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2년 4월 28일 |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 |
원적 | 경기도 양주목 건천면 성능리 (現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229번지) |
사망 | 1933년 6월 25일[2] (향년 51세) |
사망지 미상 | |
본관 | 풍양 조씨[3] |
이명 | 조일운(趙一雲), 조국광(趙國光), 조남천(趙南舛)[4] |
자 | 백윤(伯允) |
학력 | 한문 수학 |
가족 | 외조부 흥선대원군 아버지 조정구, 당숙 조완구 |
종교 | 천주교 |
묘소 | 화장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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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자는 백윤(伯允), 이명 조일운(趙一雲), 조국광(趙國光)이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흥선대원군의 외손자이자 고종의 생질(甥姪), 순종의 외사촌동생이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조남승의 생질이다.[5]
2. 생애
1882년 4월 28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아버지 작농(芍農) 조정구와 어머니 전주 이씨(1861 ~ 1898. 12. 27)[6]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적은 경기도 양주목 건천면 성능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229번지)이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7] 237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5대조 조득영(趙得永, 1762 ~ 1824. 3. 3)은 이조판서를 지낸 조만영·영의정을 지낸 조인영 형제의 8촌 삼종형(三從兄)이었다. 아버지 조정구 역시 독립유공자로,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부했으며 순종의 유언을 신한민보에 공개한 바 있는 인물이다. 또 다른 독립유공자 조완구는 당숙이다. 여동생 조계진은 독립유공자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학과 결혼하였다. 국회의원, 국가정보원장 등을 지낸 이종찬이 조남승의 조카이다.
1898년(고종 35) 3월 4일 혜릉(惠陵) 참봉에 임용되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됐으나, 3월 10일 사직했다. 1902년(고종 39) 1월 27일 영희전 참봉에 임용되었으나 한 달만인 2월 19일 사직했다. 그해 2월 20일 내부 주사(內部主事)에 임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출사해 1903년 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칭경시 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 1905년 비서감 승(秘書監丞),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칙임관 3등) 등을 역임했다. 비서감 승으로 재직 중이던 1905년 10월 21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해 10월 30일에 궁내부 특진관(特進官)이던 조병세 등 48인과 함께 연명으로 조약의 부당함과 조약 체결에 조인한 법부대신 박제순 등 정부대신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상방사 장(尙方司長), 1906년 태복사 장(太僕司長), 영선사 장(營繕司長, 훈 4등),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주전원 경(主殿院卿) 등을 역임했다.
그 후[8] 청나라 베이징으로 건너가면서 일본 제국으로부터 '재북경 요시찰인(在北京 要視察人)', 즉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21년 3월 1일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베이징시 박정래(朴貞來)의 집에서 열리자 신채호 등 16명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기념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일본의 노예가 되지 말 것, 상해정부(上海政府) 및 선전부의 명령을 굳게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1921년 4월 17일 북경군사통일회 조직에 참여했고, 그해 10월에는 위안스카이와 만나 교섭을 통해 지원을 받아냈다. 1922년 4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대회에 참가했고, 그해 5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청년대회에도 참석했다.
1923년 6월 상하이시에 본부를 둔 조선인과 중국인의 결사단체인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에서 활동했으며, 1924년 7월 24일 북경 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할 때 규칙기초위원,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8월 중국에서 유럽과 아시아 각국의 반제국주의 단체와 개인이 참가하는 반제국주의운동대연맹회(大聯盟會)가 결성되자, 그해 8월 25일 이세영·박제선(朴齊善)·박숭병(朴嵩秉)과 함께 대한통의부 전권대표에 선출돼 본 대연맹회에 파견되었다. 1925년 1월 20일 '일본국 및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 법칙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자 북경한교동지회 실행위원에 선임되어 조약 성립에 대한 선후책을 결의하였다. 1925년 6월 11일 북경에서 영일동맹 배척운동에 참여할 목적으로 한흥(韓興)·원세훈·서왈보·박건병(朴健秉)·배천택(裵天澤)·송호(宋虎)·황운룡(黃雲龍)·김세준(金世晙)[9]·유우국(柳佑國) 등과 함께 선두자사(先頭者社) 동인(同人)으로서 「中國國民(중국 국민)의 救國救族運動(구국구족운동)에 當(당)하여 我(아) 2千萬(천만) 兄弟姉妹(형제자매)에 告(고)함」이라는 격문[10]을 제작하고 이에 연명한 뒤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1926년 봄에 원세훈·배천택·김세준 등과 함께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고 조사부를 담당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고, 1926년 5월 10일에는 천릉시 종척 집사(遷陵時宗戚執事)에 임명되었으나 북경에 체류 중이었으므로 실제 국상에는 참여치 않았다. 1926년 10월 16일 안창호가 제안한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을 위해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北京促成會)를 창립할 때 집행위원으로 참여해 그해 11월까지 활동했다.
