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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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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rowcolor=#ffffff>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rowcolor=#ffffff>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
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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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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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선조
(1575 ~ 1608)
이황 정개청 이덕형 김성일 류성룡
우성전 정구 김응남 이원익 심희수
허성 윤승훈 신식 이광정 신용
정경세 이성구 이준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근기남인 (북인) 영남남인
정구 장현광 윤선도 윤휴 이현일
이하진 이수광
효종 - 숙종
(1649 ~ 1720)
윤선도 허목 민희 민점 윤휴
목내선 류형원 이서우 김덕원 민암
이의징 신경제 이운징 신필청 장희재
청남 탁남
허목 홍우원 윤휴 허적 권대운
이원정 오시수 오정창 류혁연 허견
경종 이후
(1720 ~ )
실학 (중농학파) 탁남
이익 이중환 류득공 정사효 이인좌
청남
신서 공서(벽파)
채제공 이가환 이승훈 신후담 안정복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홍낙안 목만중
세도 정치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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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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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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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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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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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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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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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9월
박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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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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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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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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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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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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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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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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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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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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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정약용
丁若鏞
파일:external/8c06a16c635a69e77b9c9e9f163d0d035be34a1659c2c434411be72af52a1273.jpg
[1]
이름 정약용 (丁若鏞)
시호 문도(文度)
아호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출생 1762년(영조 38년) 8월 5일[2]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3])
사망 1836년(헌종 2년) 4월 7일[4] (향년 73세)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본가
본관 나주 정씨[5]
학력 성균관
직업 학자, 정치인
신장 약 161cm 초과[6]
분야 실학, 철학[7], 법학[8], 유학, 의학[9]
주요 활동 집필, 연구, 발명
종교 유교(성리학) → 기독교(천주교 | 세례명: 사도 요한) → 유교(실학) → 알 수 없음 [10]
부모형제 아버지 정재원
전모[11] 의령 남씨
생모 해남 윤씨 윤소온
첫째 형 정약현[12]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동생 정약횡[13]
배우자 풍산 홍씨 홍혜완(洪惠婉) (1761∼1838)
자손 아들 정학연 (1783~1859)
아들 정학유 (1786~1855)
딸 정홍연?[14]
6대손 정해인
친인척 매부 이승훈[15]
사돈 이벽[16]
외사촌 윤지충
조카 정하상
조카 사위 황사영

1. 개요2. 생애3. 기타
3.1. 그의 이름을 딴 것들3.2. 한국 천주교와의 관계3.3. 가족
4. 가계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17]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실학자의 대표격 인물로 알려져 있다.

1762년[18]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19]에서 태어났다. 본관나주, 자는 미용(美庸) · 송보(頌甫), 초자는 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 · 삼미(三眉) · 여유당(與猶堂) · 사암(俟菴) · 자하도인(紫霞道人) · 탁옹(籜翁) · 태수(苔叟) · 문암일인(門巖逸人) · 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이 있다.

2. 생애

외가가 해남 윤씨이며 어머니는 국문학사를 공부할 때에 꼭 나오는 문인인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의 손녀이다. 부친의 관리 생활을 보고 자람으로써 백성 중에 사회적 약자들인 궁민[20]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달았다. 외가의 학문과 친가의 실천이 다산의 이론과 실천에 도움을 준 것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던 해인 1762년 8월 5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21]에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22]과 어머니 해남 윤씨[23] 사이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정약용은 매우 차분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일화로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종기가 큼직하게 났는데 눈가에 나서 또래들이 마치 눈썹같다고 그를 삼미, 말 그대로 눈썹이 3개라고 놀리듯이 불렀는데 화내지도 않고 "어 그러냐? 그래"라고 대했다고 한다. 아예 스스로를 삼미(三眉)라고 부르고 삼미집이라고 글을 쓰는 통에 놀리던 아이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1783년(정조 7) 증광 생원시에 3등 7위로 입격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익의 성호학파 중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서파에 속한다. 이는 당시 남인들의 복잡한 혼맥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익의 종손이 이가환이고[24] 이가환의 외조카가 이승훈이며 이가환의 누이의 아들이 이벽이고 이벽이 정약용의 누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관계가 된다.

