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극영 尹克榮 | |
출생 | 1903년 9월 6일 |
한성부 북부 관광방 대안동계 소격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42번지) | |
사망 | 1988년 11월 15일 (향년 85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본관 | 해평 윤씨 |
학력 | 교동공립보통학교[1]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2] (졸업) 경성법학전문학교 (중퇴) 토요음악학교[3] (바이올린·성악 / 제적) |
가족 | 배우자 오인경(1907-1987) 슬하 3남 1녀 |
직업 | 문학가, 작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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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곡가, 그리고 아동문화운동가. 본관은 해평(海平). 동요 반달의 작곡가로 잘 알려졌기 때문에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2. 생애
1903년 9월 6일 한성부 북부 관광방 대안동계 소격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42번지)에서 태어났다. 교동공립보통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출처: 1984년 5월 5일 KBS에서 방송된 《윤극영, 푸른하늘 은하수60년》).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웠다.1923년 도쿄도에서 방정환이 조직한 색동회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중 희대적이게도 조선어 가사를 붙인 노래들을 작곡하여 어린이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힘썼다. 같은 해 일어난 관동 대지진 당시 죽창으로 조선인을 학살하는 것을 몸으로 겪었는데, 자신도 군인들에게 잡혀 어디에 갇혀 들어갔고, 지푸라기 속에 일어나 보니 머리 위에 말이 있었다고 한다. 마굿간에 잡혀 가축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출처 전보 통신이 연결된 후 생사를 걱정하는 어머니 편지를 3개월 만에 받았다고 한다. 신변을 위협당하는 경험으로 인해 경기도 경성부로 돌아와 1924년 8월에 다알리아회라는 어린이합창단을 처음으로 창단하였다. 1926년에는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음악교사로 활동하며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게 되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중화민국에 머물다가 지린성 용정시에서 복역하였고, 1947년에는 허베이성 톈진시에서 손수레를 이끌다가 극적으로 대한민국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동요 반달, 설날, 고드름, 따오기, 꾀꼬리 등을 작곡하고 동시에 아동문화운동에 힘쓰며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임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1987년 12월 이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 차례에 걸쳐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1988년 11월 6일에도 다시 입원하였다. 그러던 1988년 11월 15일 밤 11시 35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5세.
서울특별시에서는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 민주묘지 앞 삼거리에 있는 윤극영가옥을 보존해 현재도 개방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3리 학곡마을 선산에 있다.
3. 작품
- 반달 : 윤극영 작사·곡
- 설날 : 윤극영 작사·곡
- 고드름 : 유지영 작사·윤극영 작곡
- 따오기 : 한정동 작사·윤극영 작곡
- 꾀꼬리
- 기찻길옆 : 윤석중 작사·윤극영 작곡
- 고기잡이 : 윤극영 작사·곡
- 어린이날 노래 : 윤석중 작사·윤극영 작곡
- 고명중학교 교가 : 전광용 작사·윤극영 작곡
- 서귀포초등학교 교가 : 윤석중 작사·윤극영 작곡
- 서초중학교 교가 : 이종각 작사·윤극영 작곡
3.1. 한국 최초의 동요 '반달'
윤극영이 최초로 발표한 동요는 위에 나온 '달맞이'로 1924년 11월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왜 '반달'이 한국근대사 최초의 동요가 되었나 하면, 1926년에 윤극영이 발표한 동요집 때문이다. 이 동요집의 제목이 '반달'이었고, 윤극영은 이 동요집에서 노래 '반달'을 '달맞이'보다 앞서 1924년 10월 12일에 만들었다고 적었다. 발표한 것은 2년 늦었지만, 만들기는 '달맞이'보다 먼저 만들었으니 '반달'이 최초의 동요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가 윤극영의 대표곡이 되면서, 윤극영이 얘기한 1924년 10월 12일이 한국 최초의 동요인 '반달'이 발표된 날이 되었다.[4] 그 뒤 동요 발달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나 동요 관련 행사를 주최하는 방송국이 모두 한국 동요의 시작을 1924년으로 잡게 된다. '달맞이'도 실제로 1924년에 발표한 곡이므로 한국 동요의 시작이 1924년인 게 틀린 건 아니다.* 1984년 5월 5일 KBS에서 방송한 '푸른하늘 은하수 60년'에서는 1924년 9월에 이미 반달을 작곡했다는 자막이 나온다. (0분 24초부터) 그리고 윤극영 본인도 이 방송에 직접 출연하여 반달을 작곡하기 한달여 전에 설날을 작사, 작곡하였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13분 3초부터)
** 지면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설날'과 '고드름'이 잡지 어린이 1924년 2월호에 수록되었고 '반달'은 1924년 11월호에 수록되어 설날'과 '고드름'이 반달'보다 9개월 앞선다.
4.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홍난파, 안익태, 현제명 등 동종의 음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동했던 사실이 알려져 논란의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고 한때 친일인명사전 인명부에 등재대상에도 올랐다는 일설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등재되지 않았다. 친일 사유로는 일제 말기 때 만주에 일제가 수립한 괴뢰국 만주국에 적극 협력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의 대상으로 올랐다. 특히 홍난파나 안익태 등과는 달리 주로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 작곡가로 잘 알려졌고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과거 국민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된 사례도 있어서 논란의 대상에 오르기도 한 수준이었다. 강원용 목사에 의하면 윤극영이 친일단체였던 '간도협화회'에 참여했고, 자신에게도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고 증언했다.그때 간도에는 간도협화회라는 친일 단체가 있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들을 서로 친화시킨다는 미명 아래 조직된 이 꼭두각시 단체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고 고무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회장은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노래 '반달'의 작곡가요 아동문학가였던 윤극영이었다. (중략)
하루는 이 사람이 내게 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협화회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나보고 협화회 일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회유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어차피 세상이 일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판인데 협력하여 같이 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 아니겠소?"
"나는 교회 일로 매우 바쁩니다. 그리고 곧 다시 일본에 공부하러 가야 하므로 그런 일을 할 만한 형편이 못될 것 같군요."
내가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이번에는 표정을 바꾸어 그가 말했다.
"그렇게 협력을 하지 않으면 신상에 별로 좋을 게 없을 텐데."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1, 한길사, 143~144쪽])
하루는 이 사람이 내게 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협화회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나보고 협화회 일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회유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어차피 세상이 일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판인데 협력하여 같이 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 아니겠소?"
"나는 교회 일로 매우 바쁩니다. 그리고 곧 다시 일본에 공부하러 가야 하므로 그런 일을 할 만한 형편이 못될 것 같군요."
내가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이번에는 표정을 바꾸어 그가 말했다.
"그렇게 협력을 하지 않으면 신상에 별로 좋을 게 없을 텐데."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1, 한길사, 143~144쪽])
유족 측에서는 윤극영의 친일 행적 및 사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지나치게 고인에 대한 폄하와 매도행위를 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상세한 조사에 대해선 머뭇거리고 있기에 비아냥도 많이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