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새문안교회 Saemoonan Presbyterian Chur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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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4487><colcolor=#ffffff> 설립일 | 1887년 9월 27일 |
소속국가 | |
소속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
소속노회 | 서울노회 |
위임목사 | 이상학 (2017 ~ 現) |
연도표어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주님의 사랑으로 행하라! (요한일서 4장 10-11절)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79 (신문로1가) |
링크 | |
1. 개요
대한민국의 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소속되어 있다. 조선 말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을 세운 미국의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1887년에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이며, '대한민국 개신교의 어머니교회'로 불리고 있다.# 김규식, 안창호, 최현배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19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지난 2019년 여섯 번째 예배당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역사
여성에 세례 주고 대의제 운영… 첫 선교사 '신촌 원씨'가 세운 어머니 교회 (조선일보 2025년 4월 4일)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하며 한국에 개신교 복음을 처음 전한 인물 중 하나였다. 언더우드는 입국 2년 후인 1887년 9월 27일, 한국인 세례교인 14명과 함께 교회의 조직을 갖추고 2인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로서 새문안교회를 창립하였다.
당회의 조직은 장로교회 전통의 대의제적 구조를 도입한 것으로, 이는 한국 사회에서 근대 민주주의적 제도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후 새문안교회는 신앙 규율을 엄격히 관리하며 교인 생활을 지도했으며, 1910년 당회록에는 첩을 들이거나 무속행위를 한 신도들을 제명한 기록도 남아 있다.
설립 초기부터 여성의 역할에도 주목하였다. 언더우드는 1888년 여성 신도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창덕’, ‘석은’, ‘영은’ 등의 이름을 부여하며 교회 내 지도력으로 양성하였다. 여성 조사와 권서를 통해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독려하였으며, 여성 성경 공부 모임도 활발히 운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언더우드의 아내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의 헌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 외에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한글 연구와 성경 번역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6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새문안교회 앞에는 1927년 장로교단 통합기념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운 ‘박사원두우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는 언더우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자 장로교회의 통합 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2.1. 언더우드 가문
"뉴욕 부호보다 선교사" 새문안교회·연세대 세우고 청년 교육 (조선일보 2024년 11월 23일)언더우드 가문은 19세기 말부터 한국 개신교 선교와 교육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가문으로, 특히 셋째 아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의 활약이 중심이 되었다. 영국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한 언더우드는 뉴저지의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해외 선교의 소명을 자각하였고, 1885년 조선에 도착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
가훈은 “불가능은 웃어넘기고,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말하라”였으며, 부모는 다섯 자녀 중 가장 총명했던 호러스에게 선교사 교육을 집중시켰다.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새문안교회(1887), 경신학교(1886), 조선기독교대학(1915, 연세대학교의 전신) 등을 세우며 복음 전파와 교육,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30여 년에 이르며, 선교 활동 중 고아였던 김규식을 돌보고 교육시킨 일화도 전해진다.
언더우드의 형 존 T. 언더우드(1857~1937)는 언더우드 타자기를 개발하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로, 20세기 초 타자기 시장을 석권하며 "당대의 스티브 잡스"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는 동생이 선교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위해 약 15만 달러를 기부하였으며, 이 중 일부는 연세대학교 본관인 석조 건물 ‘언더우드관’ 건립에 사용되었다.
1898년 형이 뉴욕으로 돌아와 사업을 도우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언더우드는 이를 거절하며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조선에서 영혼을 구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말했다. 이 일화는 언더우드가 자신의 소명을 얼마나 확고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1916년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고, 고향인 뉴저지주 노스버건의 그로브 개혁 교회 묘지에 묻혔다. 생전 그는 “조선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남겼지만, 가족은 그의 뜻을 따르기보다 장례비를 조선의 교육 기관 지원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999년에서야 언더우드의 유해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되었다.
언더우드 가문은 이후에도 4대에 걸쳐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가문의 전통에 따라 “언더우드가 해냈다”는 표현 대신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고 말하는 신앙적 겸손을 실천하고 있다.
