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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작위 거부자 8인 | |
대한제국 내부대신 유길준 兪吉濬 | Yu Kil-chun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자 | 성무 (聖武 / 盛武) |
호 | 구당 (矩堂), 천민 (天民) 구일 (矩一) |
출생 | 1856년 (철종 7년) 11월 21일[1] |
한성부 북부 양덕방계 계생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 |
사망 | 1914년 9월 30일 (향년 57세)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신장염과 과로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병사 | |
본관 | 기계 유씨[2] |
직업 | 관료, 외교관, 작가 |
학력 | 게이오기주쿠 (중퇴) 덤머 아카데미 [3] 중퇴 |
종교 | 유교 (성리학)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주요 경력 |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내무협판 한성부민회 회장 내부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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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화기 조선의 정치가. 본관은 기계, 호는 구당(矩堂)·천민(天民)·구일(矩一), 서울특별시 출신이다. 갑오개혁의 중심이 된 개화파인 동시에 일각에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추정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구한말까진 일본 제국에 호의적이었지만,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려 하자 을사조약과 한일 병합 조약을 반대했고 일제의 남작 작위도 거절해 박영효 등처럼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다.[4]
2. 생애
15세부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과 함께 공부했다.1881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에 참가해 근대 시기 '최초의 조선인 일본 유학생' 이 되어 일본의 유명한 문명 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원 아래 경응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유학 시기의 모습 |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접고 1883년 귀국해서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를 발간하다가 서양 사절단인 보빙사의 일원으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었다.[5]
이때 유길준은 보빙사 임무가 끝난 뒤에도 미국에 남아 매사추세츠 주의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 [6]에서 유학길을 밟아 '최초의 조선인 미국 유학생' 이 되었다. 조선 정부가 출발할 때부터 합법적으로 인정한 케이스는 아니고 보빙사 수장이던 민영익의 허가 아래 국비 유학생으로 눌러앉았다. 유길준은 최초의 유학생이기는 했지만 미국에 온 지 2년여, 입학한 지 4개 만에 귀국해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유길준이 보스턴 대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있으나 정작 보스턴 대학 입학자 명단[7]에는 유길준이 없고, 유길준이 수학했던 거버넌스 아카데미 개교 기념 팜플렛[8]과 학적 기록을 보면 유길준은 이곳에 1884년 9월[9]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덤머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4개월만에 조국의 정변으로 귀국하기 위해 중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길준이 살았던 바이필드[10] 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34마일[11]떨어진 곳으로 통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즉, 보스턴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 것[12]이 보스턴 대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와전 된 것이다[13]. 따라서 '최초의 조선인 미국 대학 졸업생' 은 1891년 학사 학위를 취득한 같은 보빙사로 수원시 출신이던 변수.[14]
그러나 낯선 땅에 이방인 홀로 있으니 후원에도 불구하고 생활고나 냉대 등 이래저래 고생은 좀 한 것으로 보이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미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1년간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다 1885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동자들과의 친분 탓에 체포되어[15] 죽을뻔한 것을 한규설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모면하고[16] 한규설의 식객으로 수 년간을 연금 상태로 지내게 된다.
1885년에서 1887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 당시에는 '조선 중립화론'도 조심스레 발표해보지만 큰 반향없이 무시당했다.[17] 이 때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처럼 서구권 정보에 대한 <서유견문> 같은 책들을 1885년부터 집필해 모아놨다가 10년 후인 을미개혁 때 출판하게 된다.
갑오개혁이 시작되던 1894년 비로소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여 내무부를 맡으며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담당하는 등 개혁파의 큰 손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친일 성향이 강했던 을미개혁 때는 대대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을 밀어붙였다가[18] 수많은 유림들이 유길준을 비토하게 만든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고종에 의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을미사적(김홍집,[19]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으로 지목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다만 을미사변 당시 유길준이 협력했다는 것은 윤치호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심증 수준이지만 여러 정황상 유길준이 의심받는 것 또한 사실. 유길준 본인은 흥선대원군이 을미사변을 꾸민 것으로 편지 등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데 지금도 여러 의견이 갈리는 부분.
