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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8-01 20:21:07

니콜라 빌렘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니콜라 빌렘
Nicolas Wilhelm
파일:9982AC4C5A6FD2D707.jpg
본명 니콜라 조제프 마리 빌렘
Nicolas Joseph Marie Wilhelm
한국명 홍석구
洪錫九
출생 1860년 1월 24일
프랑스 제2제국 로렌 스피슈른·슈피헤른
사망 1938년 5월 16일 (향년 78세)
사망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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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가톨릭
직업 가톨릭 사제
소속 파리외방전교회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2. 생애3. 고해성사 누설 루머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 영상 대표이미지는 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이 유언하는 사진. 안정근, 안공근과 같은 쪽에 앉은 뒷모습 사람이 빌렘 신부이다.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이자 선교사. 1860년 프랑스로렌 스피슈른·슈피헤른(프랑스어: Spicheren, 독일어: Spichern)에서 태어났다.[2]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안중근이 순국할 때 고해성사를 집전해 주었던 신부이기도 하다. 한국식 이름은 홍석구(洪錫九).

2. 생애

1881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3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1888년 선교사로 파견을 받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가 조선으로 파견되기 2년 전인 1886년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한국에서도 드디어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입국하던 1888년에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도회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듬해 제물포성당[3] 주임을 지냈고 1890년에는 용산예수성심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고향인 모젤독일 영토에 편입되자 국적 문제로 프랑스로 귀국하였다.[4] 1891년 조선으로 재입국하여 갓등이 본당[5]의 임시 주임신부가 되었다.

1896년 황해도 담당으로 파견되면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친해져 안중근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선교생활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인종차별을 하며 이들을 상당히 깔보았다. 친일 행적으로 유명했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6]와 별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인 신자들을 무시하는 모습에 안중근이 잘못된 것이라며 지적하자, 격분한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구타까지 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이 뮈텔의 구타에도 물러서지 않고 사례까지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자, 화를 풀고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빌렘은 더 이상 조선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서양인 신자들과 동등하게 대했다.

그 후 빌렘 신부는 친일 성향이 강했던 당시 한국 가톨릭의 입장과 다르게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특히 1909년 10월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형 선고를 받게 되자 빌렘은 안중근을 수차례 면회하였고, 사형집행 직전에는 직접 고해성사병자성사를 집전해주고 미사까지 교도소 면회실에서 집전하며 그의 영혼을 위로해주었다. 종교의식이 끝나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천주께서 늘 너의 곁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라는 마지막 위로를 건냈고, 안중근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아들인 안분도를 꼭 신부로 키워달라는 개인적인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직후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와 갈등을 빚었다. 안중근 문서에도 나와있듯, 안 의사는 순국 직전 병자성사를 받기 위해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뮈텔 주교는 이를 거부하였다.[7] 여기에 더해 조선 교구 내 신부들이 안중근을 찾아가 개인적으로 성사 집행을 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명을 듣지 않고 안 의사를 찾아갔으며, 덕분에 안 의사는 무사히 성사를 받고 순국할 수 있었다. 그러자 뮈텔은 빌렘 신부가 돌아오자마자 성무(聖務) 자격 정지[8] 징계를 내렸다. 이에 빌렘 신부는 교황청에 직접 이의제기를 하였고, 심의 결과 신자의 성사 요청을 함부로 거절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져 빌렘의 성사집행정지는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의 갈등은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이듬 해인 1911년 뮈텔은 안명근 야고보가 계획했던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 거사를 고해성사를 통해 전해듣고 조선총독부에 사건을 밀고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만다.[9]

결국 빌렘 신부는 1914년 고향인 독일 치하 알자스 로렌으로 낙향하여 사목하였고,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프랑스와의 연락과 교통이 두절되었다. 독일 항복 직후 다시 일제 치하의 조선으로 돌아가서 사목하고자 탄원을 제출하였으나 서울대목구에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뮈텔 주교의 일기에 따르면, 1919년 신한청년단 대표 자격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코자 했던 김규식을 빌렘 신부가 도와줬다고 한다.

3. 고해성사 누설 루머

한편 1911년의 안명근 야고보 고발 당시 빌렘 신부가 고해성사를 누설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이는 1차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 낭설이다. 뮈텔 주교 일기에서 안명근 야고보 고발과 관련된 문장을 모두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월 11일 남방 포교지의 새 대목구[10]의 명칭에 관해 투표를 요구하는 포교성성의 서한을 통고하는 파리 참사회의 서한이 왔다.
빌렘 신부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서 안 야고보[11]가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빌렘 신부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사실을 아카시(明石元二郞)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데도 그를 찾아갔다.
이 기회를 이용해 진고개로 가는 우리의 세 통로가 막힌 사실을 알리며 중간 통로에 대한 재판이 두 번 각하되었고, 그것이 복구될 희망은 없지만 우리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고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12] 그리고 일본 법정의 판결이 너무 대단해 보여 이 사실을 동경의 프랑스 대사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도 말하였다. 아카시 장군은 즉시 헌병대의 중위를 불러 즉석에서 다른 두 통로, 즉 양로원 길과 수녀원 정문 길을 열어 놓도록 그에게 명하였다. 장군은 나의 통고에 진심으로 감사해 하였다.
1월 13일 몹시 춥다. 영하 21도.
아침에 경찰관 오노(小野) 씨의 한 사무원이 내가 집에 있으면 아카시 장군이 방문 올 것임을 알리러 왔다.
경찰에서 두 직원이 조선 가톨릭의 교계 통계표를 구하러 왔다. 그들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있을 때 아카시 장군이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총독 데라우치 장군의 이름으로 다시 감사하러 왔다고 하였다. 이야기 도중 그는 안 야고보가 현재 청계동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1월 21일 아카시 장군은 안 야고보가 빌렘 신부에게 말했다고 하는 자백(Aveu)이 사실인지 여부를 빌렘 신부에게 물어 보아도 실례가 안되느냐고 편지로 물어 왔다. 빌렘 신부에게 그의 부탁을 전하였다.
《뮈텔 주교 일기 5》