2.2.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적 전환기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 (월간중앙 2020년 8월 20일)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입, 과 같은 정치적 혼란, 그리고 서구 문물에 대한 경계심이 혼재한 시기였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개신교의 유입은 단순한 종교 전파를 넘어 교육, 의료, 출판 등 근대화 전반에 영향을 끼친 복합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교육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개신교의 공식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직전의 갑신정변으로 인해 서양 문물에 대한 민심의 반감이 높았고, 아펜젤러는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반면, 언더우드는 순교의 각오로 한양에 남아 의료, 교육, 복음 선교를 병행하였다.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호러스 알렌을 도와 의료 실무에 참여하며 서양의학을 보급했고, 이후 고아원 겸 교육기관인 ‘언더우드 학당’(후일 경신학교)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김규식,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며 민족 계몽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자택에서 소규모 예배를 시작했고, 이를 통해 복음 선교도 점차 확산되었다.
한편,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과 병행하여, 성경을 한글로 번역·보급한 조선 지식인들에 의한 자생적 신앙 공동체도 전국 각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중 일부는 황해도 소래, 평양, 의주 등지에서 시작되어 선교사 도착 이전부터 선교 기반을 닦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 신자들과의 만남은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서 공식 선교를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1887년 새문안교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언더우드는 개성, 평양,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자생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들을 미국 북장로교 체제 안으로 통합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은 개신교가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장로교가 한국 개신교 내 주류 교단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수용은 외래 선교사에 의한 일방적 전파가 아니라, 조선 민중의 주체적인 신앙 수용과 한글 성경을 통한 자각적 접근의 결과로 평가된다. 이는 과거 불교·성리학·천주교의 전파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외래 종교가 정착하는 데 있어 민족적 자각과 지식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2.3. 연세대학교와의 관계
연세대 설립자는 언더우드?... 연세대 초기 역사 다룬 책 나와 (국민일보 2015년 4월 4일)새문안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연세대학교의 형성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연세대학교는 1957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통합을 통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각각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연희전문학교는 1885년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교에서 시작된다. 이 학교는 이후 경신학교 등으로 발전하며, 1915년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의 후원 아래 ‘연합기독교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라는 교명이 부여되며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설립에는 언더우드의 헌신적 노력과 함께, 그의 형 존 T. 언더우드가 제공한 부지 매입 자금과 건축비 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
-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는 1885년 미국 감리교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설립한 광혜원(같은 해 제중원으로 개칭)을 뿌리로 한다. 이 병원은 이후 서양의학 교육 기관으로 성장하였고, 1904년 미국 사업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의 기부를 받아 신축 병원을 건립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 병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언더우드가 제중원을 설립했다는 오해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이 같은 해인 1885년에 각각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언더우드는 의료 선교사 알렌을 도와 제중원에서 봉사한 바 있으나, 직접적인 설립자는 아니었다.
두 기관의 통합은 설립 초기부터 선교본부에서 논의되었으나, 실제 합병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7년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전후 복구와 대학 설비 확충이 시급했던 상황에서, 북미 선교본부들은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 통합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와의 3자 합동도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만 통합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연세대학교의 형성에는 언더우드와 알렌 두 인물의 역할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늘날 학계에서는 연세대학교의 공동 설립자는 언더우드와 알렌이라는 점이 보다 정확한 역사적 평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4. 기념비 및 건축물
2.4.1. 박사원두우기념비
여성에 세례 주고 대의제 운영… 첫 선교사 '신촌 원씨'가 세운 어머니 교회 (조선일보 2025년 4월 4일)1927년, 새문안교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교회 앞에 ‘박사원두우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업적을 기리는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한문과 영문이 혼합된 형식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언더우드를 사도 바울에 비유한 이 비석은 장로교가 교파 분열 이전의 통합적 정체성을 지녔던 시기의 중요한 사료로 간주된다.
2.4.2. 여섯 번째 예배당
새문안교회 (공간서가)새문안교회 건축에 표현된 사랑 (국민일보 2019년 3월 19일))
새문안교회는 설립 132주년을 맞은 2019년, 서울 광화문 인근 신문로1가에 새로운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이는 여섯 번째 교회당으로,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설계는 현상설계 지명공모를 통해 선정되었으며, 종교 건축의 권위자인 이은석 건축가 팀의 ‘하늘과 땅을 향해 두 팔을 펼친 어머니의 형상’을 모티프로 한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기존 한국 교회 건축에서 일반적이었던 기능주의 및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새문안교회 신축 예배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기독교 중심 가치를 건축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하나님 사랑: 건축물의 외형은 전통적인 첨탑 대신 하늘로 향하는 곡면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권위적 상징이 아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대예배실은 부채꼴 평면으로 설계되어 신도 간의 소통과 예배 참여를 강조하고 있으며, 66개의 ‘별빛 창’과 ‘바닥 조명’은 성경 66권을 상징한다. 파이프 오르간은 교회의 예배와 찬양의 중심성을 상징하는 요소로 예배당 정면에 배치되었다.
