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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명 | 원두우(元杜尤)[2] |
출생 | 1859년 7월 19일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사망 | 1916년 10월 12일 (향년 57세) |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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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직업 | 선교사 |
직책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연희전문학교 초대 교장 경신학교 초대 교장 |
배우자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3] |
자녀 | 호러스 오튼 언더우드[4] |
종교 | 개신교 (미국 북장로회) |
학력 | 뉴욕 대학교 (인문학과 / 졸업)[5] 뉴브런즈윅 신학교 |
1. 개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활약한 영국 출신의 미국 선교사.조선예수교장로회[6] 1대 총회장으로 대한민국 개신교의 교단인 장로회의 아버지다. 한반도에 장로회를 전도한 최초의 목회 선교사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7]인 연희전문학교와 경신학교의 설립자다. 언더우드가의 후손들도 현재까지 대한민국과 연세대학교에 대대로 기여하고 있으며 좋은 인연을 유지해오고 있다.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인데 이는 언더우드를 한자로 음차한 말로 당시 고종 황제가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명암이 분명한 연세대학교의 또 다른 설립자격 인물인 호러스 뉴턴 알렌과는 달리, 헨리 아펜젤러, 어니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후세 다쓰지, 조지 쇼, 메리 스크랜튼, 윌리엄 마튼 베어드, 앨버트 테일러, 소다 가이치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 은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2. 일생
2.1. 젊은 시절, 파혼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는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 대학교(NYU)를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 해 가을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까지 공부하였다.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당시 영미권의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되던 인도 제국에 건너가 목회 활동을 하기 위해 1년간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동아시아의 생소한 국가에 파견할 선교사 한 명을 찾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하는 약혼녀와 조선에 함께 가는 문제를 두고 나눴다는 대화이다."그곳에서는 무얼 먹고 사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산다는 것 뿐이오."[8] |
2.2. 조선에서 활동하다
그가 조선으로 건너가려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호머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인원 중 한명이였다.1885년 언더우드는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알렌이 조선 정부에 제출한 설립안에 의거해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설립 목적에는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당에서 언더우드는 영어,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8살 연상의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1921)과 1889년 3월 14일에 결혼했다. 이들의 신혼여행은 선교여행으로 평안도 지역으로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했다고 한다.
1887년 서울에서는 한국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평양부 일대 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이 해부터 거의 20년 동안 언더우드는 평안도 전역을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반복했고, 1891년 게일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여행에 합류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서북 지역에 선교활동을 했다.
1894년, 영국 출생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이 조선 정부와의 협상 끝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았고, 이로써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 선교 기관으로 재편됐다. 1900년,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 1838 ~ 1918)가 병원 건립을 위해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했다. 이 기금을 두고 평양부의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언더우드의 협조에 의해 갈등은 해결되었고, 1904년 제중원은 새로 지어졌으며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의 건립에도 언더우드의 공이 컸던 것이다.
번역과 교육에도 힘써서 입국한 직후부터 신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한국에 머문 30년 동안 한국어 자료를 모아 한불 사전, 한영 사전, 한영 문법을 편찬했다. 1885년에 입국하자마자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자 남학교인 원두우학당(구세학당, 경신학교를 거쳐 해방후 경신중,고등학교로 발전)을 설립했고, 1915년에는 고등교육기관인 경신학교 대학부(이후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로 발전)를 설립하였다. 영국 출신의 발명가이자 타자기 재벌이었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 1857~1937)가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 비용을 제공했다.[9]
그러나 평양부의 새로운 교회 설립, 경신학교 설립 작업과 번역 작업으로 후유증을 얻었고, 일제가 '조선의 모든 교육자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 시행령을 내리면서 일본어 공부까지 겹쳐 과로로 몸을 상하게 된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191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으며 요양했으나 결국 그 해 10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어록
제군들이 확고부발(確固不拔)의 정신을 갖고 신앙을 키워나가면 그 결과 언젠가 반드시 큰 성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바는 제군들이 한층 용기를 떨쳐 우리 교회를 성대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신애(信愛)하는 곳 한국이 순연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늘 유의하고 결코 한 시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1909년 9월 16일 종로 YMCA회관. |