1902년 일본 유학생 중 게이오의숙을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교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심회(一心會)'와 연결해 의친왕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20]를 기도하기도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은 다 끔살되었다. 이 일은 국제 분쟁으로 비화되어 유길준은 일본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오가사와라 섬에 4년간 유배를 당한다.
1907년 고종 폐위 후에는 귀국해 흥사단 부단장, 한성부민회장을 역임하였는데 귀국 이후에도 '근대화의 스승'이라며 일제를 나쁘게 평가하진 않았다. 그런데 보통 이런 테크를 탄 경우에는 대부분 을사조약 이후에는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친일로 전향해서 '대일본 제국 반자이'를 외치기 마련이지만 유길준은 의외로 일진회의 '한일 합방론'을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조일수호조규 이후로 일본은 꾸준히 조선의 독립국 직위를 유지시키려 하였지만 조선이 잘못해서 보호국이 된 것'이라며 을사조약을 두둔하는 듯한 양비론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망해가는 조선에 대한 자조섞인 디스였을지도 모른다. 1910년 국권 상실 후에는 일제의 남작 작위도 거부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직후 '민간인 사죄단'을 이끌기도 하고 <친일파 99인>에 따르면 본인이 작위는 거절했으나 고종과 순종의 권유라면서 은사금 일부는 받았다고도 한다.
말년의 모습 |
1914년 향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길준의 가족들은 대부분 친일파였는데 동생 유성준[21]과 첫째 아들 유만겸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낸 거물급 친일파에 속하고 둘째 아들 유억겸은 그래도 '합법적 공간'에서 신간회 등의 독립운동을 했었지만 1938년 '흥업 구락부 사건'을 전후해 친일파로 변절했다. 하지만 유억겸은 광복 후 연희대학교(오늘날 연세대학교) 총장, 문교부(오늘날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여 그런 사실들은 덜 알려진 편이다. 유각경은 그의 조카이다.
3. 사상과 저서
유길준의 사상 중 하나로는 조선의 실정에 맞춘 개화를 해야 한다는 일명 '실상개화(實狀開化)'가 있다. 기존의 상고주의 사관에 반대해 문명은 미개화 - 반개화 - 개화의 단계를 거쳐 꾸준히 진보한다는 '문명 진보 사관'을 제시하였다.[22] 서재필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본 것이 인상적이었던지 '군민공치'를 주장하면서 상공업 진흥, 근대적 조세와 화폐, 근대 교육에 앞장섰다.다만 입헌군주국을 주장하면서도 군주권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유길준에 대한 평가는 보수적 근왕주의 개혁가에서 급진적 사회 변혁가까지 널을 뛰는 편이다. 이런 평가는 서유견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이런 모순성이야말로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의 시대적 특징이자 현실적 한계였다고 볼 수도 있다. 속내야 어찌됐든 밖으로는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판국이니 말이다.
노동야학회 고문 유길준 씨 고문의 말씀: "여보(이보시오), 나라 위하여 일하오. 또,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노동자의 대답: "네. 고맙소. 그리하리다"
본인이 쓴 '노동야학독본'의 한 장면이다.노동자의 대답: "네. 고맙소. 그리하리다"
유길준의 저서로는 서유견문, 구당시초, 대한문전, 노동야학독본, 조선문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서유견문은 최초의 한글 조사를 사용한 국한문 혼용 도서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단순한 서구 여행기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모습을 보고 우리 체질에 맞는 근대화 방안을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방략서로 지금 봐도 배울 점이 있을 수 있는 양서이다. 다만 지나치게 서양에 경도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23]
허나 알고보면 유길준이 온전한 서구주의자는 아니었는데 상인의 대도에서도 개화의 등급을 논하면서 개화가 온전한 나라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개화는 실상과 허상으로 구분되며 개화는 자신의 처지를 잘 헤아려 행해야 한다고 했다. 개화는 남의 것을 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는 것이며 무조건 서양의 것이라고 행하는 것은 개화의 변질,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내용 외적으로 보면 이 책을 통한 저자의 목적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일단 책이 나온 다음 고종에게 바쳐서 정책화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실패.[24] 이후 조선에서는 금서가 되었고 일본에서 찍었는데 그 책들도 판매용이나 배포용은 아니고 갑오개혁과 갑신정변에 대한 자신의 정책 홍보용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 출판되었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기존 종속 체제인 청나라에 대한 사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지만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이후 영향을 받은 갑오개혁에서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초기 개화파들의 방향성을 그대로 규정해버렸다.