성균관 유생 시절 때 성균관 우수학생들을 모아 상을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정조는 정약용을 처음 보았다. 이후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정조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았으나 최종 시험인 대과에는 계속 미끄러진다. 그것도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는 툭하면 1등을 먹는데 대과만 보면 떨어지는 것이다.

정약용의 대과 불합격이 남인인 그를 견제한 노론의 입김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는 음모론이 있는데 하필 남인 영수인 채제공이 주재한 시험에서 정약용이 합격한 사실이 음모론의 주된 근거가 된다. 물론 음모론에 대응하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사암연보의 기록을 토대로 남인 계열인 정약용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급제하면 노론의 공격을 받게될까 우려해 정조가 천천히 급제시켰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의 반응을 보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당시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였던 최태성도 이 주장에 동의하는 모양이다.[25]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갑과 2위(아원)로 급제하고[26] 등용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받고 해미유배된지 10일만에 풀려난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조가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전해주고 연구하도록 해서 이를 바탕으로 거중기와 녹로(轆轤)[27]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28] 허나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오르는데 순조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으며 훗날 정조실록을 편찬하는 편찬 위원까지 참가하게 되었고 이는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다.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29]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30]되었다.[31]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32]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 권상연은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 사이가 된다. 그런데 하필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었다.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고 이하술의 손자였으며 종친의 후손이었는데 이안묵은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들게 지냈다. 이안묵은 강진현감에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와 합작해 대혼저지기도 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다. 진짜 정약용을 괴롭힌 사람은 노론에서 악연인 서용보와 친했지만 서학 문제로 원수가 되어버린 이기경과 노론 벽파의 강경파인 이안묵이 되겠다.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유배되어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33]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정약용을 공격한 노론 벽파가 몰락했지만 당시 정국에는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에 조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를 잊어버리고 석방하지 않았다.[34] 아들들이 가끔 석방을 위해 격쟁[35]한 기록도 있고 그의 죄안을 삭제하려다가 도리어 공격당하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가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으며 현재도 시중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있다.

1818년 8월에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 정약용이 사망한 날은 다름 아닌 60주년 결혼 기념일(회혼일)이었다고. 정약용이 죽은 2년 후 15세에 약혼을 맺었던 부인 홍씨도 사망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 전인 1910년 8월 20일 조정에서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조와는 그야말로 소울메이트인데, 젋은 시절부터 술자리와 개인적인 자리까지 항상 불렀다고 한다. 정조 사후 그는 박해를 받지만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달라지는데 헌종은 안동 김씨를 밟으며 개혁을 추진하던 개혁 군주였고 김정희, 조병헌 등 유배를 가있던 개혁적 성향의 선비를 데려와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설에는 정약용이 죽은 줄 모르고 벼슬을 다시 제수하려 했으나 죽은 것을 알고 슬퍼했다는 야사가 있다.

파일:다산 정약용 묘소.jpg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다산의 묘소를 중심으로 다산 유적지가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경기도에서 건립한 실학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건너편에는 다산생태공원도 위치하고 있다.[36] 이 일대로 가는 교통 수단은 남양주 버스 58-3, 63, 58번, 양평 버스 8-8, 양평 버스 2000-1번이 있으며 직접 연계는 58번 뿐이다.[37] 강진군에 있는 유배지인 다산 초당 또한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3. 기타

이 발언은 정약용에게 일부 탈성리학적 일면이 있음만을 강조하며 조선 후기 개혁 담론의 최선봉에 세우고, 정약용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의 변화와 식자층의 담론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 해석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년 ~ 1943년》 (김상태 편역, 역사 비평사, 2001년) 613페이지


