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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0 06:05:32

새문안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새문안교회
Saemoonan Presbyterian Church
파일:새문안교회 로고.svg
파일:새문안교회_정면.jpg
<colbgcolor=#024487><colcolor=#ffffff> 설립일 1887년 9월 27일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소속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노회 서울노회
위임목사 이상학 (2017 ~ )
연도표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주님의 사랑으로 행하라!
(요한일서 4장 10-11절)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79 (신문로1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역사
2.1. 언더우드 가문2.2.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적 전환기2.3. 연세대학교와의 관계2.4. 기념비 및 건축물
2.4.1. 박사원두우기념비2.4.2. 여섯 번째 예배당
3. 예배시간4. 연혁5. 영상6. 기타

1. 개요

대한민국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소속되어 있다. 조선 말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을 세운 미국의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87년에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이며, '대한민국 개신교의 어머니교회'로 불리고 있다.# 김규식, 안창호, 최현배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19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지난 2019년 여섯 번째 예배당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역사

여성에 세례 주고 대의제 운영… 첫 선교사 '신촌 원씨'가 세운 어머니 교회 (조선일보 2025년 4월 4일)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하며 한국에 개신교 복음을 처음 전한 인물 중 하나였다. 언더우드는 입국 2년 후인 1887년 9월 27일, 한국인 세례교인 14명과 함께 교회의 조직을 갖추고 2인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로서 새문안교회를 창립하였다.

당회의 조직은 장로교회 전통의 대의제적 구조를 도입한 것으로, 이는 한국 사회에서 근대 민주주의적 제도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후 새문안교회는 신앙 규율을 엄격히 관리하며 교인 생활을 지도했으며, 1910년 당회록에는 첩을 들이거나 무속행위를 한 신도들을 제명한 기록도 남아 있다.

설립 초기부터 여성의 역할에도 주목하였다. 언더우드는 1888년 여성 신도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창덕’, ‘석은’, ‘영은’ 등의 이름을 부여하며 교회 내 지도력으로 양성하였다. 여성 조사와 권서를 통해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독려하였으며, 여성 성경 공부 모임도 활발히 운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언더우드의 아내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의 헌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 외에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한글 연구와 성경 번역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6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새문안교회 앞에는 1927년 장로교단 통합기념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운 ‘박사원두우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는 언더우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자 장로교회의 통합 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2.1. 언더우드 가문

"뉴욕 부호보다 선교사" 새문안교회·연세대 세우고 청년 교육 (조선일보 2024년 11월 23일)

언더우드 가문은 19세기 말부터 한국 개신교 선교와 교육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가문으로, 특히 셋째 아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의 활약이 중심이 되었다. 영국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한 언더우드는 뉴저지의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해외 선교의 소명을 자각하였고, 1885년 조선에 도착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

가훈은 “불가능은 웃어넘기고,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말하라”였으며, 부모는 다섯 자녀 중 가장 총명했던 호러스에게 선교사 교육을 집중시켰다.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새문안교회(1887), 경신학교(1886), 조선기독교대학(1915, 연세대학교의 전신) 등을 세우며 복음 전파와 교육,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30여 년에 이르며, 선교 활동 중 고아였던 김규식을 돌보고 교육시킨 일화도 전해진다.

언더우드의 형 존 T. 언더우드(1857~1937)는 언더우드 타자기를 개발하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로, 20세기 초 타자기 시장을 석권하며 "당대의 스티브 잡스"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는 동생이 선교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위해 약 15만 달러를 기부하였으며, 이 중 일부는 연세대학교 본관인 석조 건물 ‘언더우드관’ 건립에 사용되었다.

1898년 형이 뉴욕으로 돌아와 사업을 도우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언더우드는 이를 거절하며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조선에서 영혼을 구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말했다. 이 일화는 언더우드가 자신의 소명을 얼마나 확고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1916년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고, 고향인 뉴저지주 노스버건의 그로브 개혁 교회 묘지에 묻혔다. 생전 그는 “조선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남겼지만, 가족은 그의 뜻을 따르기보다 장례비를 조선의 교육 기관 지원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999년에서야 언더우드의 유해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되었다.

