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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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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81년 4월 18일 (음력 3월 20일)
한성부 북부 양덕방 계생동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사망 1954년 10월 27일 (향년 73세)
북한 평양시 룡성구역 중앙병원
묘소 애국렬사릉
본관 풍양 조씨
직업 독립운동가
학력 유학
가족 사촌 형 조정구, 종질 조남승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대한협회2.3. 대종교2.4.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다2.5. 임시정부를 지키다2.6. 해방 후 경력2.7. 납북, 그리고 최후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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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자는 중염(仲琰), 호는 우천(藕泉)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조완구는 1881년 음력 3월 20일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풍양 조씨로, 부친 조동필(1845~1894)은 이조참판이었으며, 조부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조봉하(1817~1891), 증조부는 풍양 조씨의 중심 인물로 병조, 이조, 에조, 형조, 호조 판서와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병현(1791~1849)이다. 고조부 조득영은 조만영·조인영 형제의 8촌 형이었다. 조완구는 3남 중 2남으로 태어났지만, 맏형 조영구가 1894년 역병에 걸려 아버지와 함께 사망하면서, 그는 13살의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

사촌형 조정구(1860~1926)는 흥선대원군의 사위로, 조남익, 조남복, 조남진 등 4형제와 두 딸을 두었다. 그 중 첫째 딸 조계진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에게 시집을 갔다. 사실 이회영 가문은 소론, 조정구의 가문은 노론이었으니 혼인이 성사되기 어려웠지만, 조완구가 둘을 중매하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당색을 따져 무엇하우.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나라 되찾는 데 힘을 합칩시다."라고 하면서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조정구는 고종의 매부로 궁중 출입이 비교적 용이했고, 그의 아들들은 주전원, 시종원, 비서원 등에 근무하며 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2009년 4월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에서 공개된 광무황제의 어새가 찍힌 영문문서에 따르면, 퇴위한 한국의 황제가 1909년 1월 1일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조카 조남복을 잘 돌봐달라고 헐버트 박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년 뒤 조정구, 이상설, 이회영이 고종의 망명을 꾀했지만 고종이 갑자기 죽어 실패했다는 설이 돌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완구는 15살 때인 1895년 아내 홍정식(1881~1945)과 결혼했다. 홍정식은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금산군수 홍범식의 여동생으로, 그녀의 집안 풍산 홍씨는 노론 명문가였다. 그는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누구에게 배웠으며 동문수학한 이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 후 1899년 내무부 참봉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효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고, 1900년 법관양성소[1]에 입학한 뒤 1902년에 졸업하여 내부주사에 임명되었다.

2.2. 대한협회

1903년, 조완구는 종6품 승훈랑으로서 <증보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해 1907년 12월 250책을 편찬하고 이듬해 50책으로 인쇄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던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이에 반발하여 그해 11월 30일에 자살했다. 조완구는 민영환이 자결하기 직전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고 퇴궐하는 민영환을 만나 물었다.
대감, 헌병에게 잡혀가실 각오로 상소를 올리셨습니까?

이에 민영환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갔고 곧 자결했다. 조완구는 후에 이 일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고작 일본 헌병에게 잡혀갈 것을 걱정하여 위로의 말을 올린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 등에서 활동했고, 1909년 2월 27일 종로에 있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연합연설회에서 2천명의 군중을 상대로 "여론을 무시한 결과"라는 제목으로 송병준을 비판했다. 이는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방을 순행하던 중 내부대신 송병준이 만취하여 시종무관 어담을 폭행하고 황제 앞에서 칼을 뽑는 등 만행을 부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한협회는 민중계몽운동을 이끈 단체로, 전국에 100여 지회를 두고 회원 7천 명을 확보한 상당히 규모가 큰 단체였다. 그러나 1909년 8월부터 일진회와 제휴하려 해 반발을 샀고, 일진회가 1909년 12월 4일 '합방청원상소'를 황제와 내각, 통감에게 체출하고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자, 이에 즉각 성토하고 국민대회를 발기했지만 경시청이 이를 금지하자 취소되었다. 이후 대한협회는 1910년 일제의 압력으로 해산되었다.