- 이웃 사랑: 교회 외부 공간은 전면이 움푹 들어간 마당과 아치형 게이트를 통해 시민들에게 개방된 휴식처 역할을 한다. 정면 로비는 광화문과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열린 동선을 갖추고 있으며, 다섯 번째 예배당의 외형을 축소 재현한 소예배실은 교회 역사관으로 활용된다. 이 공간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한편, 교육관 동은 상부에 투명한 유리 상자가 얹힌 형태로, 미래 세대의 교육 공간을 밝고 개방적으로 조성하였다. 옥상 정원과 최상층 전망 공간은 세계 여러 교회처럼 대중에게 개방된 상징적 장소로, 서울 도심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기념 공간으로 기능한다.
새문안교회의 여섯 번째 예배당은 도시 중심부에서 상업적인 경쟁 대신 ‘열고 비우고 펼치는’ 공간 구성으로 신앙의 본질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구현한 사례로 평가된다.
3. 예배시간
주일예배 | ||||
<rowcolor=#ffffff> 예배명 | 예배시간 | 장소 | 비고 | |
<colbgcolor=#fff,#1c1d1f> 1부 예배 | <colbgcolor=#fff,#1c1d1f> 오전 7시 30분 | <colbgcolor=#fff,#1c1d1f> 대예배실 | <colbgcolor=#fff,#1c1d1f> | |
2부 예배 | 오전 9시 | |||
3부 예배 | 오전 11시 | 영어 동시통역 | ||
4부 예배 | 오후 1시 | |||
5부 예배 | 오후 2시 30분 | 청년예배 | ||
오후 예배 | 오후 5시 |
평일예배 | ||||
<rowcolor=#ffffff> 예배명 | 예배시간 | 장소 | 비고 | |
<colbgcolor=#fff,#1c1d1f> 새벽기도회 | <colbgcolor=#fff,#1c1d1f> 오전 5시 | <colbgcolor=#fff,#1c1d1f> 새문안홀 | <colbgcolor=#fff,#1c1d1f> 월요일 ~ 토요일 | |
이른아침예배 | 오전 6시 30분 | 대예배실 | ||
화요기도회 | 오전 10시 30분 | 언더우드홀 | ||
수요일예배 | 오후 7시 | 대예배실 | ||
목요일예배 | 오후 12시 | 대예배실 | 직장인을 위한 예배 | |
금요기도회 | 오후 8시 10분 | 대예배실 |
4.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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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가 거주하며 교육/보육/의료 봉사기관들을 운영했던 정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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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한옥 양식 예배당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사택 (1887년 ~ 1895년) |
- 1887년
- 9월 27일: 제1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서상륜 외 14명의 조선인 성도와 존 로스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교회 설립
- 10월 2일: 조선인 성도 2명 장로 장립
- 1888년 10월: 한국교회사 처음으로 여성 교인 4명 세례 집례
- 1891년 9월: 주일학교 개교 (성도 100명, 학생 43명)
- 1893년: 곤당골교회 개척 (현재 승동교회)
- 1894년: 연못골교회 개척 (현재 연동교회)
- 1895년: 경희궁 건너편 한옥 구입, 성전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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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한옥 양식 예배당 (1895년 ~ 1910년) |
- 1896년: 잔다리교회 개척 (현재 서교동교회)
- 1898년: 제직회, 청년회 조직 (성도 531명, 학생 215명)
- 1906년: 노량교회 개척 (현재 노량진교회)
- 1907년: 현재 위치로 교회 이전
- 1910년: 벽돌 예배당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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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로마네스크 양식 벽돌 예배당 (1910년 ~ 19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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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고딕 양식 예배당 (1948년 ~ 1971년) |
- 1949년 9월 30일: 벽돌 예배당 증축
- 1950년: 김영주 담임목사, 김규식 시무장로 납북으로 당회장직 공석
- 1951년 6월 25일: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부산직할시로 피난 (교회당: 남성여자중학교)
- 1951년 12월 2일: 강태국 목사 임시당회장 부임
- 1955년 12월 1일: 제4대 강신명 담임목사 부임[2]
