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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 손응구(孫應九)[1] |
이명 | 손규동(孫奎東)·이상헌(李祥憲) |
호 | 소소거사(笑笑居士) |
도호 | 의암(義菴) |
본관 | 밀양 손씨[2] |
출생 | 1861년 4월 8일 |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 385-2)[3] | |
사망 | 1922년 5월 19일 (향년 61세) |
경기도 경성부 숭인동 상춘원(常春園)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 |
직업 | 독립운동가 |
종교 | 천도교 |
가족 | 아버지 손두흥(孫斗興), 어머니 경주 최씨[4] 형 손병곤(孫秉坤), 첫째 남동생 손병흠(孫秉欽) 둘째 남동생 손병권(孫秉權)[5], 여동생 손조이(孫召史)[6] 첫째 부인 현풍 곽씨, 둘째 부인 홍응화 셋째 부인 주옥경[7][8] 슬하 딸 5명[9], 조카 손천민(孫天民)[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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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1919년의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한명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에서 청주목 아전인 아버지 손두흥(孫斗興)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경주 최씨 최정성(崔正成)의 딸 소생이었으므로 서자였다. 가난과 주위의 냉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면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다. 1877년[11] 괴산군에서는 배짱 좋게 수신사를 때렸는데 이유는 수신사가 하인을 학대한다는 것이었다.[12] 1882년 동학에 입도한 후 양아치 짓은 그만두고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성실하게 수도하다가 이윽고 충주를 근거지로 한 충의포 도소의 대접주에까지 올라간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제2차 봉기에 북접의 총 지휘자로 활동하면서[13] 남접의 전봉준이 이끈 호남 창의군과 공동 작전을 벌여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하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후 손병희는 최시형 등 살아남은 북접 간부들과 원산으로 피신해서 숨어지내는 신세가 된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붙잡혀서 처형당한 후 동학 북접의 도통을 이어받았는데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이 때 도쿄에서 당시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역관 오세창과 교류하면서 기존의 존왕양이 사상을 버리고 개화론자로 전향한다. 본래는 청나라로 망명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재정착한 후 유학생을 유치하고자 조선과 일본을 왔다갔다 했는데 이 때 사용하던 가명이 이상헌(李祥憲)이다.
망명 시절 신분을 숨기고 충주 출신의 조선인 부호로 행세하던 손병희는 정치 활동에도 적극으로 나서서 이 시기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구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익혔다. 이 때 이용구는 손병희의 명령으로 국내에 돌아와 1904년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단발령 등 급진 개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돕는 등 손병희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진보회가 동학이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정부에게 탄압당할 위기에 처한 때 이용구에게 친일파였던 송병준이 접근하여 자신들의 어용 조직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합치면 일제의 힘으로 탄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유령 조직이나 다름없던 초기 일진회에 진보회가 합쳐지면서 회장 자리를 얻은 이용구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불과했던 <한일합방론>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합방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손병희는 이용구의 변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이용구와 갈등을 빚게 되고 정교 분리를 내세워 동학에서 일진회 세력을 모조리 처내고 조직을 분리한다. 이후 출교당한 친일성향의 일진회는 이용구를 교주로 하는 시천교를 세우게 되고 손병희가 이끌고 있는 원조 동학은 1906년 손병희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로 개칭한다.
1908년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하는 열쇠라고 판단해 1910년 보성전문학교, 1911년 동덕여자의숙 등 본격적으로 애국지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립 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선다.
이후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회의에 참석해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고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임종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3. 기타
- 손병희는 대한제국 민간인으로서 1905년 최초로 본인 소유의 자동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애마가 심지어 캐딜락이었다. 참고로 이 캐딜락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의 캐딜락과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14] 후술할 소문에 비추어볼 때, 천도교 자금으로 꽤나 호화롭게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캐딜락에 관한 일화가 또 있는데, 운전석하고 유리벽으로 분리가 되어있는 리무진 버전[15]이어서 수행기사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한 별도의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 손병희의 일화 운운 나온 것은 일제 당국에서 퍼뜨린 소문이 꽤 많다. 계간 '역사비평'에서 3.1 운동 당시 일제 당국의 발표나 분석을 따로 연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공식 발표나 기관지에서 자주 다루었던 기사가 요승 손병희의 엽색 행각이나 손병희와 기독교 선교사들 간의 밀착류였다. 전자야 당연히 흑색선전 목적이 짙었고 후자는 3.1 운동의 배후 세력을 기독교계 반일 인사들로 초기에는 봤다는 이야기인데 당대 현장 증인인 윤치호가 3.1 운동에 쓴 일기에 "사이비 교주 손병희가 순진한 사람들 재산 털어먹으려고 독립운동한다고 나서는구나!"라고 쓴 걸 보면 일제가 퍼트린 흑색선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당시에는 유인석 안중근의 경우처럼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동학을 토비나 화적떼처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 신복룡 교수가 일제의 이런 자료를 분석하고 여러 후일담을 넣어서 어느 신문에서 "3.1 운동은 기생집에서?"라는 기사를 올렸다. 주제는 민족 대표 33인은 진정한 민족 대표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이러한 손병희의 행각과 민족 대표의 전원 변절설[16]을 들어 비판한다는 점. 문제는 그 신문에서 삽화를 기생이 민족 대표에게 서빙하는 장면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천도교 쪽과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반박해서 사과하기는 했으나 단행본에서는 사과하지 않고 있다.
