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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27:35

강상죄

1. 개요2. 상세3. 현대4. 해외

1. 개요



조선 왕조 시기에 존재한 범죄로, 강상(綱常)의 윤리를 범한 죄를 뜻한다. 여기서 강상은 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 오상(三綱五常)을 뜻한다.

2. 상세

고려 시대의 불효죄에서 적용 범위는 넓히고 범죄가 성립하는 행동의 범위는 축소하고 처벌은 강화한 것이다. 즉, 불효죄가 부모에 대한 모든 불효 행위를 포괄했다면 강상죄는 악질적인 패륜으로 그 범위를 한정한 것이다.

이 죄목에서 말하는 강상, 즉 삼강오상은 부자(父子), 군신(), 부부, 형제, 친구 간의 윤리를 뜻하며 현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다. 다만 아무거나 다 적용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신분제 상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살해 혹은 폭행치사하는 등의 가장 극단적인 하극상에만 강상죄를 적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가령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노비가 그 주인을 폭행하고 살해 및 모욕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 유명한 어우동도 강상죄로 사형[1]당했으며[2] 강상죄로 능지형을 당한 실제 사례로 태종 대에 집안어른들이 모두 죽고 10대 후반의 자매 셋만 집주인으로 남은 집에서 사실상의 집사 역할을 하게 된 노비가 이 소녀가장들에게 좋은 데로 이사가자고 강압하여 이사를 간 뒤 이사를 간 거기서 집주인을 겁탈했다가 적발되어 강상죄로 능지형 당한 사례가 있다.[3] 다만 이 경우 조선에서는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 정상참작 사유가 없는 살인범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사형이었기 때문에 강상죄는 어디까지나 가중사유로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4]

조선 이전에도 강상죄는 있었지만 불효죄, 즉 패륜을 범한 죄가 아니면 나머지는 별도의 죄로 논하지 않고 재판을 거쳐 개별적으로 양형을 정했던 반면 조선에서는 별도의 죄를 규정한 것이 다르다.

당시 조선은 사람 간의 도덕과 윤리를 매우 강조하였으므로 강상죄는 해당 범인이 명백한 정신질환이나[5] 부모 혹은 상급자의 책임이 엄청나게 큰 점 등의 정상 참작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반역죄 수준으로 매우 무겁게 처벌했다. 범인은 대부분 사형에 처했고 그 가족들은 변방으로 쫓아냈으며 간혹 죄질이 나쁘다 싶으면 노비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범인이 살던 가옥은 허문 다음 그 자리에 연못을 만들어 버리며(파가저택, 破家瀦宅) 해당 고을의 수령은 백성들을 교화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고[6] 때로는 수령도 따로 압송하여 그 죄를 물어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범인이 살던 고을의 행정구역을 한 단계 강등시키기도 했다. 1653년에 평안도에 속한 영변부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일이 일어나 노비를 처벌하고 부사 이영발을 파직시키면서 영변부를 현으로 강등시킨 사례가 실제로 있다. 이는 반역향으로 지정하는 수준으로, 역모를 꾸민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급과 유사한 수준의 처벌이었다. 다만 그만큼 무거운 범죄였기 때문에 역으로 보면 어지간한 하극상은 강상죄를 적용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가문에서 강상죄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구성원을 도모지로 처형하기도 하였는데 국가가 움직이기 전에 조용히 처결하는 것이 그나마 가문에 미치는 여파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이게 꼭 강상죄에 해당하는 잘못만 처결한 건 아니었으며 원칙적으로는 불법이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3. 현대

현대 형법에서 강상죄에 직접 해당하는 포괄적인 죄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중처벌되는 범죄는 있으나 이것은 유교적, 국가적 규범인 강상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역적죄에 해당하는 현대적 범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7]

주로 친족관계에 근거한 가중처벌 조항(존속살해[8])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감안한 가중처벌 조항(외국원수폭행등죄)은 존재하며 명시적 조항이 없더라도 가중처벌되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 법원의 양형기준에 따르면 같은 죄가 유죄인정이 되더라도 가중-감경으로 받을 수 있는 차이는 유기징역의 경우 대충 3배까지 차이가 난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선고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범죄태양이라도 죄질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구체적 타당성을 위해 필요하다.

4. 해외


[1] 여종과 사이좋게 교수형.[2] 태강수 이동에게 소박 당하고 나서(이것 때문에 이동도 재결합할 때까지 왕족 증명서를 빼앗기는 처벌을 받았다) 어우동 자신이 수많은 남자들을 유혹하여 간통을 저질렀기 때문에 어우동은 대명률에 적힌 바에 의하면 간통죄가 적용되어 곤장 90대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신들이 간통죄를 적용하자고 했으나 성종이 강상죄로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결국 여종과 같이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상대 남자들은 전부 곤장을 맞고 유배갔다가 후에 복권되었으나 안 좋은 소문은 이미 다 퍼졌기 때문에 사직한 사람이 많았다.[3]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2월 27일 무술 2번째기사 참조.[4] 저 시절엔 사형이라고 다 똑같지 않아서 (사약) - 교수형 - 참수형 - 능지처참 순으로 사형수의 명예를 더럽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사약이 명예를 제일 지켜주는 것).[5] 당시 기준으로도 이상하다는 게 딱 보이던 조현병 같은 경우.[6] 여기까지 간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진산 사건.[7] 내란죄 등은 엄연히 근본 이념이 다르다.[8] 사실 폐지주장이 많다.[9]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를 신고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본인이 아버지에 의해 쫓겨나게 되자 계모, 친오빠, 이복 남동생, 본인의 연인을 포함한 하인 2명과 공모해 아버지를 살해한 뒤 사고사로 위장했다. 결국 살해 사실이 밝혀져 사형에 처해졌는데 당시 로마 시민들은 베아트리체의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항의했지만 교황은 "이유가 무엇이든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패륜"이라며 끝내 사형 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이후 로마 시민들은 베아트리체를 동정하였는지 귀족 계급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산탄젤로 다리에는 베아트리체가 죽은 날마다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든 그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괴담도 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