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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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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한석봉
韓石峯
파일:attachment/hanseokbong.png석봉 천자문의 일부[1]
본명 한호(韓濩)
경홍(景洪)
석봉(石峯)·청사(淸沙)
본관 청주 한씨[2]
출생 1543년[3]
조선 경기도 개성부
(現 북한 개성시)
사망 1605년[4] (향년 62세)
조선 경기도 가평군
(現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
부모 부친 - 한언공(韓彦恭, 1524 ~ 1546)
모친 - 홍주 백씨(洪州 白氏, ? ~ 1575) 백옥근(白玉根)의 딸
형제자매 형 - 한부(韓溥, 1539 ~ ?)
남동생 - 한제(韓濟, 1547 ~ 1635)
한택(韓澤), 한연(韓演)
부인 강릉 최씨(江陵 崔氏, ? ~ 1633) 최담(崔湛)의 딸
자녀 장남 - 한민정(韓敏政, 1567 ~ 1637)
장녀 - 임정민(林廷敏)의 처

1. 개요2. 일화3. 벼슬살이4. 평가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한석봉(韓石峯)은 조선서예가이다. 본명은 한호(韓濩)지만 호인 석봉이 더 유명한 탓에 현대에는 한석봉이라고 불린다.

본관은 청주, 자는 경홍(景洪). 호가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조선 서예계에서 추사 김정희와 함께 가장 유명한 서예가. 다만 둘은 분야가 조금 달라 김정희는 동시대 박지원이나 정약용만큼 다방면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고, 한석봉은 서예 하나에 치중되어있다. 물론 그 면에서는 당대에 가장 뛰어나 이후 그의 글씨체가 정석이 되었다.

조부 한세관(韓世寬)은 중종조 정국원종공신이고 증조부 한순손(韓順孫)은 무과에 급제해 백령도첨사를 지냈다.

2. 일화

그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모두 19세기말 이원명(李源命)이 지은 야담집인 동야휘집(東野彙輯)이 출처다.

우선 어둠 속에서도 고른 두께로 을 썰었던 그의 어머니와 펼친 세기의 대결이 있다. 어머니의 성함은 백인당.
한석봉의 어머니는 떡장수를 해서 한석봉을 글씨 공부를 10년간 시킨다. 출가하여 공부하던 석봉은 3년 만에 모친이 보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모친은 호롱불을 끄고[5] 자신은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게 한다. 다시 불을 켜 보니 모친의 떡은 보기 좋게 썰려 있었는 반면 석봉의 글씨는 엉망진창 꾸불꾸불 지렁이 글씨 그 자체였다. 모친은 석봉을 엄하게 질책하고 다시 산으로 보냈다. 결국 석봉은 남은 7년을 채워 문자 그대로 10년 공부를 해서 조선의 명필이 되었다.

용 이야기도 있다.
석봉은 박연폭포 아래에서 글씨 공부를 했다. 10년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박연폭포의 바위에 글씨를 썼다. 마침 박연폭포 연못에는 이무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여의주를 얻어 승천할 즈음이었다. 그러나 석봉의 글씨 쓰는 먹물 때문에 승천하지 못했다. 이무기는 할 수 없이 석봉에게 하루 동안만 글을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석봉이 거절하자 붓에 조화를 부려 신필이 되게 해준 후 용이 되어 승천했다. 하산한 석봉은 그 붓으로 신필이 되었다.

또 기름 장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한석봉이 길을 가는데 누각에 사는 기름 장수에게 기름 사러 온 꼬마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름 장수가 "꼬마야, 호리병을 내려놓으렴."이라고 하고는 보지도 않고 전혀 흘림 없이 손으로 기름을 부어서 호리병에 넣고, 꼬마가 던진 엽전도 손으로 받았다. 이를 보고 한석봉은 "아 아직 멀었구나."라고 몇 년간 더 정진한 뒤 다시 그때 누각을 지났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꼬마가 다시 누각에 사는 기름 장수에게 기름을 사러왔다. 한석봉은 '이번에도 호리병을 내려놓으라 하고 손으로 붓겠지'. 생각했지만, 기름장수는 호리병 입구 위에 엽전을 올려두고 로 기름을 부었다. 엽전도 발로 받고.