언더우드 가문은 이후에도 4대에 걸쳐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가문의 전통에 따라 “언더우드가 해냈다”는 표현 대신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고 말하는 신앙적 겸손을 실천하고 있다.

2.2.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적 전환기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 (월간중앙 2020년 8월 20일)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입, 과 같은 정치적 혼란, 그리고 서구 문물에 대한 경계심이 혼재한 시기였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개신교의 유입은 단순한 종교 전파를 넘어 교육, 의료, 출판 등 근대화 전반에 영향을 끼친 복합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교육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제물포에 도착하면서 개신교의 공식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직전의 갑신정변으로 인해 서양 문물에 대한 민심의 반감이 높았고, 아펜젤러는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반면, 언더우드는 순교의 각오로 한양에 남아 의료, 교육, 복음 선교를 병행하였다.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호러스 알렌을 도와 의료 실무에 참여하며 서양의학을 보급했고, 이후 고아원 겸 교육기관인 ‘언더우드 학당’(후일 경신학교)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김규식,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며 민족 계몽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자택에서 소규모 예배를 시작했고, 이를 통해 복음 선교도 점차 확산되었다.

한편,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과 병행하여, 성경을 한글로 번역·보급한 조선 지식인들에 의한 자생적 신앙 공동체도 전국 각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중 일부는 황해도 소래, 평양, 의주 등지에서 시작되어 선교사 도착 이전부터 선교 기반을 닦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 신자들과의 만남은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서 공식 선교를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1887년 새문안교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언더우드는 개성, 평양,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자생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들을 미국 북장로교 체제 안으로 통합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은 개신교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장로교가 한국 개신교 내 주류 교단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수용은 외래 선교사에 의한 일방적 전파가 아니라, 조선 민중의 주체적인 신앙 수용과 한글 성경을 통한 자각적 접근의 결과로 평가된다. 이는 과거 불교·성리학·천주교의 전파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외래 종교가 정착하는 데 있어 민족적 자각과 지식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2.3. 연세대학교와의 관계

연세대 설립자는 언더우드?... 연세대 초기 역사 다룬 책 나와 (국민일보 2015년 4월 4일)

새문안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연세대학교의 형성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연세대학교는 1957년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통합을 통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각각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언더우드가 제중원을 설립했다는 오해는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 병원이 같은 해인 1885년에 각각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언더우드는 의료 선교사 알렌을 도와 제중원에서 봉사한 바 있으나, 직접적인 설립자는 아니었다.

두 기관의 통합은 설립 초기부터 선교본부에서 논의되었으나, 실제 합병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7년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전후 복구와 대학 설비 확충이 시급했던 상황에서, 북미 선교본부들은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 통합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와의 3자 합동도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만 통합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연세대학교의 형성에는 언더우드와 알렌 두 인물의 역할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늘날 학계에서는 연세대학교의 공동 설립자는 언더우드와 알렌이라는 점이 보다 정확한 역사적 평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4. 기념비 및 건축물

2.4.1. 박사원두우기념비

여성에 세례 주고 대의제 운영… 첫 선교사 '신촌 원씨'가 세운 어머니 교회 (조선일보 2025년 4월 4일)

1927년, 새문안교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교회 앞에 ‘박사원두우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업적을 기리는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한문과 영문이 혼합된 형식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언더우드를 사도 바울에 비유한 이 비석은 장로교가 교파 분열 이전의 통합적 정체성을 지녔던 시기의 중요한 사료로 간주된다.

2.4.2. 여섯 번째 예배당

새문안교회 (공간서가)
새문안교회 건축에 표현된 사랑 (국민일보 2019년 3월 19일))

새문안교회는 설립 132주년을 맞은 2019년, 서울 광화문 인근 신문로1가에 새로운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이는 여섯 번째 교회당으로,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설계는 현상설계 지명공모를 통해 선정되었으며, 종교 건축의 권위자인 이은석 건축가 팀의 ‘하늘과 땅을 향해 두 팔을 펼친 어머니의 형상’을 모티프로 한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기존 한국 교회 건축에서 일반적이었던 기능주의 및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새문안교회 신축 예배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기독교 중심 가치를 건축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편, 교육관 동은 상부에 투명한 유리 상자가 얹힌 형태로, 미래 세대의 교육 공간을 밝고 개방적으로 조성하였다. 옥상 정원과 최상층 전망 공간은 세계 여러 교회처럼 대중에게 개방된 상징적 장소로, 서울 도심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기념 공간으로 기능한다.