유길준의 유물로 항상 입던 검은 정복과 남작 작위 사퇴서, 틀니가 있는데 이 유물들은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 음력 10월 24일[2] 자산공파(慈山公派) 시조 36세손 '濬'자 항렬.[3] 현재명 더 거버넌스 아카데미[4] 친일파이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닌 경우.[5] 보빙사 일행은 조선인 최초로 전기를 경험하였는데 유길준은 이 때 "인간이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전기가 켜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도 처음 타 본 장본인이었는데 당시에는 엘리베이터 문이 감옥처럼 철문으로 되어 있다보니 유길준은 자기를 가두는 줄 착각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미국에서 제대로 문화충격을 받게 된 유길준은 이후 개화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된다.[6] 1763년에 설립된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기숙학원이다. 2005년에 거버너스 아카데미로 개칭되었다.[7] 이와 관련한 보스턴 대학교 학내 기사[8] 보스톤 코리아 관련기사[9] 미국은 첫 학기가 가을에 시작한다.[10] 최초 정착지는 세일럼이었으나 고등교육을 위해 이사하였다. 유길준이 1885년에 애드워드 모스에게 보낸 편지의 소인도 이곳으로 되어있다. 만약 유길준이 보스턴 대학교에서 수학중이었다면 소인은 보스턴으로 찍혀있어야 했다.[11] 약 54km[12] 정확히 말하면 보스턴 근교[13] 심지어 기록상으로 유길준이 입학하고자 했던 학교는 하버드 대학교이지, 보스턴 대학 진학은 준비하지도 않았다.[14] 미국 연방 공무원(농무성)으로 있다가 학위를 받은 1891년 열차 사고로 사망해 더이상 전하는 이야기가 없다.[15] 조선 이전에 일본에 들러서 김옥균을 만나 "자신은 뭐가 됐든간에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한 후 귀국했다. 다만 이 때가 이미 유럽을 1년 정도 여행하다 왔을 때라는게 포인트.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조선 사정을 염탐한 것이 자신의 안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16] 정치적 사건으로 받은 판결은 아무래도 형량이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기는 하다. 운빨이 미친다는 것. 유길준이 그랬고 후일의 이승만도 그랬다. 유길준은 석방, 이승만은 도서관 차려놓고 선교사 불러다가 공부했던 범털. 다만 당장 사건이 벌어진 직후라면 얄짤없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갑신정변 실패 후 고종을 호위하다 살해당한 홍영식이다.[17]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지리적 요충지면서 상대적 약소국인 벨기에나 스위스처럼 조선도 요충지이기 때문에 잘 대처한다면 그들처럼 영구적인 중립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유길준은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다른 열강들이 조선을 중립국으로 놔둘 생각이 별로 없었고 이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우울한 지정학적 숙명으로 남아 있다.[18] 유길준은 짧은 머리가 편하고 위생적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것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유길준의 저서 등을 보면 갑신정변 등을 겪으며 일종의 '우민 경멸론' 비슷한 생각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민중을 계몽보다는 개조시키려는 생각이 강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취지의 정책도 어떻게 공감을 얻고 과정을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한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다.[19] 최후가 비장하다.[20] 이른바 일심회 사건. 당시 의친왕은 미국 로어노크 대학에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쿠데타 모의와는 무관했다.[21] 나무위키 내에 있는 문서는 동명이인의 문서이고 해당 인물의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22] 후쿠자와 유키치가 저서 "문명론의 개략" 등에서 같은 주장을 앞서 제시한 바 있다.[23] 이 점에서 유길준의 사상은 일반적인 사회진화론과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대표작인 서유견문도 이런 측면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당시의 민중들까지도 우매하다고 멸시하는 내용이 있다.[24]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인간을 간신히 처벌 안하는 수준에서 넘어갔더니 다시 정책 제안하겠다고 글을 올린 것이다. 이건 내용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당시 정국상 받아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