1927년 봄에는 박건병·유우국 등과 함께 도보사(導報社)를 설립해 사장에 취임했고, 그해 12월 20일 한흥교(韓興敎)·원세훈·유우국·김세준·송호·박건병·배천택·조성환(曺成煥)·장건상·이탁(李鐸)·박모씨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북경촉성회[11]를 조직했다.
그러나 1932년 1월 27일 중국에서 귀국해 인천항에 입국했으나, 인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그해 2월 1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2월 17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1932년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12]
출옥 후에는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3년 6월 26일 사망했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이완용 연루설?
《매천야록》 제6권 1910년 조를 보면, 이완용과 조남승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909년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 1853 ~ 1925)이 자신과 동업자 해리 라이스 보스트위크(Harry Rice Bostwick, 1870 ~ 1931), 고종이 합작으로 설립한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를 일본인 무샤 렌조(武者鍊三)가 설립한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 닛칸가스가이샤)에 매도했다. 이때 매도금으로 받은 금액 중 고종이 두 번에 걸쳐 기부한 130만원[13]을 반납하기 위해 이완용에게 130만원을 건넸다. 그런데 이때 이완용은 이 금액 중 일부를 꿀꺽하고는 어새를 도용해 영수증을 위조해서 콜브란에게 건넸다. 마침 고종이 콜브란이 회사를 매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기존에 기부한 바 있는 원금 170만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사람을 시켜 콜브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콜브란은 이완용으로부터 받은 어새가 찍힌 영수증을 고종에게 바쳤는데, 고종이 영수증이 위조된 사실을 깨닫고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했다. 이에 이완용의 하인이었던 조남승은 중죄를 받을까 두려워 도주했으나 이내 체포되었고, 결국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이완용은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 통감부에 고종이 1894년 이후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벌인 사건 일체를 모두 폭로했고, 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이 한 철제 궤짝에 몰래 숨겨져 있는데 그 궤짝이 프랑스 영사관에 보관돼있노라 말했다. 일전에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외부를 폐지할 때 조선-대한제국이 청나라·대영제국·미국·프랑스·러시아 제국·이탈리아·필리핀 등 9개 나라와 체결한 조약 문서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끝끝내 찾지 못했었는데, 오랫동안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조남승이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이용해 이 문서들이 담긴 철제 궤짝을 프랑스 영사관 내 교회당에 은밀히 보관해두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은 프랑스인과 교섭해 그 궤짝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고종 재위 기간 동안의 모든 외교 문서 및 각 국의 문서, 헤이그 특사사건에 관한 문서 등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 이 문서들이 담긴 철제 궤짝을 일본으로 보냈고, 얼마 후 조남승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 통감부에 고종이 1894년 이후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벌인 사건 일체를 모두 폭로했고, 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이 한 철제 궤짝에 몰래 숨겨져 있는데 그 궤짝이 프랑스 영사관에 보관돼있노라 말했다. 일전에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외부를 폐지할 때 조선-대한제국이 청나라·대영제국·미국·프랑스·러시아 제국·이탈리아·필리핀 등 9개 나라와 체결한 조약 문서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끝끝내 찾지 못했었는데, 오랫동안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조남승이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이용해 이 문서들이 담긴 철제 궤짝을 프랑스 영사관 내 교회당에 은밀히 보관해두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은 프랑스인과 교섭해 그 궤짝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고종 재위 기간 동안의 모든 외교 문서 및 각 국의 문서, 헤이그 특사사건에 관한 문서 등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 이 문서들이 담긴 철제 궤짝을 일본으로 보냈고, 얼마 후 조남승은 석방되었다.