그 후 다시 그곳을 찾으니 누각은 흔적도 없었다는 야사.

야사 중에는 개성의 문인인 차천로와 '드림팀'을 짜서 중국 사신을 역관광시킨 이야기도 있다.
중국에서 문사로 유명한 주지번이 사신으로 와서 함께 글을 써보며 연회를 즐기는데, 주지번이 오언율시의 백운, 그러니까 글자 100개로 쓴 글을 보여주고 이 글자로 운을 맞춰서 하룻밤 안에 시를 써 보라고 말했다. 당시 사신을 맞이하던 관료들도 혼자서는 하룻밤 안에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고, 여러 명이 나눠서 쓰자니 글의 앞뒤가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우려했다. 결국 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차천로밖에 없다고 하여 그가 쓰기로 했는데, 이때 차천로가 내건 조건이 있었다.

1. 술 한 동이
2. 글을 쓸 병풍
3. 한석봉이 글을 쓸 것

이를 준비하자 차천로는 술 한 동이를 마시면서 시를 즉석에서 읊고 이를 한석봉이 일필휘지로 받아 적었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니 차천로는 술을 다 비워 고주망태가 돼 곯아떨어졌고, 한석봉은 하얗게 불태운 채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다음 날 주지번이 글을 받아서 읽어보는데 글에 감탄한 나머지 쥐고 있던 부채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한석봉이 지방 출장을 가는 도중 가난한 집 최진사 댁에서 갈때 한번 올때 한번 두번 투숙 한적이 있었다.

최진사는 석봉 한테 보리밥에 된장 뿐인 저녁을 대접하고 아침에는 본인과 아내는 굶고 석봉 한테만 밥을 대접하였다.

이를 눈치챈 석봉은 크게 감명 받아 가는날 하나 오는날 하나 글씨를 남겨 주었는데 몇달 후 한양(수도권)의 친구들이 최진사 집에 방문하여 한석봉 친필을 발견하고 '한양의 내로라 하는 양반 부자들도 구하기 어려운 한석봉 친필을 자네가 어찌 2장이나 가졌는가?' 라면서 경악하였다.

그러자 최 진사는 그간의 일화를 얘기하였고 친구들은 자네의 정성에 감탄한 한석봉 나으리 께서 큰 선물을 주셨다며 감탄 하였다.

그래서 최 진사는 한장은 무려 가보로 보관하고 나머지 한장은 한양의 부자 한테 큰돈을 받고 팔아 살림 살이가 부유하여 졌다고 한다.

3. 벼슬살이

글씨로 얻은 이름값에 비해 벼슬아치로서는 그리 잘 나간 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글씨 잘 썼기 때문이다.

명종 22년&선조 즉위년(1567년) 식년 진사시에 3등 32위로 입격했다.# 물론 조선시대의 과거 문과 시험에 정식으로 합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 평범한 양반의 입장에서는 이것만 해도 대단한 성취였다. 진사시만 합격해도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공부에 재능이 없었던 양반들 중에서는 평생 공부의 목표가 진사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합격 후 사자관(寫字官: 공문서의 글씨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하급 관리)에 머물렀다. 선조가 한석봉의 글씨 솜씨를 아껴 별제라는 관직을 제수했지만 대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참으로 야멸차게 까였다.

예컨대 사헌부에서
와서별제(瓦署別提) 한호(韓護)는 용심(用心)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吏胥: 이방)와 같아,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들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시키소서.
라는 상소를 올리는데 다만 당시엔 딱히 흠잡을곳이 드러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개 자세한 비위 사실이나 능력 부족을 지적하기보다는 인신공격에 머물렀다.