3.1. 그의 이름을 딴 것들

3.2. 한국 천주교와의 관계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신자 중 하나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례명사도 요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철신, 이총억 등 남인 계열 학자들과 함께 천진암에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토의하곤 했는데 그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였던 천진암한국 천주교의 시발점으로서 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행적에 논란거리가 있으며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X맨 같은 존재. 본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지만, 신해박해(1791년) 당시 조상의 제사를 불허하는 교황 비오 6세의 교서가 내려지자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과 함께 배교하였다. 이후 신유박해(1801년) 때는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제로 같이 국문을 받았으나,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정약용이 모르게 해야 한다', '형제가 함께 서학(천주교)을 할 수 없으니 내 죄다.' 같은 문서가 발견되면서 해당 시점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혐의가 사라진다.

오히려 정약용은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했다. 나아가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를 추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믿음이 약하고 사리 분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노비나 어린이를 중점적으로 심문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심리적 심문의 한 방법이니 천재적 발상이긴 하다. 덕분에 베이징 천주당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에 대해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분노했고,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 반면 정약용은 자진해서 자신이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자백할 정도였다. 정약용은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하나는 워낙에 신유박해가 정치적 성향이 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형인 정약종에 대해서 고변하라는 것은 거부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 행적. 과연 이후에 정약용이 배교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회개하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었음을 후회하는 글을 여럿 남겼으며, 아무도 볼 위험이 없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자찬묘지명에서조차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정약용이 끝까지 배교자로 남았다고 간주하고 있다. 반면 샤를르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주요 참고 문헌으로 작성했다고 하나 <조선복음전래사>가 실존하는 서적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달레 신부는 이 책이 박해 기간 중에 땅에 묻혀 유실되거나 가족들이 비본(秘本)으로 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고종 때 정약용 문집이 <여유당전서>로 출간되었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저서가 일제강점기에 출간되기도 했는데, 거기에 <조선복음전래사>는 없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공개된 비본 중 앞서 언급한 자찬묘지명과 신유박해 때 유배간 친지들 묘지명이 있었다.

이에 실제 <조선복음전래사>라는 책은 없고, 달레 신부가 정약용의 묘지명들을 그리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단 이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정약용이 배교 행위에 대해 참회하였으며, 수시로 몸에 고통을 가하는 보속 행위를 하였고, 죽기 전에는 마침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65]에게 병자성사를 받았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동일한 얘기가 정약용의 집안에서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기록이 없는 것은 천주교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상태니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원복했다는 기록을 남기긴 힘든 상황이기도 하고 실제로 신유박해 시기에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형된 3남 정약종 집안은 나주 정씨 문중에서 축출되었다가 1961년 원복하였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이후에 가까이 했다는 물증으로, 정약용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발굴했을 때 십자고상이 실제로 출토되었다. 현재 이 십자고상은 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즉 정약용의 장을 치르고 관에 유해를 넣을 때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이 천주교인이었으며, 그들은 정약용이 죽는 순간 천주교인이었음을 확신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정약용이 배교하여 다른 신자들을 체포하는데 적극 협력해서 천주교인들의 원수쯤으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십자가를 함께 묻어줬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당시 한 동네에 1839년 기해박해순교한 형수 유소사 세실리아와 조카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살고 있었다. 정약용의 직계 후손도 4대손부터 천주교로 분명하게 원복했고, 그 전에도 박해를 피해 대놓고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지는 않아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현재 정약용 직계 7대손인 정호영이 정철상과 정하상의 순교로 대가 끊긴 정약종의 후손까지 대표하고 있다.