… 파워 의사에 대한 소문이 한국인들 사이에 떠돌고 있어서 유감입니다. 우리는 곧 이 소문을 조사하겠지만, 한국인들은 새빨간 거짓말쟁이들이므로,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확인 절차를 거치려고 합니다. 헤론 부인은 다시 심하게 아픕니다. 그녀는 여자반을 가르칠 수 없어서 그녀가 나을 때까지 아내가 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 33 1889. 6. 10, 한국, 서울. 엘린우드 박사님께: 제가 지방에 가 있는 동안 한국인과 외국인들 사이에 유포된 파워 의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어 매우 유감스러웠습니다. 처음 제가 들은 바는 모두 한국인들에게서 나왔고, 저는 한국인들처럼 유명한 거짓말쟁이들로부터 나온 증거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 걱정되어, 약간 연기하도록 충고했습니다. 선교본부에 보낸 서신 <1889> 中 연세국학총서48 언더우드 자료집 I, pp. 164-165, 179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ISBN 89-7141-637-8) |
4. 후대의 평가
같은 조선에서 활동했지만 언더우드는 알렌과 달리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 방식을 지향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도 자기 잇속 챙기기 급급했던 알렌과는 달리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겸 교회 건물로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선교 방식과 교리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일제에 의한 압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로회에서는 최초의 장로회 선교사로, 연세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추앙하고 있으며 한국 개신교 역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1928년 연희전문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중에 일제가 포탄을 만든다고 동상을 뽑아가는 바람에 광복 이후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헌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상을 또 뽑아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3번째 동상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
5. 언더우드 가문과 한국
언더우드는 본인 뿐만 아니라 후손들 역시 한국과 연세대에 대대로 공헌하며 좋은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가문의 구성원 전원이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각 세대의 장남이며, 이게 이 집안의 업적 전부가 아니다.아래에 나오는 언더우드의 직계 후손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언더우드 역시 연세대에 기여한 바가 크다. 친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타자기 생산 기업을 세워 자수성가하였는데[10], 1917년 거액을 연전에 기부하여 그 기부금으로 신촌에 드넓은 교지를 매입하여 본관을 세울 수 있었다.
- 2대 -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1890년대생으로 언더우드 집안의 2대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신에 알렸다. 대학 인가를 받고 취임하게 된 연희전문학교장 시절에는, 자신이 미국 국적을 가졌기에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손에서 최현배, 정인보 등 한국어 학자들을 보호하면서 한국어 연구에 힘쓰게 했다. 또한 '한국의 배와 선박'이라는 저서를 통해 한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알리기도 했다.#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연희전문학교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교원 겸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윤재 박사와 한징 박사는 옥사한다.[11][12] 원한경 박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태평양 전쟁 직전에 일제를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51년 부산에서 한국 전쟁 구호 사업을 돕던 중 심장마비로 병사한다.
- 3대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
언더우드 집안의 3대가 되는 손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는 1917년에 태어나 한국 전쟁 당시에 유엔군으로 참전했으며, 정전 협정 당시에는 통역관을 맡았다. 전역 후에는 장로회 목사가 되었으며 장로회 계열 미션스쿨인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설립에 이바지한다. 연세대 이사를 역임하다가 2004년 1월에 한국 땅에서 삶을 마쳤다. 연세대 대학 교회 루스채플에 이 분의 이름을 딴 원일한홀이 있다.
- 4대 -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
언더우드 박사의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1943년생으로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인의 영어 교육론에 대해 연구했으며, 한미 교육 위원단장을 역임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인터넷 상에는 원일한 교수가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린 것으로 잘 못 기술되어 있는데 5.18 민주화운동을 알리고 군인 포격을 막기 위해 광주에서 머무르는 등 역할을 한 것은 원한광 교수이다. 참고1, 참고2 원한광 교수는 5.18 당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부교수였지만 당시 광주에 와서 광주 밖으로 나가라는 5공의 명령을 거부하고 체류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군부의 폭주를 막았으며 이를 해외로 알리려는 활동을 하여 이 직후 추방되었다. 그는 1987년 5공이 막을 내린 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학부장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2004년 아버지 원일한 박사가 작고한 후 2009년 언더우드 일가의 모든 고서 보관본과 근대사 자료를 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3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대부분은 2005년에 한국 땅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10월,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 고문의 영향으로 이사회가 교단 파송 이사에 대한 조항을 삭제[13]하게 되자, 조선일보가 연세대 법인의 지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또는 법인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쏟아져나왔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대까지 한국에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언더우드 박사의 3대손 피터 언더우드(Peter F. Underwood, 한국명 원한석) 씨와 4대손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A. Underwood, 한국명 원특한) 씨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협력을 얻어 연세대 사유화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6.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 동상.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관. 위 사진의 동상 뒤에 세워져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언더우드 일가 기념관도 운영 중이다.