2.3. 대종교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조완구의 처남이자 금산군수인 홍범식은 "내 어찌 한 고을의 군수로 나라가 망하는 포고를 군민에게 알릴 수 있겠느냐"며 그해 8월 29일 10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조완구는 처남의 자결에 큰 충격을 받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앞서 1909년경에 대종교에 귀의했던 그는 1910년 10월 18일에 대종교 시교사로 선임되었고, 뒤이어 규칙기초위원, 참교, 지교, 상교를 역임했다.

1914년, 조완구는 70세에 접어든 노모와 아내, 3남매를 고향에 남겨둔 채 북간도로 향했다. 이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해 이동녕, 조성환 등과 함께 상설의회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그는 신규식, 김백연, 백순, 박찬익, 정신 등과 함께 매주 단군에 예배를 올렸고, 어천절(3월 15일)과 개천절에 경축식을 행했으며, 국치일(8월 29일)에도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1916년 9월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사망하자, 조완구는 대종교 총본사 부전교로서 나철의 유해를 청파호에 안장했다. 또한 이듬해인 1917년 3월 2일엔 이상설의 임종을 지켜보고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수분하에 뿌렸다.

1917년 봄, 조완구는 북간도 용정촌에서 고향을 떠나 기차를 통해 찾아온 아내 홍정식, 노모 안동 김씨, 그리고 자식들과 상봉했다. 그러나 불과 한달 뒤, 조완구는 독립운동을 위해 용정촌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고 노모는 5년간 치매에 시달렸다가 1923년 정월에 사망했다. 또한 그의 아들 조남규는 실종되었고, 아내 홍정식은 남은 두 딸을 길려내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시장에 팔았다. 조완구의 딸 조규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가 머리를 자른 걸 본 그녀와 여동생이 통곡하자, 홍정식은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같이 혼자 살며 바쁜 생활에다 시간이 쫓기는 여자에게는 매일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을 다듬는 것은 생활의 불편과 시간낭비이다. 누구를 위해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질까 보냐. 무엇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것이냐.

홍정식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 딸을 온힘을 다해 길렀고, 두 딸은 그런 어머니 덕분에 학교에 입학하여 사회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어엿한 남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2.4.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다

1919년 2월, 여운형이 상하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독립운동의 총체적인 지휘를 맡을 최고 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어느 곳에 둘 지를 논의했다. 이때 조완구는 "중앙기관은 국제도시인 상하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후, 그는 이동녕, 조성환,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상하이로 이동했고, 3.1 운동이 국내에서 발발하자 신규식, 이동녕,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대표기구 설립을 준비했다.

그 결과 1919년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각지에서 온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29인의 대표가 선출되었는데, 조완구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뒤이어 임시의정원이 개원되어 후속 작업이 추진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 백남칠이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4월 11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결정되었고 4월 13일에 이를 대내외에 공포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체택했지만, 헌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이는 조완구가 강력히 주장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황실을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해 많은 젊은 독립인사들로부터 왕조 시대의 구시대적 발상을 하는 인물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왕가는 500년 동안이나 조선을 통치해 왔기 때문에 뿌리가 깊을 뿐더러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이완용 등 5적과 7적의 소행이다.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그가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더구나 고종이 서거했을 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백성들이 덕수궁 앞에 주저앉아 밤낮없이 통곡했던 일로 미루어 보아 다수 국민이 이왕가에 대한 충성심과 추모정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황실을 우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완구는 5월 12일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해 국무원 위원 자격으로 정부의 시정방침을 밝혔다.
외교는 대개 3방면으로 견(見)할지니 과거, 현재, 미래라. 과거에 대하여는 파리에서 8호 전보까지 내(來)하였는데 내용은 현정부 계속 진행에 관한 것이오, 현재는 금전 3만 불을 요구함이요, 장래 방침에는 3월 1일부터 진행하나 역사를 편찬할 것과 임시정부 선언서를 5처로 발송할 것과 정치고문 1인, 신문고문 1인을 치(置)할 것이오. 재무부 현상에 대하여는 잔액이 없고 재원 방침에는 2개조로 결의되었으니 1은 매인 50전의 세금을 징수할 것이오, 2는 수의로 애국금을 모금할 것이며, 교통부에는 완전한 기관을 4부로 치할 것이오. 군무부에는 계획이 별무하니 통언(通言)하면 내지동포에게 통유(通諭)를 발(發)하야 각오케 할 것이라 하니라.