단 십자고상은 가짜 성유물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종손인 정호영이 정약용의 묘는 이장이나 파묘를 한 적이 없다고 십자고상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 반면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서는 '정약용의 후손에게서 기증받았다'는 말을 제외하고 언제 이장했으며 누구에게 언제 이 유물을 받았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십자고상의 진위에 대한 논란 때문에 바티칸박물관 전시도 무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단,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도 딱히 정약용을 교회의 위인으로 밀고 있지는 않다. 정약용은 순교자도 아니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배교의 전적도 있기 때문에 시복시성 대상에는 포함될 여지가 없다.[66]

하지만 위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 철학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이 유신론에 있는지 무신론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단서라는 것이다. 물론 단적으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규정하기보다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적어도 그가 천주교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유신론에서도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과 서로 넘나들면서 학문적 장치로 활용했다는 연구도 있어 전공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정약용이 초기에는 확실히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동시에 유학자기도 했고.

현재로서는 특별한 반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1791년 신해옥사 이후로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거부했다는 것을 정설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3.3. 가족

정약용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월등하게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약용의 형제는 모두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다. 아예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

맏이인 정약현은 다른 세 동생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1795년 식년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한 어엿한 과거 합격자(정작 벼슬은 못 했다). 아버지 정재원의 상을 치를 때 마당에 누대를 짓고, 상복을 벗자 그 누대를 망하루(望荷樓)라 이름 붙이고[67] 매일 아침 올라 아버지 묘소를 바라봤다는 효자다. 자기 집을 수오재(守吾齋)라고 이름붙였는데, 정약용은 이를 떠올리며 "나는 형처럼 나를 지키지 못하고 살았다"라고 자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사람의 사위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조정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불러온 황사영이다. 황사영의 아내 정 마리아[68]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자랐다. 다만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체포되지 않고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천주교 때문에 어쨌거나 풍비박산나게 된 집안을 지키다가[69] 1821년 전염병으로 생을 마쳤다.[70] 정약현 사망 3년 전에 해배된 정약용이 묘지명을 지어줬다.

둘째인 정약전흑산도 유배 생활 중 섬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며 책 하나를 쓰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자산어보이다. 또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는 홍어상인 문순득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풍랑을 만나 일본, 필리핀까지 표류하다 흑산도까지 돌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 체험담을 날짜별로 정리한 표해록,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썼다. 이 내용은 정약용에게도 전해졌고 이에 정약용은 제자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해,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집필하게 한다.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제자를 보내면서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정약전이 목민심서의 초고를 봐주기도 하였으며 후에 정약용은 "약전 형님이 나보다 낫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정약전의 외아들이 혼인 후 자식없이 죽자 흑산도에서 맞은 첩의 아들을 양자로 올리라고 조언하는 등 모든 것을 나누었다. 하지만 정약전은 정약용의 유배가 끝나고도 유배가 풀리지 않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약용은 둘째 형인 정약전에게 학문과 정신적인 면 모두 크게 의지하였으나 나주에서 각 유배지로 헤어진 이후 임종시까지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셋째인 정약종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세례명아우구스티노. 본래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그는 형제들 중에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고, 신유박해 당시 약전, 약용과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순교 과정이 놀라운데, 설화에 따르면 처형 때 하늘을 보고 죽겠다며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첫 칼질이 잘못되어 목이 반만 잘리자 일어 앉아서 성호를 긋고 다시 칼을 받아 처형되었다고.[71] 124위 복자로 시복되어 있다.

정약종의 가족은 특히 신실한 집안이었는지 거의 몰살당했다. 차남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30년 동안 동정을 지켰지만, 1839년 기해 박해 때 순교하며 한국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됐다. 장남인 정철상도 순교자고, 약종의 후처 유조이 체칠리아[72]와 딸 정정혜 역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다. 장남 정철상도 124위 복자로 시복되었고, 시성 심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자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복동생 정약횡도 유명한 의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우애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건대 다산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자식 농사에서 역사상 보기드문 성공 사례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아들들이 모두 엄친아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막내(적자 중에서. 정약횡을 포함하면 넷째) 정약용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손자들까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니.