해외 벽지나 오지 등 선교 활동이 어려운 지역에서 15년 이상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연 1회 언더우드 선교상을 시상한다. #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이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존재한다. 타교 국제학부와 비슷한 학부로 줄여서 UIC라 부른다. 일반적인 국제학부에 비해 단과대학 인원이 상당하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기숙사(Residential College)는 12개의 하우스(House)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언더우드 하우스가 있으며, 국제캠퍼스의 중앙도서관이 언더우드 기념도서관으로 명명되어 있다.
7. 경신고등학교의 기념 현황
경신고등학교 본관 앞에 위치한 조선인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의 언더우드 동상.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어 이름인 원두우(元杜尤)가 새겨져 있다.
1885년에 25세의 나이로 내한한 미국 선교사로서 이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육기관을 설립하시니 경신학교가 이에서 비롯되었도다. 처음 시작은 정동에서였으나 겨례의 수난과 함께 연지동으로 정능동으로 옮겨지다가 마침내 이 자리에 정착하여 오늘 맥 맥히 이어온 설립정신을 기리며 그의 슬기롭고 고귀한 모습을 가까이 하기 위해 여기 박사의 상을 세우노라. 언더우드 동상 설명문 |
8. 기타
그의 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가 바로 유명 타자기 브랜드 언더우드의 설립자이다. H. G. 언더우드가 선교 및 교육 지원 활동을 할 때 이 형이 준 자금이 큰 역할을 했다. 학교부지 20만 평의 구매자금 5만 3천 달러를 보냈으며 추가로 10만 달러를 보내서 현재 연세대학교 본관으로 쓰이는 언더우드 관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많은 타자기를 기증하기도 했다.[14]언더우드는 천주교에 꽤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언더우드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특히 성공회 선교사들을 제외한[15] 영국과 미국 출신 개신교 선교사 다수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는데[16] 자세한 이야기는 개신교/대한민국 문서를 참조.
고종이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하사한 사인참사검 1자루가 2016년 10월 11일 손자 원득한 박사에 의해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참고로 이 사인참사검은 2017년 6월 18일 TV쇼 진품명품 1101회에 나와 3억 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생전 성격이 거침없었다고 한다. 어릴 적 ‘넓은 날개’(wide wings)와 ‘불 동가리’(a bundle of fire)라는 두 개의 별명이 있었다.
언더우드가 뉴욕 대학교 인문학과를 졸업한 인연인지, 연세대학교는 뉴욕 대학교와 교환협정을 맺고 매년 교환학생을 상호 교환하고 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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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순 | |||||
남부 총회 | |||||
<rowcolor=#fff,#fff> 제1회 (32회) | 제2회[1] (33회) | ||||
이자익 | |||||
조선예수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33회[2] | 34회 | 35회[3] | |||
이자익 | 이자익 | 최재화 | |||
대한예수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35회[4] | 36회 | 37회 | 38회 | 39회 | |
최재화 | 권연호 | 김재석 | 명신흥 | 이원형 | |
<rowcolor=#fff,#fff> 40회 | 41회 | 42회 | 43회 | 44회[5] | |
이대영 | 전필순 | 노진현 | 이창규 | ||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 |||||
<rowcolor=#fff,#fff> 44회 | 45회 | 46회 | 47회 | 48회 | |
이창규 | 유재한 | 나덕환 | 이기혁 | 강신명 | |
<rowcolor=#fff,#fff> 49회 | 50회 | 51회 | 52회 | 53회 | |
김형모 | 김세진 | 김광현 | 김윤식 | 최거덕 | |
<rowcolor=#fff,#fff> 54회 | 55회 | 56회 | 57회 | 58회 | |
안광국 | 신후식 | 김종대 | 유호준 | ||