조완구의 시정방침은 임시정부가 추진해나갈 외교, 재정, 교통 등의 활동방향을 천명한 것으로, 이는 장래 임시정부가 나아갈 진로를 제시한 것이었다. 여기서 '파리에서의 8호 전보'란 김규식이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 3만 달러를 송금해달라고 요청한 전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금고는 비어 있었지만 다행히 5월 하순에 내무총장 안창호가 재미교포로부터 거둔 2만 5천달러의 찬조금을 가지고 와서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그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조완구는 국내와의 통신을 위해 교통국을 설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국무원 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내무차장, 노동국총판, 재무총장, 내무부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대종교를 토대로 김구, 여운형, 김철, 이유필 등과 함께 교민단을 조직해 상하이 거류민들의 자치와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했으며, 미주 지역 동포와의 연계, 중국 측과의 협력, 그리고 무력 항쟁 모색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2.5. 임시정부를 지키다

1921년 2월,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독단적 행동에 반발한 안창호, 박은식, 김창숙 등 임시정부 인사 14명이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요구하면서 <아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임시정부의 유지만 고집해서는 독립운동계의 통합이 어려우니 이승만을 퇴진시키고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때 조완구는 이동녕, 신규식, 이시영, 윤기섭 등 이승만을 지지하는 45명과 함께 협성회를 결성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첫째, 임시정부를 절대 유지할 것.
둘째, 대통령 이하 각 국무위원을 신임할 것.
셋째, 언론 행동 등 현 상황을 해칠 모든 행위를 방지하기에 노력할 것.

그러나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한 이래 독립운동의 노선을 두고 반발이 격화되자, 이승만은 1921년 5월 17일 태평양회의 참석을 위해 상하이를 떠난다는 교서를 남기고 5월 29일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 조완구는 이승만에게 재고할 것을 간곡히 권했지만 끝내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후 조완구는 1923년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폐지론이 대두되자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한편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체택했지만,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등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들이 취임을 거부하거나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고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했다가 오래가지 않아 그만두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김구가 국무령을 맡을 무렵, 임시정부는 대다수 관원들이 다른 단체로 이탈하는 바람에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에 몰렸다. 임시정부는 이를 수습하고 타개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고려했는데, 그중 하나가 민족유일당운동이었다.

조완구는 상하이에서 유일당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결성한 상해촉성회를 기반으로 삼아 베이징, 광동, 무한, 난징 등에서 조직된 촉성회와 연합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총석회연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1929년 좌익계열과 통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일당의 조직방법론을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좌익 계열이 탈퇴했다. 이에 조완구는 임시정부를 지킬 정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1930년 1월 김구, 송병조, 차이석,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떠났고,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과 연합해 통일된 행동을 꾀했다. 이윽고 1935년,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단, 의열단, 미주한인독립당 등 5개 단체가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의열단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반대하자, 조완구는 1935년 11월 김구와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한국국민당을 창립했으며 "독립운동에 관해 불순한 이론 및 행동은 반드시 배제한다"와 "임시정부가 발전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두 개 조항을 강령에 덧붙여 임시정부 폐지론을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조완구는 한국국민당을 결성한 뒤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국무위원을 새로 뽑는 일에 가담하여 송병조, 차이석, 이동녕, 김구, 조성환, 이시영 등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그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운영했다. 이어 임시정부가 개편될 때 내무장을 맡았으며, 중일전쟁 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침략을 피해 중국 각지를 떠돌 때 함께 따라갔다. 1940년 마침내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그해 5월에 재건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을 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시켰다. 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구가 선출되었고, 조완구는 조소앙, 홍진, 송병조, 지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국군으로 삼았고, 그해 10월 9일에 주석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을 단행했다. 주석에는 김구가 선임되었고, 외무부장엔 조소앙, 군무부장엔 조성환, 법무부장엔 박찬익, 재무부장엔 이시영이 선임되었다. 이때 조완구는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교민들의 생활을 살피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했고, 김원봉을 위시로 한 조선의용대 잔여 세력이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개헌을 통해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좌익진영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행정부서 책임자로 선임했다. 이때 조완구는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기반 마련에 노력했다.