- 한때 방송에서 민족 대표 33인을 희화화한 인터넷 강사 설민석과 유족회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설민석은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를 하였으나, 유족회는 설민석의 방송 출연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벌어진 재판에서 재판부는 "새롭게 건설한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까지 추서 또는 수여받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언사이지 필요 이상으로 경멸, 비하 내지 조롱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평의 범위를 일탈해 그 후손들이 선조에게 품고 있는 합당한 경외와 추모의 감정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설 강사에게 손씨 아들에게는 200만 원, 손자에게 150만 원, 증손자에게 100만 원, 현손자에게 50만 원, 그 밖의 민족대표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1인당 25~100만 원으로 해서 총 1,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출처 링크 자세한 내용은 설민석/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조.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서관 앞에는 고려대학교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민족교육의 내실을 기르게 해 준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흉상이 놓여 있다.
- 개요에 언급되었다시피 소파 방정환의 장인이기도 했다.[17] 그런데 혼인 당시 방정환의 마른 체형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그에게 기름진 음식들을 많이 대접하는 바람에 방정환이 비만 체형이 되게 만들기도 했다.
4. 대중매체에서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김호영이 연기했다. '33회 - 이기붕과 자유당' 편에서 보성중학교 교주 시절 모습으로 잠깐 등장했다. 소년 이기붕(김진만 분)이 보성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갈 때 키가 작다고 제외당했고[18] 이에 이기붕이 교무실로 찾아가서 "작은 고추가 더 맵다"며 참석 의지를 드러내자 "그래, 사람은 항상 자신을 갖고 살아야지"라며 허락한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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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 유관순 | 안창호 | 방정환 | |
김두한 | 이상 | 이중섭 | ||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 ||||
민족대표 33인 | 김좌진 | |||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 ||||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 |
[1] 자 또한 응구(應九)였다.[2] 국자진사공파 역승공계 44세 병(秉) 항렬.족보명 손상현(孫祥鉉).[3] 현재도 이 지번에 청주손병희생가가 남아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4] 최정성(崔正成)의 딸이다.[5] 큰아버지 손두성(孫斗星)에 입양되었다.[6] 손소사(孫召史)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인 조이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이후 손시화(孫時嬅)로 개명했으며,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과 혼인하였다.[7] 주병규(朱炳圭)의 딸이다. 명월관 기생이었다. 1914년 손병희와 결혼하였다.[8] 1894년 ~ 1982년 (향년 88세)[9] 그중 셋째 딸 손용화(1901~1992)는 독립유공자 방정환과 혼인하였다.[10] 형 손병곤의 장남이다. 손병희보다 4살 연상이었다.[11] 천도교 측에서 1877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수신사 파견 연도를 보면 1876년이 맞는 듯.[12] <계몽사 위인전>에는 수신사가 하인의 머리를 말총에 묶어 끌고 다니다 이를 목격한 손병희에게 맞았다고 한다.[13] 이 시기 북접의 성향은 남접과 판이했다. 초기 북접과 남접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북접의 거병 이유를 남접군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 초기의 활약은 남접에서 다 했으며 북접과 같이 활동한 시기는 오히려 쇠퇴기이다. 자세한 것은 동학 농민 혁명 항목 참조.[14] 이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어차(등록문화재 제319호)가 원래는 손병희의 차였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5] 21세기 현재에도 최고급 리무진은 운전석과 유리벽으로 분리되어 있다.[16] 민족 대표들이 전부 변절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민족대표 33인 문서 참고.[17] 손병희의 삼녀 손용화가 방정환과 혼인했다.[18] 서울에서 대구까지만 기차를 탔고 대구에서 경주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두 도시의 거리는 200리, 현재 단위로 무려 80km 가까이 되는 먼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