<rowcolor=#fff,#fff> 59회 | 60회 | 61회 | 62회 | 63회 | |
이상근 | 한완석 | 김만제 | 임택진 | 김두봉 | |
<rowcolor=#fff,#fff> 64회 | 65회 | 66회 | 67회 | 68회 | |
조원곤 | 박치순 | 고현봉 | 안경운 | 림인식 | |
<rowcolor=#fff,#fff> 69회 | 70회 | 71회 | 72회 | 73회 | |
박종렬 | 이종성 | 장종진 | 김형태 | 임옥 | |
<rowcolor=#fff,#fff> 74회 | 75회 | 76회 | 77회 | 78회 | |
박맹술 | 남정규 | 김윤식 | 한영제 | 김창인 | |
<rowcolor=#fff,#fff> 79회 | 80회 | 81회 | 82회 | 83회 | |
김기수 | 정복량 | 박종순 | 유의웅 | ||
<rowcolor=#fff,#fff> 84회 | 85회 | 86회 | 87회 | 88회 | |
이규호 | 박정식 | 최병두 | 최병곤 | 김순곤 | |
<rowcolor=#fff,#fff> 89회 | 90회 | 91회 | 92회 | 93회 | |
김태범 | 안영로 | 이광선 | 김영태 | ||
<rowcolor=#fff,#fff> 94회 | 95회 | 96회 | 97회 | 98회 | |
지용수 | 김정서 | 박위근 | 손달익 | 김동엽 | |
<rowcolor=#fff,#fff> 99회 | 100회 | 101회 | 102회 | 103회 | |
정영택 | 채영남 | 이성희 | 최기학 | 림형석 | |
<rowcolor=#fff,#fff> 104회 | 105회 | 106회 | 107회 | 108회 | |
김태영 | 신정호 | ||||
<rowcolor=#fff,#fff> 109회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04A3E7, #fff 20%, #fff 80%, #04A3E7)"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조선예수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1회 | 2회 | 3회 | 4회 | 5회 | |
<rowcolor=#fff,#fff> 6회 | 7회 | 8회 | 9회 | 10회 | |
김선두 | 이기풍 | ||||
<rowcolor=#fff,#fff> 11회 | 12회 | 13회 | 14회 | 15회 | |
김성택 | 이자익 | 임택권 | |||
<rowcolor=#fff,#fff> 16회 | 17회 | 18회 | 19회 | 20회 | |
김영훈 | 염봉남 | 차재명 | 홍종필 | 장규명 | |
<rowcolor=#fff,#fff> 21회 | 22회 | 23회 | 24회 | 25회 | |
남궁혁 | 장홍범 | 이인식 | 이승길 | ||
<rowcolor=#fff,#fff> 26회 | 27회 | 28회 | 29회 | 30회 | |
이문주 | 홍택기 | 윤하영 | 곽진근 | 최지화 | |
<rowcolor=#fff,#fff> 31회 | |||||
김응순 | |||||
남부 총회 | |||||
<rowcolor=#fff,#fff> 제1회 (32회) | 제2회[1] (33회) | ||||
이자익 | |||||
조선예수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33회[2] | 34회 | 35회[3] | |||
이자익 | 이자익 | 최재화 | |||
대한예수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35회[4] | 36회 | 37회 | 38회 | 39회 | |
최재화 | 권연호 | 김재석 | 명신흥 | 이원형 | |
<rowcolor=#fff,#fff> 40회 | 41회 | 42회 | 43회 | 44회[5] | |
이대영 | 전필순 | 노진현 | 양화석 |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 |||||
<rowcolor=#fff,#fff> 44회 | 45회 | 46회 | 47회 | 48회 | |
양화석 | 이환수 | 이수현 | 김윤찬 | ||
<rowcolor=#fff,#fff> 49회 | 50회 | 51회 | 52회 | 53회 | |
정규오 | 박찬목 | 김윤찬 | 김윤식 | 손계웅 | |
<rowcolor=#fff,#fff> 54회 | 55회 | 56회 | 57회 | 58회 | |
문재구 | 김창인 | 정규선 | 박성겸 | 박요한 | |
<rowcolor=#fff,#fff> 59회 | 60회 | 61회 | 62회 | 63회 | |
최동진 | 장성칠 | 황금천 | 이기하 | 한병기 | |
<rowcolor=#fff,#fff> 64회 | 65회 | 66회 | 67회 | 68회 | |
한석지 | 이영수 | 최성원 | 김현중 | 배재운 | |
<rowcolor=#fff,#fff> 69회 | 70회 | 71회 | 72회 | 73회 | |
최훈 | 박명수 | 안중섭 | 김길현 | 이성헌 | |
<rowcolor=#fff,#fff> 74회 | 75회 | 76회 | 77회 | 78회 | |
이성택 | 유인식 | 이봉학 | 이삼성 | 최기채 | |
<rowcolor=#fff,#fff> 79회 | 80회 | 81회 | 82회 | 83회 | |
김덕신 | 정석홍 | 김준규 | 신세원 | 길자연 | |
<rowcolor=#fff,#fff> 84회 | 85회 | 86회 | 87회 | 88회 | |