즉 뮈텔의 일기엔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빌렘 신부가 누설했다는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고해성사 누설설'은 근거가 무엇인가? 고해성사 누설은 1995년 방영된 광복 50주년 기획 드라마 《김구》에 나온 창작 이야기이다. 당시 가톨릭 교회측에선 이 드라마의 누설설을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었다:
이번 방영분과 관련, 뮈텔 주교 일기 1911년 1월 11일자 내용을 보면 (교회사연구소 교회 조와 역사 제243호 참조) 「빌렘 신부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안 야고보(안명근)가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빌렘 신부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사실을 아카시 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데도 그를 찾아갔다」고 기록돼 있다.

또 1월 21일자 기록을 보면「아카시 장군은 안야고보가 빌렘 신부에게 말했다고 하는 자백(Aveu)이 사실인지 여부를 빌렘 신부에게 물어보아도 실례가 안 되느냐고 편지로 물어왔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내용에 대해 한국교회사 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는 「빌렘 신부의 고해성사 누설과 뮈텔 주교의 고해성사 내용 발설은 성직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추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고 강조하고「뮈텔 주교가 일기에 기록한 자백과 고해(Confession)와는 그 어원부터가 엄연히 구분되는 말로 뮈텔 주교가 고해성사를 누설하는 방송장면은 완전한 허구」라고 반박했다.

(중략)

한편 방송대본을 집필한 작가 정경아씨는「방송내용은 한성대 사학과 윤경노 교수로부터 자문을 받고 윤교수의 학위 논문 「105인 사건을 통해 본 신민회 연구」와 호남 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가 쓴「개화기 일제치하의 한국천주교회와 역사인식」을 근거자료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두 편의 논문내용에는 안명근이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고해성사 내용을 전했다는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95-09-03 가톨릭신문 기사
즉 드라마에서 말하는 '고해성사 누설'은 뮈텔의 일기에서도 논문에서도 확인이 안되며, 이 낭설의 출처로는 '고해(Confession)와 자백(Aveu)의 혼동'이 의심된다는 것이다.[13] 물론 이는 '고해성사 누설'이라는 교리적 문제에 관한 것이지, '자신을 신뢰한 사람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세속윤리적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빌렘이 안명근의 비밀을 누설한 것은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해성사 누설'이라는 교리적 논란은 그 근거가 TV드라마의 고증 오류에 있는 것으로서, 매우 잘못된 지적이다.[14]

4. 대중매체에서



[복수전공] [2] 이 때문에 그의 성씨는 독일어식이지만 이름은 프랑스어식이다.[3]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4] 두산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알자스-로렌 병합 당시 프랑스 국적 유지를 위한 절차를 밟지 않아 그때까지 독일 국적을 갖고 있어서, 이를 정정하기 위해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5]천주교 수원교구 왕림성당. 한강 이남 최초의 본당이다. 수원가톨릭대학교(신학대학)와 이웃해 있다. '갓등'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수원가톨릭대학교 음악(생활성가) 동아리의 이름이 '갓등중창단'이다.[6]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8대 교구장.[7] 심지어 형무소 측에서도 안중근의 요청을 허락하며 직접 교구에 서신을 보내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뮈텔 주교는 그것마저 거절했다.[8] 7성사를 집전하는 자격을 정지시키는 징계를 말한다. 7성사의 집권 권한은 주교에게만 있으며, 주교가 이를 신부들에게 위임해주는 형태로 신부들이 성품성사를 제외한 나머지 성사들을 집전할 자격을 얻게 된다. 만약 주교가 성무 자격 정지 징계를 내리면, 신부는 교회법상 합법적인 어떠한 성사집행도 할 수 없게 된다.[9] 이 대가로 조선총독부는 서울대교구(당시 경성교구)에 명동성당 앞 부지를 내주었다.[10] 발췌자 주석: 대구대목구(현 대구대교구)[11] 발췌자 주석: 안명근[12] 발췌자 주석: 당시 일본인의 성당 부지 침범에 관한 법정 소송을 말함.[13] 프랑스어 Confession과 Aveu는 모두 한국어 '고백'으로 번역이 되지만, 성사로서의 고백(즉 고해성사)는 Aveu가 아니라 Confession이다.[14] 위의 기사에서 드라마의 오류를 비판한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는 한국 가톨릭 입장에서 불편한 사실이 많이 적힌 《뮈텔 주교 일기》(번역: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사료적 가치를 주목하여 번역을 추진한 인물이다. 번역에 참가한 학자로써 그 사료에 실제로 기록되지도 않은 이야기가 세간에 떠도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15] 니콜라 빌렘 신부와 마찬가지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