2.6. 해방 후 경력

1945년 8월 10일, 임시정부 인사들은 충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침 김구 주석은 광복군의 국내진입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시안에 가 있었기에, 조완구는 그를 대신해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귀국해서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과도 정권에 인계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야당 측에서 '임시정부 개조'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요구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러자 조완구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나 27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잘나서 그런 것보다 못나서 그렇습니다. 누가 잘난 사람이 그것을 지키고 있겠소. 나 조선 가서 27년 했으니 한 자리 달라 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시라입니다.

그 후 김구가 충칭으로 돌아온 후 국무회의에서 향후 방침을 결정했고, 9월 3일 당면정책 14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임시정부는 현 상태로 환국하며, 국내로 돌아가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새로 수립되는 과도정권에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인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정부의 명의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뉘어 개별적으로 입국해야 했고, 조완구는 12월 2일 조소앙 등 국무위원들과 함께 제2진으로 귀국했다.

조완구는 환국 후 김구가 머무르는 곳인 서울 경교장으로 향했다.그는 그곳에서 이때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아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딸 조규은과 상봉했다. 조규은은 아버지에게 어머니 홍정식이 해방 6개월 전인 1945년 2월 6일에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조완구는 얼마 후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편, 조완구는 해방 후 혼란스러운 정세를 보고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내가 본국을 등지고 해외로 망명할 때 대단한 일을 하고자 간 것이 아니고, 나라 되어가는 꼴이 안연히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피해갔으며,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중도에 어정어정 기어들어 올 수는 더욱 없어서 떠돌아 다니다가 미군이 비행기 태워주기에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나라 꼴이 이 지경으로 두동강이 났고 제각기 제 목소리만 높이며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니 우리가 나라를 찾겠다고 발버둥치며 완전한 통일독립을 바라던 것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참으로 우리의 앞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우리가 모진 괴로움을 참으며 수십 년을 싸운 것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될 수 없어서 발버둥친 것이지 우리나라를 여우의 손에서 뺏어서 이리나 늑대에게 나누어 주려고 애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후 조완구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관원으로서 활동하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간 정치회담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을 이뤄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후 1948년 4월 22일, 그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인사들과 함께 평양에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어떻게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남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남북연석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상당수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이 김구를 떠나는 와중에도 엄항섭과 함께 김구 곁에 남아서 남북통일을 주장했다.

2.7. 납북, 그리고 최후

1949년 6월 26일 김구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조완구는 김구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할 것을 주장했고, 효장공원 내 김구의 묘비문을 작성했다. 이후 그는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으로서 각종 계획을 입안했다. 그러나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암담한 현실에 절망하여 주변인들로부터 피난하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집에 머물렀다.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된 후, 그는 퇴계로의 풍전아파트로 이송된 뒤 9월 18일 경 북한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딸 조규은의 회고에 따르면, 조완구는 이송되던 날 "(조)소앙의 집으로 오란다."는 말을 남긴 채 인민군에게 붙들려 차량에 태워졌다고 한다. 이후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 초에 탈북한 뒤 전 북한조국통일 민주전선 부국장이자 정무원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이 증언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조완구는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 연로한 인사로 분류되어 자택 혹은 성북동과 성남호텔 등에 연금되어 감시하에 있다가 9월 18일 조소앙 댁에 끌려간 뒤 강제로 군복을 힙히고 차에 태워져 9월 27일 성북동, 삼선교 고개, 종로, 수색을 거쳐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러다가 도중에 공습을 받았고, 황해도 서흥에서 방응모, 김붕준 등이 숨졌다. 10월 12일 강계로 이송된 그는 이후에도 이동을 계속하다가 10월 18일 유동열이 숨을 거두는 걸 지켜봤고, 김규식 역시 12월 10일 만포 근처 군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걸 바라봐야 했다.