김도빈 | 김동권 | 예종탁 | 한명수 | 임태득 | |
<rowcolor=#fff,#fff> 89회 | 90회 | 91회 | 92회 | 93회 | |
서기행 | 황승기 | 장차남 | 김용실 | 최병남 | |
<rowcolor=#fff,#fff> 94회 | 95회 | 96회 | 97회 | 98회 | |
서정배 | 김삼봉 | 이기창 | 정준모 | 안명환 | |
<rowcolor=#fff,#fff> 99회 | 100회 | 101회 | 102회 | 103회 | |
백남선 | 박무용 | 김선규 | 전계헌 | 이승희 | |
<rowcolor=#fff,#fff> 104회 | 105회 | 106회 | 107회 | 108회 | |
김종준 | 배광식 | 권순웅 | |||
<rowcolor=#fff,#fff> 109회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663399, #7d5095 20%, #7d5095 80%, #663399)"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조선예수교장로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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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두 | 이기풍 | ||||
<rowcolor=#fff,#fff> 11회 | 12회 | 13회 | 14회 | 15회 | |
김성택 | 이자익 | 임택권 | |||
<rowcolor=#fff,#fff> 16회 | 17회 | 18회 | 19회 | 20회 | |
김영훈 | 염봉남 | 차재명 | 홍종필 | 장규명 | |
<rowcolor=#fff,#fff> 21회 | 22회 | 23회 | 24회 | 25회 | |
남궁혁 | 장홍범 | 이인식 | 이승길 | ||
<rowcolor=#fff,#fff> 26회 | 27회 | 28회 | 29회 | 30회 | |
이문주 | 홍택기 | 윤하영 | 곽진근 | 최지화 | |
<rowcolor=#fff,#fff> 31회 | |||||
김응순 | |||||
남부 총회 | |||||
<rowcolor=#fff,#fff> 제1회 (32회) | 제2회[1] (33회) | ||||
이자익 | |||||
조선예수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33회[2] | 34회 | 35회[3] | |||
이자익 | 이자익 | 최재화 | |||
대한예수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35회[4] | 36회 | 37회 | |||
최재화 | 권연호 | 김재석 | |||
한국기독교장로회 | |||||
<rowcolor=#fff,#fff> 38회 | 39회 | 40회 | 41회 | 42회 | |
김세열 | 박용희 | 박용희 | 구연직 | ||
<rowcolor=#fff,#fff> 43회 | 44회 | 45회 | 46회 | 47회 | |
강홍수 | 길진경 | 조승제 | 정규태 | ||
<rowcolor=#fff,#fff> 48회 | 49회 | 50회 | 51회 | 52회 | |
장하원 | 이해영 | 최문환 | |||
<rowcolor=#fff,#fff> 53회 | 54회 | 55회 | 56회 | 57회 | |
서정태 | 배성근 | 황희섭 | 조향록 | 박재석 | |
<rowcolor=#fff,#fff> 58회 | 59회 | 60회 | 61회 | 62회 | |
이준묵 | 인광식 | 은명기 | 권영진 | 조덕현 | |
<rowcolor=#fff,#fff> 63회 | 64회 | 65회 | 66회 | 67회 | |
윤재현 | 이국선 | 강신정 | 강명찬 | ||
<rowcolor=#fff,#fff> 68회 | 69회 | 70회 | 71회 | 72회 | |
송상규 | 이영찬 | 한상면 | 유병찬 | 기원형 | |
<rowcolor=#fff,#fff> 73회 | 74회 | 75회 | 76회 | 77회 | |
박봉양 | 윤기석 | 최희섭 | 김수배 | ||
<rowcolor=#fff,#fff> 78회 | 79회 | 80회 | 81회 | 82회 | |
김정현 | 배야섭 | 유재천 | 백형기 | 서정기 | |
<rowcolor=#fff,#fff> 83회 | 84회 | 85회 | 86회 | 87회 | |
강만원 | 이중표 | 김경식 | 윤기석 | 전병금 | |
<rowcolor=#fff,#fff> 88회 | 89회 | 90회 | 91회 | 92회 | |
김옥남 | 김동원 | 박원근 | 양태윤 | 임명규 | |
<rowcolor=#fff,#fff> 93회 | 94회 | 95회 | 96회 | 97회 | |
서재일 | 김현배 | 김종성 | 유정성 | 나홍균 | |
<rowcolor=#fff,#fff> 98회 | 99회 | 100회 | 101회 | 102회 | |
박동일 | 황용대 | 최부용 | 권오륜 | 윤세관 | |
<rowcolor=#fff,#fff> 103회 | 104회 | 105회 | 106회 | 107회 | |
김충섭 | 육순종 | 이건희 | 김은경 | 강연홍 | |
<rowcolor=#fff,#fff> 108회 | 109회 | ||||