새문안교회의 여섯 번째 예배당은 도시 중심부에서 상업적인 경쟁 대신 ‘열고 비우고 펼치는’ 공간 구성으로 신앙의 본질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구현한 사례로 평가된다.

3. 예배시간

주일예배
<rowcolor=#ffffff> 예배명 예배시간 장소 비고
<colbgcolor=#fff,#1c1d1f> 1부 예배 <colbgcolor=#fff,#1c1d1f> 오전 7시 30분 <colbgcolor=#fff,#1c1d1f> 대예배실 <colbgcolor=#fff,#1c1d1f>
2부 예배 오전 9시
3부 예배 오전 11시 영어 동시통역
4부 예배 오후 1시
5부 예배 오후 2시 30분 청년예배
오후 예배 오후 5시

평일예배
<rowcolor=#ffffff> 예배명 예배시간 장소 비고
<colbgcolor=#fff,#1c1d1f> 새벽기도회 <colbgcolor=#fff,#1c1d1f> 오전 5시 <colbgcolor=#fff,#1c1d1f> 새문안홀 <colbgcolor=#fff,#1c1d1f> 월요일 ~ 토요일
이른아침예배 오전 6시 30분 대예배실
화요기도회 오전 10시 30분 언더우드홀
수요일예배 오후 7시 대예배실
목요일예배 오후 12시 대예배실 직장인을 위한 예배
금요기도회 오후 8시 10분 대예배실

4. 연혁

파일:새문안1.png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가 거주하며 교육/보육/의료 봉사기관들을 운영했던 정동
파일:New Greetings Church in Joseon(Old Korea) by H. Underwood.png
첫 번째 한옥 양식 예배당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사택 (1887년 ~ 1895년)
파일:새문안교회_두번째.png
두 번째 한옥 양식 예배당
(1895년 ~ 1910년)
파일:새문안2.png
세 번째 로마네스크 양식 벽돌 예배당
(1910년 ~ 1949년)
파일:새문안3-2.jpg
네 번째 고딕 양식 예배당
(1948년 ~ 1971년)
파일:새문안4.jpg
다섯 번째 모더니즘 양식 예배당 [3]
(1972년 ~ 2014년)
파일:새문안교회_하늘.png
여섯 번째 뉴모더니즘 양식 예배당[4]
(2019년 ~ 현재)

5. 영상

6. 기타

파일:Screenshot Capture - 2023-03-22 - 14-22-33.png
Phaidon의 『The World's Best Architecture』 작품집 표지

[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 [2] 영락교회 동사목사직을 사임하고 부임했다.[3] 보이다시피 마당에 이 있다. 매 주일마다 치는 종은 아니고 신년 크리스마스 등에만 쳤었다. 그동안 마지막 황세손으로 알려진 건축가 이구의 작품이라고 구전되어 왔기 때문에 예배당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 면적을 확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 예배당 보존을 검토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도면에 기재된 설계자가 이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철거가 확정되었다.[4] 종교건축의 권위자인 이은석 건축가가 서인건축과 함께 설계했다. 건축과정에서 교회가 여러 이유로 건축가가 제안한 초기 설계안을 많이 수정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건축가의 원안에서 유지된 독특한 외부 곡면(파사드)이 이 건물의 국제 건축계의 주목을 이끌었고, 많이 수정된 내부공간에 대해선 외부에서 느끼는 감동에 못 미친다는 의견이 많다. 이은석 건축가의 원안대로 지어졌다면 건물의 완성도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의견과 원안의 일부라도 유지되어 도시미관을 해치지 않게되어 다행이라는 의견이 건축계에 혼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