친인척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조 대 명재상 채제공과 정약용 형제는 사돈 어른과 사돈 총각 관계이다. 정약용이 어머니를 여읜 후 정약용 형제를 키운 서모 김씨의 큰딸이 채제공의 유일한 혈육이자 서자인 채홍근과 결혼했다. 외가쪽으로 정약용의 어머니인 윤씨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녀이다. 즉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며 해남 윤씨 가문은 정약용의 외가가 된다. 더 올라가면 윤선도가 윤두서의 증조부이므로 이쪽으로도 연결이 된다. 진산 사건윤지충 바오로 역시 정약용의 외사촌.

정약용은 6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5명은 천연두로 요절해 최종적으로는 2남 1녀가 살아남았다. 강진에서 유배하던 중 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이 유명하며 차남 정학유는 역사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농사 지침 가사'인 농가월령가를 저술했다.[73] 종손은 아니지만 차남 학유를 통해 이어지는 가계는 재원 - 약용 - 차남 학유 - 대초 - 춘섭 - 규직 - 상진 - 6대손 상진의 장남 정해인이다. 장남 정학연은 집안 살림살이를 책임지느라 아무래도 학업에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어서 정약용이 많이 혼냈다고. 정학연은 의술이 뛰어나서 의원 일도 했는데 이 부분도 아버지 정약용에게 타박을 많이 들었다.

4. 가계

아버지 정재원
전모 의령 남씨
생모 해남 윤씨 윤소온

첫째 형 정약현
황사영 알렉시오 : 정약현 사위, 황사영 백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정정혜 엘리사벳 : 정약종의 딸,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유소사 세실리아 : 정약종의 부인
정철상 바오로 : 정약종의 아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정하상 바오로 : 정약종의 아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

