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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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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황현/황현.jpg
본관 <colbgcolor=#fff,#191919>장수 황씨[1]
출생 1855년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
(現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758번지)#
사망 1910년 9월 10일 (향년 54세)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자택
자 / 호 운경(雲卿) / 매천(梅泉)
1. 개요2. 생애3. 기타4. 관련 문화재
4.1. 초상화와 사진4.2. 시, 책, 유품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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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吾無可死之義 但國家養士五百年 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 吾上不負皇天秉彝之懿, 下不負平日所讀之書. 冥然長寢, 良覺痛快. 汝曹勿過悲.)
자결에 앞서 남긴 유서 中

<매천야록>으로 유명한 구한 말의 재야 문인. 고향인 광양시에 이름에서 유래한 황현로와 호에서 유래한 매천로가 있다. [2]

광복 이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황현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05년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2. 생애

1855년(철종 6)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黃時默)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시대 명문가 중에 하나인 장수 황씨 가문 출신으로 직계 조상 중에 유명한 인물로 세종 대의 명재상인 15대조 황희임진왜란의 명장인 10대조 황진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인조반정 이후에 쇠락하였고 7대조 황임구(黃任龜)가 정6품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낸 이후로는 이렇다 할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황현이 출생할 당시에는 시골 유생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황현은 11세부터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1816~186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동문으로는 대종교로 유명한 나철, 계몽운동가 이기 등이 있다.

1888년(고종 25) 34세의 나이로 식년시 생원시에 1등 2위로 급제했는데# 이는 그가 상당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3] 쇠락해가는 가문 출신임에도 생원시 초시에는 차석을 따냈고 생원시 복시에서는 장원 급제를 하며[4] 성균관에 입학하였지만 과거장의 부패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조선의 대표적인 재야 인사가 된다. 그는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형제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쌓았고 특히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이를 크게 고평가했다.

전라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5]으로 이주한 황현은 그 곳에서 16년을 살면서 많은 저술 활동을 했는데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梧下記聞)으로 그 중 『매천야록』은 한국사 교과서에서 구한 말 시기의 참고 자료로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1902년 전라도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다시 이주한 황현은 을사조약 이후 자결한 조병세, 민영환 등의 애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를 지어 그들의 혼을 애도했는데 아래는 조병세의 죽음을 듣고 지은 시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어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민영환의 죽음에는 <혈죽>이라는 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추모했으며 일제에 빌붙은 친일파들을 조롱하는 시들을 지어 그들의 행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이후 황현은 1907년부터 전라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壺陽) 학교를 지어 신학문을 가르쳐 인재들을 양성하려 했지만 기울어가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대한제국의 주권이 박탈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황현은 맥수지탄의 심정을 담은 아래의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소주아편을 섞어 마셔 목숨을 스스로 끊었으니 향년 56세였다. 묘지는 고향인 전라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6]
亂離潦到白頭年(난리료도백두년)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지 못하였네.
今日眞成無可柰(금일진성무가내)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妖氣晻翳帝星移(요기엄예제성이)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久闕沈沈晝漏遲(구궐침침주누지)
구중궁궐도 침침하고 낮 누수(漏水) 소리만 길구나.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도 이제부터 다시는 없을 것이니,
琳琅一紙淚千絲(림랑일지루천사)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鳥獸哀鳴海嶽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찌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삼천리는 이미 물속에 잠겼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曾無支廈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나,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불시충)
그저 인(仁)을 이루고자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어라.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기껏 겨우 윤곡(尹穀)[7]을 뒤따름에 그칠 뿐,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그 때의 진동(陳東)[8]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럽도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9]은 황현의 자결을 듣고 시를 지어 황현의 죽음을 애도했다.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 / 이 시(詩)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 / 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 / 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

3. 기타

4. 관련 문화재

4.1. 초상화와 사진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황현 초상 및 사진
黃玹 肖像 및 寫眞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분류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수량/면적 초상1점, 사진2점
지정연도 2006년 12월 29일
제작시기 1911년
한말 어진 등을 그렸던 채용신(1850~1941)이 그린 황현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채용신이 황현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고, 황현이 1909년 서울의 천연당(天然堂)사진관[11]이란 곳에서 찍어 두었던 사진[12]을 채용신이 보고, 황현 사후인 1911년 5월에 그린 것이며, 초상화 한 점과 사진 두 점이 대한민국의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어 있다.
[clearfix]

4.2. 시, 책, 유품

황현이 직접 저술했던 『매천야록』을 비롯한 책들과 '절명시', 그리고 벼루, 안경 등 그의 유품들은 사후 동생과 후손들이 관리하다가 2019년에 모두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음은 해당 문화재 명칭과 번호들이다.[13]

5. 관련 문서



[1] 19세.[2] 매천역사공원[3] 황현보다 20년 아래인 이승만이나 김구조차도 과거에 응시해서 떨어진 전력이 있다.[4] 생원시 합격 후 바로 등용되는 관리가 현재로 치면 7급~9급 공무원이니 공무원 공채시험 최종 전국 수석 합격자로 생각하면 된다.[5] 군이 다르기는 하지만 황현의 고향인 서석촌에서 15km 정북에 위치한다. 섬진강 유역.[6] 매천역사공원[7] 중국 남송 대의 문인이자 진사로, 몽골의 남송 침입 당시 일족이 몰살당하자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그 뒤를 따라 자결했다.[8] 중국 북송 대의 문인. 흠종이 즉위하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나라를 바로잡을 것을 간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결국 죽임을 당했다. 진동의 예를 들어 나라가 아직 망하기 직전 죽음으로 간언하여 이를 바로잡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대목이다.[9] 1858~1924. 이건창의 동생으로 경술국치 이후 만주망명하였다.[10]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형하고 똑닮았다.[11] # 1907년 서예가인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12] 본 문서 맨 위에 있는 사진이다. 초상화와 비슷한 듯 다르다.[13] 당초에는 전부 한 번에 지정하려고 했지만, 문방구류와 생활유물들의 경우,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문화재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이후에 지정됨. 지정된 문방구류와 생활유물 내역은 당시 관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