서예 솜씨만은 명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나 임진왜란중국 관리를 접대하는 데 동원되어 한석봉이 책 하나 필사해 주었다. 그 공로로 왜란 후 선조가 재위 33년(1599)에 경기도 가평군수로 보냈지만, 글 쓰는 것과 지방 행정은 엄연히 다른 데다 왜란 직후 피폐한 형편까지 겹쳐 가평을 말아먹은 죄로 탄핵되어 강원도 통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비슷한 예로 김홍도도 그림만 그리다가 연풍[6]현감을 맡고 대차게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삐딱선을 타서 임진왜란 공신의 교서와 녹권을 개판으로 휘갈기다가 1604년에 파직당한 뒤 이듬해인 1605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애초에 가평에 보낸 것도 산 좋고 물 맑고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서 글이나 쓰며 지내다 문서 작성할 일 있으면 퀵 타고 달려오라는 것이었는데, 가뜩이나 잔읍(슬럼화된 고을) 상태이던 곳을 더 말아먹었으니 예전부터 뭔가 실수 안 하나 살펴보던 사헌부에서 벼르고 있다가 득달같이 몰아친 것. 먼 미래까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대단한 서예가였으나 관료로서는 능력은 형편없었다.[7]

4. 평가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은 한호를 가리켜 "왕희지안진경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했을 만큼 호평했고, 당대에는 한호 이전 송설체의 대가 안평대군과 맞먹는다는 평가 또한 있었다. 안평대군, 한호 외에 성종~중종 대의 문신 신자건(愼自健)을 더해 '조선 시대 송설체 3대가'로 꼽히기도 한다. 반면 김생, 탄연(坦然), 최우(무신정권의 집권자), 유신 등 신품4현(神品四賢)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긴 했다.

송도삼절(松都三絶)[8]로 손꼽혔던 간이당(簡易堂) 최립(崔笠)과는 이종 육촌 관계이다. 최립의 문집 《간이집》에는 최립이 한호의 서첩(書帖)에 써준 서문( <한경홍서첩서韓景洪書帖序>)가 있다.

최립의 고조인 최로는 최윤덕의 큰 동생 최윤복(崔潤福)의 손자로 통천 최씨 세보에 의하면 최로는 최립의 고조부가 아니라 5대조로 1대 차이가 있다. 최로가 세조 때 글씨를 잘 써서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에 상호군(上護軍)의 관직에 해당하는 녹식을 받았고 계유정난 때 사망하였으며 단종의 능인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족조(族祖) 직강공 최영(崔永) 부자와 아버지 최자양이 과거 시험장에서 글씨가 뛰어나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한국어 위키의 '최립' 항목에는 최영이 증조부로 나왔지만, 최립은 <한경홍서첩서>에서 분명히 족조(族祖)라고 적었다. '족조'는 저자 본인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자 본인 '집안의 할아버지', 더 정확히는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촌수인 할아버지를 의미한다.[9]

최립이 한호의 서첩(書帖)에 써준 서문(<한경홍서첩서韓景洪書帖序>)에는 한석봉이 직강공의 외손자로 외가의 필체를 이어받은 것 같다.'는 집안 자랑이 있다. 뒤에는 대놓고 아예 '한호가 유학자 집안이긴 한데 명필은 없었음.'이라고 적었다. 집안 자랑 겸 한씨 디스 나름 한호의 서체의 원류가 무엇인가를 참조하는 중요한 서술이긴 한데, 문제는 최립이 지목한 최로, 최영 부자, 최자양의 글씨가 남아있질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

한국어 위키 '최로' 항목에는 최영의 아들은 최담(崔湛)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것은 이정구(李廷龜)가 쓴 한호의 묘갈명에 '최담의 딸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을 참고한 듯한데, 정작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쓴 《간이집》 해제(한국고전종합DB 해제 참조)에는 최영과 최담의 항렬 관계는 알 수 없다 설명했다. 통천 최씨 세보를 직접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한석봉이 정교한 글씨체로 조선의 사자관체를 확립했지만 예술적인 면에서는 좀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다.