매천야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위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조남승은 이완용이 고종의 자금을 떼먹은 것, 고종의 어새를 훔친 것, 영수증을 위조한 것을 방조 내지는 동참했고, 이완용에게 청나라 등 9개 나라와 체결한 조약 문서 및 헤이그 특사 관련 문서를 비롯한 외교 문서의 행방을 알려주는 등 1910년 당시 이완용이 벌인 갖가지 친일 매국 행위에 동조했던 앞잡이 노릇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2008년 11월 29일 조광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칼럼에서도 이완용의 죄를 혼자서 뒤집어 쓴 조남승이 자신 또한 죄를 면하기 위해 조약 문서 원본의 행방을 이완용과 일제에 알려 주었다는 식으로 내용을 기술했다.그러나 조남승의 생질이자 독립유공자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말[14]에 의하면, 헤이그 특사사건 후 일본 경찰이 조남승의 묘동 집에 들이닥쳐 조남승이 소지했던 모든 문서들과 고종의 옥새를 감췄다며 추궁했고, 집의 장판까지 뜯어내 수색한 뒤 조남승을 체포해갔다고 하며, 그리고는 1910년 6월 5일자 『황성신문』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趙南升(조남승) 起訴(기소)
玉璽(옥새) 僞造犯(위조범) 趙南升(조남승)은 若林賚藏(와카바야시 라이조) 警視總監(경시총감)의 歸任(귀임)을 待(대)하야 起訴(기소)하기로 決定(결정)하얏다더라
玉璽(옥새) 僞造犯(위조범) 趙南升(조남승)은 若林賚藏(와카바야시 라이조) 警視總監(경시총감)의 歸任(귀임)을 待(대)하야 起訴(기소)하기로 決定(결정)하얏다더라
이종찬의 증언에 따르면, 조남승은 외교 문건이 담긴 비밀 철상자를 뮈텔 주교에 부탁해 중림동 약현성당에 은밀히 보관해두었는데, 조남승이 아닌 뮈텔이 비밀 철상자의 존재를 일제에 알렸다는 것이다.이렇듯, 매천야록의 기록과 조남승의 생질 이종찬의 증언은 정면으로 대치되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당시 민중들 사이에 떠돌던 또는 황현 자신이 알고 있던 일종의 썰을 다수 기록한 매천야록의 기록과 조남승의 최측근인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것을 토대로 한 이종찬의 증언 중에서는 당연히 후자가 더 설득력이 클 것이다.
그리고 설령 이종찬의 어머니가 자신의 오빠인 조남승을 두둔하려고 조남승이 모두 다 뒤집어 쓴 것이라 말했다고 하더라도, 1905년 당시 조병세와 함께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조남승의 기존 행적은 물론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15]을 합쳐서 생각해보면, 이완용이 조남승에게 공금횡령죄를 뒤집어 씌웠고, 뮈텔 주교가 외교 문서의 행방을 일제에 밀고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1] 승정원일기 고종 44년(1907) 2월 2일 기사에 趙[2] 음력 5월 3일.[3] 회양공파(淮陽公派)-한산군파(漢山郡派)-풍안군파(豊安君派) 26세 남(南) 항렬.[4] 1932년 형사 제1심 소송기록 참조. 升을 舛으로 잘못 판독한 듯하다.[5] 이종찬의 아버지 이규학(李圭鶴)은 조남승의 첫째 여동생과 결혼했다.[6] 흥선대원군의 딸이다.[7] 1932년 2월 28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원동(苑洞)이 아닌 화동(花洞:現 종로구 화동)으로 기재돼 있는데, 조남승의 작은아버지 조경구(趙經九, 1875 ~ 1899. 8. 27)의 집이 원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원동이 본적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8]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1907년 5월 27일(음력 4월 16일)자로 끊겨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일 것이다.[9]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7권에는 金世唆으로 오기돼 있다.[10] 이 격문의 내용 중 '희망조항(希望條項)'에는 "中韓聯合(중한연합)하여 日本(일본)을 總攻擊(총공격)하자. 國內外(국내외)의 各種 社會(각종 사회) 및 各團體(각 단체)와 韓國民族運動團(한국민족운동단)과 聯合同作(연합동작)의 意志(의지)를 表示(표시)하고 中國國民運動(중국민족운동)에 대하여 精神(정신)과 物質(물질)의 應援(응원)을 授與(수여)하자." 등의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11]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라고도 한다.[12] 조남승 외 관계자들은 모두 중화민국 북평시(北平市에 체류 중이었므로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13] 1904년 한미전기회사 설립 당시 고종은 이완용과 이윤용의 권유로 100만원을 보조금으로 기부했는데, 이중 40만원은 이완용 자신이 꿀꺽하고 60만원만 헨리 콜브란에게 건넸다. 이후 콜브란이 차도를 보수할 때도 고종이 70만원을 더 기부했다.[14]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종찬의 어머니는 조남승의 첫째 여동생이다.[15] 뮈텔은 안중근 의사를 핍박하며 사형 집행 직전 고해성사까지 거부하고,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말한 신민회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암살 계획을 전해 듣고 곧바로 일제 헌병대에 고발하였으며, 3.1 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폭도로 매도하며 퇴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