이렇듯 동지들이 하나 둘씩 숨을 거두자, 조완구는 정신이 피폐해졌고 1950년 11월부터 고열을 앓기 시작하더니 '제기열병'에 걸려 열에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해 방문을 박차고 나가 눈밭에 눕는가 하면 헛소리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가 갈증을 이기지 못해 물을 찾다가 말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약을 처방해주고 돼지고기, 밀가루, 분유 등을 넉넉히 놓고 간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이후 조완구는 동료들과 함께 남한의 신문, 잡지, 중공의 신문, 서적, 잡지, 그리고 <이조실록>을 비롯한 고전, 고서들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 당국은 그에게 조국전선 가입을 종용하고 성명서 발표, 대남방송 원고 작성, 가족 친지에게 편지 쓰기 등을 종용했지만, 조완구는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1951년 9월 중순, 납북 요인들은 북한의 소련과 중공 대사관을 방문해 각국 정부에 보내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호소문의 내용은 전쟁의 참상이 심하니 조속한 휴전을 원한다는 것이었고, 조완구는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호소문에 서명했다.

1952년 12월,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가 대거 숙청되었다. 이후 박헌영과 접촉했던 납북 요인들은 남로당의 죄상을 묻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고, 조완구, 조소앙, 오화영, 원세훈 등은 이를 거부했다가 외출제한을 받았다. 이후 그들은 휴전이 성립된 뒤에도 여전히 억류되었고, 조완구는 1954년 10월 말 중병에 걸려 평양 용성의 중앙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병실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부터 그를 따랐던 안우생을 불러 앉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생이, 과거가 왜 이렇게 허무하게 생각되지? 지난 40여 년 동안 한 일들이 말이지.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또 누구의 칭찬이나 찬사를 받기 위해서 한 일도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이 자신의 결심에 따라 떨쳐나서 이국만리 대륙의 도시와 촌락을 헤매고 다니며 오직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행복을 찾겠다고 싸운 것인데...... 그것이 오늘은 왜 이렇게 허무하게 생각되는지 모르겠네. 결실을 보지 못하고 가야하니 그럴까?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는 오늘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하니 그럴까? 오늘의 이런 현실을 보며 죽자고 40여 년을 싸웠는가 하고 생각하니 정말 허무하고 마음 아프기만 하고, 서글프기만 하오.

1954년 10월 27일 오후 8시, 조소앙, 안재홍, 오화영, 윤기섭, 최동오, 홍명희가 그의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조완구는 눈을 감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소앙, 일파(엄항섭), 춘곡(원세훈), 민세(안재홍)...... 나는 가네. 당의 간판을 못 보고 가서 한이네. 통일.... 통일..... 먼저 가네. 먼저 가.....

그리고는 숨을 멈추니, 향년 73세였다.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매장되었다.

조완구는 납북 후 "월북 인사"로 간주되어 대한민국 내에서 규탄 대상으로 낙인찍혔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조규은 여사는 당국으로부터 심한 감시를 받고 가난 속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989년 아버지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으면서 비로소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1993년에 아버지의 삶을 다룬 <고독한 승리>를 출간했다. 조규은 여사는 2004년 9월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대중매체에서



[1] 한성법학전수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학교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법관양성소가 1911년 경성전수학교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생긴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