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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3:56:23

신석구

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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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월북, (日):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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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신석구.jpg
출생 1875년 5월 3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금관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1]
사망 1950년 10월 10일 (향년 75세)
평양형무소
직업 목사
국적 조선대한제국
일제강점기대한민국
본관 평산 신씨[2]
은재(殷哉), 춘정(春汀)
종교 기독교 (개신교, 감리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49호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목사가 되기까지2.2. 3.1 만세 운동2.3. 기독교 민주당 비밀결사사건2.4. 복역 중2.5. 신사참배, 창씨개명 거부2.6. 광복 이후2.7. 자서전2.8.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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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유공자이자 독립운동가.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진남포 반동비밀결사 고문이다.

2. 생애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부친 신재기(申在綺)와 모친 청해(靑海) 이씨 슬하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7세에 모친을, 10세에 조부를, 12세에 양부인 백부를, 그리고 15세에 부친과 조모를 한 달 사이에 잃는 고통을 당했다. 9년 사이에 5명의 보호자를 잃은 탓으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19세 때 하류계층 유부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 출이독립에서 밝히기를 위와 같이 동거했던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 한다 -
이후 이이의 격몽요결을 읽고 마음을 다잡고 동거를 청산하고 훈장으로 일하게 된다

2.1. 목사가 되기까지

저서인 출이독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려서 부터 한학을 공부하다 33세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으며, 협성신학교에서 3년동안 수학후 감리교목사가 되었고 서울, 개성, 춘천, 원산, 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2.2. 3.1 만세 운동

1875년 5월 3일 충청도 청주군 산내이상면(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출생하였다. 유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릴때는 한학을 배웠으나, 20대 후반이던 1907년 개신교에 입문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경기도강원도등 여러 곳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경성부에서 목회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오화영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2.3. 기독교 민주당 비밀결사사건

2.4. 복역 중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2.5. 신사참배, 창씨개명 거부

이후 그는 목회활동을 하였으며 기독교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총독부 당국의 신사참배령을 거부하였다.

신석구는 3·1 운동 이후에도 일본이 요구하는 신사참배와 전승기원예배를 매번 거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감리교단이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부응하는 결의를 하고 많은 목사들이 이를 따를 때 반대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 대대적으로 대동아전쟁전승기원예배가 열릴 때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같은 충북 출신의 감리교 목사로 민족대표 33인이기도 했던 정춘수의 친일 행위와 대비되는 것이었다.[3]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창씨를 거부하였고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2.6. 광복 이후

광복 당시에는 평안남도 룡강군의 교회에서 목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설립을 반대하며 반공주의 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1946년1947년에 한 차례씩 투옥되었고, 남한으로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그는 어린 양들을 버리고 남하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1949년 4월에 또다시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때는 이미 75세의 고령이었으며,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고 평양형무소 수감 중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총살당했다.

2.7. 자서전

출이독립 -자서전이지만 회고록의 느낌을 준다-

2.8. 사후



[1] #[2] 사간공파 30세 석(錫) 항렬.[3] 실제로 신석구는 소고기 2근을 사들고 정릉에 있는 정춘수의 집을 직접 찾아가 그에게 "감독직만 수행하지, 일본에 협력하지는 말라."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춘수는 끝내 그 말을 무시한 채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라는 말로 답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