동생 정약횡
매부 이승훈
처남 이벽
외사촌 윤지충
조카 정하상
조카 사위 황사영

5. 대중매체에서

<영원한 제국>, <원행> 등 정조의 시대를 다룬 소설에서는 정적의 행동을 사전에 간파하는 기민한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탐정 역할로 나오지 않더라도 영민하고 다재다능하고 실학에 밝았던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드라마에서는 지혜롭고 선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1] 정약용 초상, 정약용 생전에 그려진 정약용의 초상화로 가장 유력히 꼽히나 진위여부 논란이 있다. 특히나 정약용 외모의 가장 특징적인 묘사로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개의 갈래로 나뉘어 졌다고 알려져있는데 보다시피 위 초상화 모습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 이희영이 그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초상화가 남아있어 이를 보고 일각에서는 진위여부 논란이 있는 위 초상화와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게다가 정약용이 오랜 귀양 생활로 얼굴이 많이 상했음을 감안하면-비슷한 예로 추사 김정희도 잦은 귀양생활로 말년에 얼굴이 폭삭 늙고 상해 알려진 초상화와 비교해 보면 완전 다른 사람같다.- 함부로 아니라 단정짓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1974년 고 장우성 화백이 그린 정약용 영정이 여태 표준영정으로 쓰였는데 용모나 의상 등 시대상과 고증에 맞지 않는다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2008년 3월 부터 새롭게 정약용 영정 제작에 들어가 2009년 4월 17일 완성되었다고 한다. 초상화를 제작한 김호석 교수는 정약용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고 다산 후손인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회' 도 찾아가 참석한 약 300여명 후손들의 인상을 직접 관찰하고 특히 다산의 직계 후손 4명의 인상을 자세히 관찰 그 특징을 초상화를 제작할 때 참고했다고 한다. 이 사진 파일:정약용_초상.jpg 이 초상화가 바로 김호석 교수가 새롭게 제작한 정약용 영정이다..[2] 음력 6월 16일[3] 오늘날 이곳에는 마재성지성당이 조성되어 있고, 천주교 의정부교구에서 관할하고 있다.[4] 음력 2월 22일[5]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동원공계(東園公系) 23세손 약○(若○), 의○(義○) 항렬.(족보(1)족보(2)족보(3))[6] 출처 여기서 정약용의 키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당시 남성 평균키가 161cm인 것을 보면 정약용의 키는 약 161cm 초과로 추정된다.[7] 유학자임을 표방함은 틀림없지만 주희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모든 기형(사물)의 '이'는 같다는 성리학의 중심 논리인 이일분수(월인천강)를 비판하는 등의 고학적인 태도에다가 민생을 집요하게 본질시하는 맹자적인 가치관이 더해져 정약용 본인의 색채가 짙은 철학함을 엿볼 수 있다.[8] 대표 저서인 흠흠신서는 한국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 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 사건을 심리하는 데 필요한 실무 지침서다. 그리고 법의학·사실 인정학·법 해석학을 포괄하는 일종의 종합 재판학적 저서이다.[9] 홍역의 치료에 관한 의서를 저술했을 뿐 아니라 실제 해당 질병의 의술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10] 일단 한 차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한 것은 사실이나 이후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했는가에 대해서는 계속 유교로 있었나 다시 복귀했나는 논란이 있다.[11] 아버지의 전처[12] 이복 형이다.[13] 이복 동생이다.[14] 확실하지 않다.[15] 조선 최초의 영세 가톨릭 신자[16] 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초기 한국 가톨릭의 중요한 지도자였다.[17]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中. 정약용의 편지를 모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에서도 이 내용이 나온다. 한편 이 내용은 유배 생활 중이던 자신이 쓴 편지 내용이 외부에 알려질 때 그것이 정적들에게 악용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및 지인들의 신변에 악영향을 줄 것을 근심했던 정약용의 마음을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먼 훗날 한반도의 후손들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터넷에 쓴 과거의 실언, 망언이 발견되거나 SNS 상에서 실언, 망언을 일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터지면서 이 내용은 후세에 큰 지지를 얻게 된다. 사실 자신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는데, 형 정약종의 무부무군 낙서 하나 때문에 신유박해가 터져 형제가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신앙을 버리고 유배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18] 공교롭게도 조선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인 임오화변이 있었던 그 해다.[19] 현(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20] 홀로 사는 노인, 과부, 홀아비, 고아[21] 현(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22] 생몰년도: 1730. 6. 10 ~ 1792. 4. 9[23] 생몰년도: 1728 ~ 1770. 11. 9 / 윤덕열(尹德烈, 또는 윤덕렬)의 딸이다.[24] 이익의 형 이침의 손자이다.