- 1972년 11월 26일: 예배당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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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모더니즘 양식 예배당 [3] (1972년 ~ 2014년) |
- 1981년 4월 25일: 제5대 김동익 담임목사 부임
- 2000년 9월 17일: 제6대 이수영 담임목사 부임
- 2007년 9월 30일: 교회건축위원회 조직
- 2008년 8월 15일: 새성전 건축 설명회
- 2014년 8월 25일: 구성전 철거 시작
- 2015년 8월 30일: 새성전 기공예배
- 2017년 9월 1일: 제7대 이상학 위임목사 부임
- 2019년 4월 21일: 새성전 입당예배
- 2019년 11월 23일: 새성전 준공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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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뉴모더니즘 양식 예배당[4] (2019년 ~ 현재) |
5. 영상
6. 기타
- 교회 설립 초기의 명칭은 '정동예배당', '정동교회'로 불리다가 1895년 교회 이전 후 '신문내 제일예배당', '서대문교회'로 불렸고, 1910년 현재의 위치로 교회를 이전할 때 비로소 '새문안교회'로 명명되었다. 이름의 유래는 근처에 위치했던 돈의문을 세종대왕 당시 새로 옮겨 세웠는데, 그 이름을 '새문'이라고 불렀고 안쪽에 위치한 동네의 이름을 '새문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 민주화운동 시기에 학생운동이 심화될 때 청년층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가 있었으며 심지어 대학부 공간에 화염병과 같은 시위 용품까지 만들어 보관했었다. 이들은 교회의 과거 친일행적에 대해 비판적이였고 교회가 이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친일 간부들의 후손들도 그대로 다니고 있었기에 이들과의 사이가 무척 껄끄러웠다.
- 국회의원 유승희는 남편인 유종성 교수와 대학부에서 만나 결혼하였다.
- 교회음악으로 유명하다. 김영환, 김원복, 김인식, 독고선, 장수철, 홍난파와 같은 첫세대 서양음악가들이 다니기도 하였고 예본찬양대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교회음악교육원도 운영 중에 있으며 성도 중에 음악 전공자가 상당히 많다.
- 본당에는 까사방 프레르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파이프 수는 4,340개이다. 그리고 예전에 예본찬양대의 오르가니스트가 신동일 교수였다.
- 교회는 종로에 있지만 종로에 사는 사람은 많지 않고 성도들이 다양한 지역에 거주 중이다. 집에 늦지않게 들어가기 위해 오후 10시 이전까지는 모임을 끝내려는 분위기가 있다.
- 친교실은 지하 2층에 있으며 화~주일 아침과 점심 시간에 운영한다. 식권은 식권발매기를 통한 카드결제 방식으로 구매 가능하며 현금 사용은 불가능하며 가격은 3,000원이다. 음료수 자판기와 커피머신도 있다.
- 교회 바로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어 쉴 수 있고 1층의 새문안홀에서는 시민을 위해 정기적으로 종교문화예술 작품을 무료로 전시하고 있으며 화~주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새문안교회 역사관도 탐방 가능하다.
- 여섯 번째 예배당은 여러 차례 국내외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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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idon의 『The World's Best Architecture』 작품집 표지 |
[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 [2] 영락교회 동사목사직을 사임하고 부임했다.[3] 보이다시피 마당에 종이 있다. 매 주일마다 치는 종은 아니고 신년 크리스마스 등에만 쳤었다. 그동안 마지막 황세손으로 알려진 건축가 이구의 작품이라고 구전되어 왔기 때문에 예배당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 면적을 확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 예배당 보존을 검토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도면에 기재된 설계자가 이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철거가 확정되었다.[4] 종교건축의 권위자인 이은석 건축가가 서인건축과 함께 설계했다. 건축과정에서 교회가 여러 이유로 건축가가 제안한 초기 설계안을 많이 수정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건축가의 원안에서 유지된 독특한 외부 곡면(파사드)이 이 건물의 국제 건축계의 주목을 이끌었고, 많이 수정된 내부공간에 대해선 외부에서 느끼는 감동에 못 미친다는 의견이 많다. 이은석 건축가의 원안대로 지어졌다면 건물의 완성도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의견과 원안의 일부라도 유지되어 도시미관을 해치지 않게되어 다행이라는 의견이 건축계에 혼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