는 멸치를 잡을 때 쓴다.[25] 쓰레그물이라고도 하며, 어선이 직접 끌고 다니며 해저의 생물들을 쓸어담는 방식의 그물이다. 어획량이 많지만 반대로 수중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한다는 단점이 있다. 야머스에는 19세기 초부터 도입되었다. 무동력선 시절에는 직접 선원들이 캡스턴을 돌려서 그물을 수거해야 했다.[26] 야머스는 독일과 가까워 여러 차례 공습을 받은 바 있다. 2023년에도 미처 처리되지 못한 250kg 불발탄 하나가 야레 강 바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폭탄은 영국군 폭발물 처리반이 해체하는 도중에 갑자기 폭발했는데,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27] 그레이트야머스는 노퍽과 서퍽주 일대에 걸친 '더 브로즈(The Broads)'라는 넓은 저습지의 끝자락, 그것도 강 하구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홍수에 아주 취약하다. 더 브로즈 일대는 지반 전체가 이탄과 진흙, 그리고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바다 건너 맞은편의 네덜란드처럼, 이 지역 역시 예로부터 풍차를 돌려 땅의 물기를 퍼내야 했다. 1953년의 대홍수는 이런 지형적 조건과 함께 갑자기 내습한 폭탄 저기압이 몰고 온 폭풍 때문에 발생하였다. 당시 이 폭풍은 북해 연안 전체를 초토화했다. 야머스에서만 307명이 사망했다.[28]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야머스 시내는 사람 둘이 지나가면 꽉 차는 좁은 골목길, 일명 로우(Row)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습과 홍수, 그리고 이어진 시내를 정비 때문에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로우가 이어진 옛 시내의 모습은 Time and Tide 박물관에서 재현해 놓은 전시실에서나 볼 수 있다.[29] 2023년 영화 《웡카》에서 윌리 웡카(티모시 샬라메 분)가 타고 다니는 배가 바로 리디아 에바 호다. CG나 세트장이 아니다.[30] 1880년대에 세워지고 1988년에 문을 닫은 "타워 수산(Tower Fish Curing Works)"이다. 폐업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백 년간 배어든 미세한 청어 냄새를 맡을 수 있다.[31] 선사 시대와 로마 식민지 시대도 포함한다.[32] 미국은 서쪽에서는 태평양 청어를, 동쪽에서는 대서양 청어를 모두 잡는 유일한 국가다.[33] 영국의 어업은 청어 대신 대구를 비롯한 흰살생선 조업이나 굴을 비롯한 어패류 양식업으로 변화했다. 영국인들의 입맛이 변화하여 청어를 별로 찾지 않게 된 것 역시 영향을 끼쳤다.[34] 또는 키퍼에 버터 한 조각을 얹은 후 오븐에 굽기도 한다.[35] 영어의 herring이나 표준독일어의 Hering이나 네덜란드어의 Haring이나 동일한 어원의 게르만어계 어휘다.[36] 꼬마펭귄 핑구에서 핑구가 생선을 먹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37] 산란지인 해초에 잘 붙게하기 위함이다.[38] 머리만 남은 것에 입맛 다시는 것을 본 랍비가 머리 하나당 온전한 청어 한마리 값으로 팔았다는 내용도 있다.[39] 사실 청어의 청은 푸를 청(靑)이 맞지만, 홍어의 홍은 붉을 홍(紅)이 아니라 넓을 홍(洪)이다.[40] 일단 홍어여야 홍어의 반댓말인 청어가 될 수 있으므로 아무 우파에게나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전라도 출신 우파에게만 사용한다.[41] 오래된 물고기를 먹어서 걸리는 병으로 계속 물고기를 찾게 되고 이병에 걸린상태에서 물고기를 하나라도 먹으면 미친상태로 평생을 산다.[42] 위에 쓰여 있듯 청어는 바다의 밀과도 같은 존재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부를 안겨준 물고기인데 진수식을 위해 바닷물을 들였더니 느닷없이 바다의 밀이 떠밀려 들어왔고 이를 활황의 징조라고 여긴 듯. 실제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어 중국으로 갈 만한 물량이 한국으로 쏠렸는데, 한국 조선업계의 큰 문제점이라면 낮디낮은 인건비로 인한 숙련공의 이탈과 신규 인력의 부재라는 것이다.[43] 바이오매스로 쓰려면 매우 많은 양이 잡혀야 타산이 맞는데, 그정도로 많진 않고 애매한 양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