선조는 "비록 액자(額字)[10]에는 능하지만, 초서예서는 특장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한석봉을 총애하던 선조 자신도 당대의 명필로 유명해서 명나라 관리들이 선조가 쓴 해서나 초서 글씨를 좀 얻어 갔다.[11] 이는 중국의 유명한 문인 왕세정이 한석봉의 글씨를 극찬한 것을 이항복에게 듣고 난 이후의 반응인데, 한석봉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 필법을 가지고 극찬을 했다고 하니 진실되지 못한 칭찬이라 의심한 것.[12] 또한 글씨가 부족하다고 깠다기보다 가장 큰 장점이 아니라고 했으니 뉘앙스도 다르다. 실제로 선조는 한석봉의 글씨를 매우 아꼈다.

김정희는 "글씨를 워낙 많이 써 그 공력이 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정도지만 동기창에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평했다. 김정희는 동기창의 작품에 깊이 심취한 사람이었으니 이 말도 가려서 들을 일이다. 동기창은 명의 관리로 예술적 재능이 걸출해서 시서화(詩書畫)에 통달했으나, 전형적인 탐관오리로 사후에 백성들이 그 집을 태우고 가산을 적몰했다.

사실 이쪽 업계에서는 쓴 사람의 인물평도 나름대로 하나의 평가 요소이다. 특히 가격 형성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안중근의 글씨는 높이 쳐 주고 거래도 함부로 할 수 없으나 이완용은 글씨 잘 쓴다고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래서 동기창도 사실은 호불호가 매우 많이 갈리는 서예가. 행정을 말아먹은 것으로만 따지면 이완용과 비슷한 작자로 볼수도 있지만 인성으로는 그나마 이완용보단 나은데다 서예 실력이 국보급따위로는 표현 불가능한 급으로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 취급이라도 받는 것.

게다가 석봉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는 지나칠 정도로 '정석'이기 때문에 찍어낸 듯한 활자체 같다는 것도 문제다. 개성이 없어 '재미가 없다.'는 것이 중평이며, 오랜 사자관 생활로 인해서 공문서에 특화된 서체라 예술적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다.

그러나 '정석'이라는 이유로 평가가 떨어지는 건, 어디까지나 타자로 누구나 쉽게 '정석'적인 글씨를 쓸 수 있는 현대에서나 가능한 평가이다. 즉 활자체의 희소성이 떨어지니까 한석봉 글씨체의 감흥도 낮아진 것일 뿐이다.[13]

손글씨가 당연하던 시대에는 정석적이고 반듯한 글을 즉석에서 슥슥 써내려가는 한석봉의 재주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날엔 손글씨가 '감수성'의 영역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공문서를 비롯한 온갖 영역에서 '실무'의 영역이었고, 당연히 가독성이 좋고 정석적인 한석봉의 글씨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또한 한석봉의 글씨체가 그만큼 '정석'에 가까운 만큼 한석봉의 글씨체는 이후 국가 문서의 표준 서체를 확립했고, 컴퓨터나 교과서에서 쓰이는 현대 서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한석봉이 정석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너무 잘 써서 정석이 된 거다. 서예를 배웠던 사람은 알겠지만, 활자체같이 쓰기도 참 어렵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이 느껴지게 하는 특유의 강건한 서체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한자 서체이다. 한글과컴퓨터에서 출시한 문서 편집 프로그램 시리즈들의 한문 서체로도 익숙할 것이다.#

5. 대중매체

1990년대 진공청소기[14] 광고에서는 어머니가 청소를 하니 글을 써야 하는데 청소기 안으로 휘말려 들어가 버렸다.

KT올레 광고에 등장했다. 올레 버전의 한석봉은 어두운데도 떡을 세 줄이나 자르는 실력을 보여줘 서예가가 아닌 떡집을 개업한다는 내용.

불멸의 이순신에서 술집 주인이 술값을 요구하자 글씨를 써서 획 던져 주고 가는 장면이 있다는 소리도…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미다스의 손. 여기서는 짓궂은 성격이지만 일단 류성룡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나온다. 배우는 박동빈. 야인시대에서 독사 역을 맡았다.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명곡 '석봉아'는 가사의 화자가 석봉의 어머니다. 후렴에 연달아 '석봉아'를 후크송처럼 반복하는데 붕가붕가 레코드의 자체 인터뷰 글에서는 조까를로스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조가락로'라는 인물과 석봉의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에 근거해 옛 친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했다.

