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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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중집(中執) |
호 | 묵암(默菴), 옥파(沃坡) |
본관 | 성주 이씨[1] |
출생 | 1858년 음력 11월 6일[2] |
충청도 태안군 북이면 반계리 (현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3] | |
사망 | 1925년 8월 31일[4] (향년 68세) |
경기도 경성부 죽첨정1정목 31번지 자택 (현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 | |
직업 | 언론인, 국문학자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종교 | 천도교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5호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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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에 이르러 봉건의식을 벗어나 '신촌정신'을 특별히 강조하는 뜻은 먼저 '정신을 개조'하고 그 다음에 물질의 풍요가 뒤따라야 되기 때문이다."
이종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구한말의 관리 및 개화사상가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58년 음력 11월 6일 충청도 태안군 북이면 반계리(현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서 아버지 이교환(李敎煥, 1841. 10. 20 ~ 1878. 1. 16)과 어머니 청풍 김씨(1840. 4. 12 ~ 1891. 4. 12)[5]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경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78번지에 거주했다.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한문을 배우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이상재, 김윤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1882년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조선 조정으로부터 정3품 위계를 받았다. 이때 일본의 개화된 모습으로부터 감명을 받고 독립신문에 개화의식과 관련한 논설을 기고한다.
1895년 내부 주사, 1898년에는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1대 회장이 된다. 이 단체는 개화사상을 민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종일은 이후 중추원 의관이라는 고위직도 맡지만 개화로 나라의 힘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해 10개월만에 그만두게 된다. 의관직을 그만두자마자 흥화학교를 설립하고, 1905년에는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며 30세 전후의 청년들을 모아 애국단을 조직하는 등 교육과 개화운동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종일은 이승만, 유영석과 함께 순수 한글로 된 제국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의 황성신문은 한문으로 쓰여 있었으나 이종일은 대중들에게 더 쉽게 전파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에 순수 한글로 쓰였으며,[6] 부녀자 계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문이 되었다. 그는 물론 대중들을 계몽하기 위해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에도 참여했고, 제국신문은 1910년 폐간할때까지 사장 및 기자를 맡는다.
그는 천도교에 입보하여 천도교와 연계한 독립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급사하고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을 하자 국내의 항일운동 단체들과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일을 2월 28일로 정하고 신문사 경험을 살려 1차로 2만 5천장, 2차로 1만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다. 이를 8명의 동료에게 분배하고, 손녀 이장옥(李璋玉)도[7] 이 일을 도운다. 당시의 이장옥의 기록에 따르면 할아버지(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배포했는데 증표를 제시해야 선언서를 주었다고 한다.
이종일은 남은 1만장의 선언서를 주요 도시에 배포하려고 했다. 2월 28일 이종일을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이종일은 그 자리에서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 15명과 경찰차 5대가 민족대표가 있던 태화관을 포위해 체포하려 들었고, 한용운이 독립쟁취를 외치자 다같이 독립선언서를 경찰에게 던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에서 관할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아 한동안 구금생활을 지속해야 했고, 1920년 3월 22일에서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이 관할재판소로 지정되었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에 대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판결이 뒤집혀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지만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2년 반만에 가출옥 했고, 출옥하자마자 다시 한번 만세운동을 준비했으나 일본 경찰에게 인쇄물을 압수당하며 실패하고 말았다.
1925년 8월 31일 경기도 경성부 죽첨정1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 31번지 자택에서 영양실조로 별세했다.
만세운동 참여 및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지내고 한글 맞춤법 연구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동(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36년 5월 한 차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고,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사후 1978년 성신여대 교수 이현희가 그의 비망록인 묵암비망록을 발굴했다고 주장하여 이를 바탕으로 30여편의 논문을 말년까지 집필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으나 불과 1년 후인 1979년에 유족들이 묵암비망록을 반환하라고 요청하자 차 천장 위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잃어버렸다는 황당한 해명을 하면서 묵암비망록 원본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후 묵암비망록에 역사적으로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많은 그릇된 기록 때문에 가필, 왜곡 의혹이 짙어지는 가운데 2020년대 이후에는 아예 주요 내용을 여러 사료에서 마구 베껴오고, 이현희가 지어서 짜깁기한 위서로 판정이 났다. 이현희가 발굴한 장효근 일기는 가짜는 아니었으나 가짜 내용을 엄청나게 가필해놨기 때문에 이현희본은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03~107p
[1] 문열공파 22세 종(鍾) 항렬.[2] 양력 12월 10일.[3] #. 당초 출생지는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기재된 것 처럼 경기도 영평군 남면 추동리(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로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현 태안여자고등학교) 교감으로 있던 향토사연구가 박춘석씨가 제적부를 추적, 지금의 출생지로 정정하였다.#[4] 음력 7월 13일.[5] 김익중(金益重)의 딸이다.[6] 한문을 배워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에 한문에도 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문중심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한글로 쓰겠다는 것.[7]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방영된 다큐 '그날이 오면'에서 아역 배우 이영은이 맡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