전상건 | 박상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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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고등학교 교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호러스 언더우드 (원두우) | → | 2대 사무엘 오스틴 모펫 (마포삼열) | → | 제3대 프레더릭 밀러 (민노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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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fff><tablebgcolor=#ffffff> |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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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우 | 차재명 | 김영주 | 강신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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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익 | 이수영 | 이상학 | }}}}}}}}} |
[1] 철자로 인해 '호레이스'로도 알려져 있으나 해당 이름의 영어 발음은 [ˈhɒɹəs~ˈhɔɹəs\]로, '호러스'가 실제에 더 가깝다.[2] '언더우드'를 음차한 이름이다. 고종이 지어준 이름[3] KBS 역사저널 그날 '명성황후 실종사건' 편에서는 1895년 조선의 세입이 480만 냥인데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내이자 선교사인 릴리우스 언더우드에게 결혼 축의금으로 100만 냥을 주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후 이 주장의 오류와 왜곡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명성황후 문서 참조.[4] 한국식 이름 원한경[5] 총신대학교 박용규 명예교수의 칼럼에 따르면 인문학과(Department of Art and Science)생이었다고 한다.[6]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들의 전신. '대한예수교장로회' 명칭을 쓰지 않는 한국기독교장로회도 조선예수교장로회 계열이다. 반대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중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계열은 조선예수교장로회 계열이 직접 이어진 것이 아닌 자생교단이다.[7] 다른 하나는 훗날 세브란스병원 및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이어지는 제중원. 호러스 뉴턴 알렌이 설립했으며, 언더우드는 제중원 운영에도 관여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세의료원과 서울대학교병원 사이에 정통성 논란이 있기도 했다. 제중원 정통성 논란 문단 참조.[8] 당시 가톨릭의 경우 조선 후기에 남인, 소론 계열 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들어와 있었으나, 오랫동안 박해를 받으며 상당수가 순교하는 등 교세가 많이 쇠퇴하고 언더우드의 입국 1년 후인 1886년에 조선과 프랑스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은 후에야 신앙이 묵인되는 수준이었고, 개신교도 입장에서 조선은 신앙의 불모지였다.[9] 존 언더우드가 운영했던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는 최초의 근대식 타자기를 제조한 회사로, 타자기 역사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해당 항목[10] 1930-40년대 미국 추리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언더우드 타자기가 바로 이 기업에서 만든 타자기이다.[11] 결국 일제의 압박에 의해 연희 전문 학교에서 쫓겨나다시피 물러가게 되는데, 바로 이때 학교장을 꿰찬 이가 윤치호였다.[12] 이러한 역사의 상흔 때문인지, 연세대학교에는 아직까지 일어일문학과가 없다.[13] 미션스쿨인 연세대의 특성상 이 조항에 따라 이사회 가운데 1/3은 반드시 기독교단에서 이사를 보내도록 하게 되어 있었다.[14] 출처.[15] 성공회-천주교의 관계는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큰 불협화음 없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다.[16] 한반도만 그런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 천주교는 개신교를 열교, 이단이라면서 비난했고, 개신교 역시 천주교를 마리아나 숭배하는 종교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