[25] 증거가 없으니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윗선의 개입이 강하게 의심되는 부분은 성균관 안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수재가 1번도 아니고 여러 번 유독 대과에서만 떨어진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과거 합격에 가장 가까운 성균관 유생들 중에서 최상위권이 여러 번 대과에서 합격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큰 시험에 긴장해서라고 보기에는 어렵다.[26] 흔히 정약용의 천재 이미지 탓에 당연히 장원(오늘날의 수석)일 거라 많이 생각하지만 장원은 아니었다. 이 당시 과거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사람은 서영보로 당대 최고의 문장에게 제수된다는 대제학까지 지낸 인물이다. 서영보는 서청원의 6대 조상이다.[27] 거중기에 묻혔지만 현대의 크레인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발명품이었다. 성벽을 쌓기 위해 돌을 들어올리기 위한 발명품으로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거중기의 역할을 녹로가 하였다.[28] 당시 그가 지은 한시《적성촌[77]》에서는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29]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30] 유배지를 옮김.[31]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는 처음부터 강진에서 18년을 살았다고 한 오류가 존재한다.[32] 정약용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는 이유는 정조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을 서용보가 관리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당대부터 관리 간에 인정(뇌물)을 주고 받는 풍습을 비판하고 본인 스스로도 그런 것을 거부했기에 관료 사회에 밉보인 부분이 있어 정약용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줄만한 현직 관료도 없던 점도 작용했다.[33]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경세유표》를 썼으며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목민심서》와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흠흠신서》를 썼다.[34] 서용보가 극렬 반대했다는 설이 있다.[35] 왕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면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36] 남양주 일대에 들어선 신도시의 이름이 다산신도시가 된 것도 정약용의 묘가 남양주에 있기 때문이다.[37] 나머지 노선 이용시 다산 유적지 입구 로터리 하차 후 도보 이동[38] 과장이나 오역이 아니다. 자식들에게 술에 관한 조언을 해줄 때 실제로 정조가 필통에 가득 술을 하사하자 나는 오늘 죽었구나. 생각했다고 적었다고 한다. 특히 원샷을 피하라고 강조했다.[39] 애초 문관은 나귀를, 무관은 말을 타도록 꼭 정해져 있었다.[40] 개정을 4번이나 해서 판본이 5개에 이를 정도로 관심을 기울여 집필한 책이다.[41] 정약용과는 11살 차이.[42] 경술국치 9일 전인 융희 4년(1910년) 8월 20일에 내려지면서 조선 왕조의 거의 마지막 시호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 작업을 시행한 인물은 다름 아닌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이다. 당시 이완용은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인물을 신원, 복권하고 명망이 있으나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재야 인사들에게 시호를 내려주는 등의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대상 중 하나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43] 애초에 여전이라는 말이 '마을의 밭'이라는 뜻이다.[44] 목민심서를 연구하던 북한의 정치 세력인 갑산파김일성과 마찰을 빚어 숙청당했다.[45] 북한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함을 표방하고 있다.[46] 형 정약종이 천주교 때문에 처형되고 본인은 형 정약전과 같이 유배를 가게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47] 정확하게는 이익에서 이어지는 남인 계열 인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서 안정복은 공서파로 영조 대에 출사해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가르치던 세자 시강원에도 들어있었는데 정조 이전의 기록이 전무하고 60대 이후인 <순조실록>부터 기록이 나온다.[48] 사실 박지원은 노론 집안 출신이고 정약용은 남인 집안 출신이라 배경부터가 거리가 있고, 형조참의(現 법무부 기획조정실장, 1급 상당)까지 오른 정약용과 달리 박지원은 관직에 나가길 꺼려서 정치적인 접점도 없다.[49] 본부인과의 자녀 6남 3녀 중 5명을 천연두로 잃었다.[50] 원래는 크낙새와 함께 밀어줬지만 2000년대 초 크낙새가 사장되는 동안, 정약용을 더 밀어주고 있다.[51] 자 정대초(丁大楚), 손 정춘섭(丁春燮), 증손 정규직(丁奎稷), 고손 정상진(丁尙鎭), 5대손 정해인(丁海寅) 순으로 이어진다.[52] 정조를 성인으로 여기며, 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했던 사람이 정약용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책에서 규장각, 장용영, 초계 문신의 존재를 모두 비판한다. 특히 초계 문신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학문과 정치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제도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렇듯 그는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성역없이 비판했다. 