앨범 발매 공연에서는 김간지가 폭풍 랩 뒤에 완벽한 궁서체!라며 두루마리를 펼치는 장면도 있었다. 그때의 랩 가사는(앨범에 들지는 않았다.) '붕가붕가 레코드의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에 기록되어 있다.

웹툰 트라우마 290화에서도 등장했는데 상술한 한석봉의 낙하산 과정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나왔다. #

시키면 한다! 약간 위험한 방송에서도 한석봉과 어머니를 직접 따라 해봤는데, 결과는 양쪽 다 좋지 않았다. 해본 결과 한석봉은 글씨가 삐뚤어지고, 어머니의 가래떡도 썰다 말듯이 이상해졌다.

근육조선 2부에서 등장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능력이 없음이 고증되었고 그때문에 글을 잘 지으나 음주가 과한 정철과 콤비로 묶여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백과사전을 쓰는 일을 맡는다.

그 외에, 90년대 옛날 개그 중 '한석봉 어머니 시리즈'가 존재했다. 주 패턴은 글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석봉에게 어머니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 예를 들어 석봉에게 "너는 이제 한석봉이 아니라 이석봉이다."콩드립의 원조라고 한다든가,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물을 끓여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나는 떡을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까지 나왔다...


[1] 천자문의 맨 마지막 구절인 위어조자 언재호야( , “어조사라 일컫는 것은 '언ㆍ재ㆍ호ㆍ야'이다.”) 부분이다.[2] 등제공파(登第公派) 19세 水변 항렬. 융경1년정묘사마방목(隆慶元年丁卯司馬榜目)에는 본관이 삼화(三和)로 등재돼 있다.[3] 중종 38년[4] 선조 38년[5] 판본에 따라서는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불이 꺼져서 어두컴컴해지자 석봉이 다시 불을 키려고 하자 하지 말라며 이대로 각각 떡썰기와 글쓰기를 하자는 제안을 한다.[6]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7] 재미있는 점은, 현재 가평군은 한석봉이 군수 재직 시절 남겨놓았던 글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의 이름을 딴 관광지도 만드는 등 매우 잘써먹고 있다는 것. 행정을 말아먹고 쫓겨났던 군수가 400년 뒤에는 도시 발전에 도움이 되고있는 셈.[8] 해당 송도삼절은 흔히 황진이가 포함되는 삼절(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가 아닌 김만중이 분류한 것으로 차천로(시), 한호(글씨), 최립(문장)을 묶는 표현이다.[9] 실제로 한국어 위키 '최로' 항목에는 최로→최유지→최상→최세영→최자양→최립의 가계로 설명하고, 최영은 최유지의 아들, 즉 최상과 형제 간으로 되어 있다. 최립의 형제 명곡 최석정이 지은 묘갈 〈형조참판간이최공묘갈명〉(刑曹參判簡易崔公墓碣銘)은 '아버지 최자양, 할아버지 최세영, 증조 최상'으로 기록했고, 조선왕조실록사전 DB에도 이 설을 따르므로 확실히 최영과 최립은 직계 조손 관계는 아닌 듯하다.[10] 현판 글을 가리킨다. 그림틀 액자(額子)가 아니다![11] 야사인 공사견문록에서 소개된 일화 중에는 환관 한명이 선조의 글씨체를 보고 베껴서 사용하다가 이준경에게 걸려 크게 갈굼을 당하고 글씨체를 바꿔 해당 일을 뒤늦게 알게된 선조가 환관의 반성하는 태도에 기뻐했었던 일이 있다.[12] 왕세정은 글은 매우 잘 쓰지만 인성에 대해서는 많이 까이는 인물이었다.[13] 비유컨대, 사진기 발명 이후 회화에서 '시각의 정확한 재현'의 희소성이 급락한 것과 유사하다.[14] 대우전자 '싹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