경세유표는 국가 행정론,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론으로 관리가 백성을 다스릴 때 취해야 할 자세를 적었다.[53] 형조 계열의 작품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로스쿨, 경찰공무원 준비생들이 읽는 형법 및 형사소송법 교재에 해당하는 책. 형리에게 공명정대한 판결을 위해선 뭘 해야하는가에 대해 조언했다.[54]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당연하지만 옛날로서는 조금 위험하다는 발언도 있는데 옛날부터 그랬다. 맹자의 역성혁명도 관계있다.[55] 종두법에 대해 다룬 의학서다. 엄밀하게는 마과회통의 주 내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다룬 의학서이며 이 책에 부록으로 박제가와 같이 연구했던 종두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 뒤에는 자식들을 천연두로 잃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9명의 자식들(6남 3녀) 중 무려 6명(4남 2녀)을 앞세웠다. 정약용 본인부터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다가 당시 천연두 치료로 이름이 드높았던 이헌길의 치료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오른쪽 눈썹에 마마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훗날 '삼미(三眉)'라 불리었다.[56] 지리서. 한국의 역대 강역에 대한 연구서이다.[57] 국어 연구 계열 작품으로 출처가 모호하거나 와전된 언휘 200여 개를 정리한 것이다.[58]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兒)들을 위한 책이다. 천자문이 어린이들한테는 어렵다 싶어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 관련 어휘 2,000개를 상하로 나누어서 만든 어린이용 한자 단어책이다. 이후 1908년에 지석영, 전용규가 아학편의 한자를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동시에 설명한 단어책을 낸다.[59] 적성촌은 오늘날의 파주시 적성면 일원을 말한다.[60] 앞은 한강이 흐르고 뒤는 언덕이다. 남향에 배산임수, 저절로 기본 명당이 되는 지형인 데다가 묘소 앞을 지난 한강은 곧 합류 지점을 만나기에 기가 모이는 형국이다.[61] 갈망이라 한다.[62] 정확히 말하자면 갈물 들이기는 원래 서해안 지역에서 널리 퍼졌던 기술이다. 연평도를 비롯한 조기 어장에서 주로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참나무해당화를 달인 물을 썼다. 나일론 그물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사라졌고, 대신 갈물을 끓이던 가마인 '갈가마'라는 단어만 섬 서쪽의 몇몇 숙박업소와 식당 이름에 남아있다.# 연평도의 향토 해양사 박물관인 조기역사관에서 당시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63] 한편 호암관의 호암은 이병철의 호다. 호암관은 기업가였지만 인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병철 회장을 의도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면 꿰어 맞춘거고 그냥 재단 창립자 이름 딴 것이다. 그래서 성대에서 학생 운동이 고조에 이르던 시기에는 학생들이 호암관 명패를 떼버리고 현대 성균관 대학교 창립자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의 이름을 따서 심산관이라고 고쳐버린 적도 있다.[64] 아울러 같은 정조대왕급 구축함(DDG-II)의 1번함에 정조의 이름이 붙여져 정조대왕함(DDG-995)이 되었으니,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정약용도 함명으로 추가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65] 1834년 조선에 입국했다. 한국 가톨릭에서 활동한 2번째 외국인 사제. 프랑스인 모방 나 베드로 신부 등이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출국했다.[66] 한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신유박해 당시 순교했지만 한 차례 배교했던 전적 때문에 천주의 종 단계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 정약용은 그 기준에 한참 미달함을 알 수 있다.[67] 정재원의 묘가 하담(荷潭)에 있으니, 하담을 바라본다는 뜻이다.[68] '정명련'이라고도 하고, '정난주'라고도 한다.[69] 구전되는 말로는 정약종의 시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싣고 강을 건너오던 배를 강가에서 막아섰다고 한다.[70] 천주교를 받아들여 화를 당한 딸들과는 달리 아들들인 정학수와 정학순은 아버지 뜻에 따라 천주교를 반대하여 처벌받지 않았다. 이중 장남 정학수는 20세 나이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71] 출처 잡지경향 1999년 3월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순교를 소재로 만들어진 생활성가도 있다.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조선시대 사형 자체가 저런 식으로 사형수가 움직일 수 없다. 참수형 참조.[72] 한국 천주교에서는 유소사 체칠리아로 부른다. 召史의 훈음과 독음의 차이.[73] 다만 정약용과는 달리 술을 좋아해서 정약용이 편지로 "술 좀 그만 좋아해라!" 라며 타박할 정도였다.[74] 이때 고종에 대해서는 군대의 봉급을 1년넘게 밀린것에 사람의 자격도 없다며, 아예 일본이 먹기 좋게 나라를 망쳤다고 평했다.[75] 대부분 정약용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낸 유배로 묘사된다. 유배지에서 일찍 불러들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76] 같은 천주교 신자인 이가환, 이승훈, 셋째 형인 정약종은 효수당했는데, 정약전과 정약용은 백성들의 보는 눈이 많으니 죽이진 않고 귀양을 보냈다고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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