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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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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 漢城旬報 Hanseong sunbo (Hanseong Ten-Daily) | ||
<colbgcolor=#bf1400><colcolor=#fff> 국가 | 조선 | |
창간 | 1883년 10월 1일 (음력) | |
종간 | 1884년 10월 9일 (음력) | |
설립기관 | 통리아문 박문국 | |
종류 | 순보, 관보, 잡지 | |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05호 | ||
한성순보 漢城旬報 Hanseong sunbo (Hanseong Ten-Daily)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 | |
수량 / 면적 | 1식 | |
지정연도 | 2012년 10월 17일 | |
시대 | 1883년 10월 31일 ~ 1884년 10월 9일 | |
소유자 (소유단체) | 문화재청 | |
관리자 (관리단체) |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
<colbgcolor=#bf1400> 《한성순보》 제6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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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최초로 한국인이 발간한 근대 신문이다. 1883년(고종 20년) 10월 1일(음력) 서울 저동의 통리아문 박문국(統理衙門博文局)에서 발행한 월 3회 발간된 순보(旬報)로, 매월 1일 자로 간행되었다. 모든 문장이 한문으로 작성된 점이 특징이다.2. 역사
1882년(고종 19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 일행이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신문 제작을 도울 기자와 인쇄공 등 일본인 몇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귀국하여 곧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받은 박영효는 자주 궁중에 출입하면서 고종에게 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신문발간을 진언했다. 그 이전에도 조보라는 신문이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지만 했지만 이는 일반 백성이 아닌 왕족이나 전현직 관료계층에 한정되어 배포된 것이었고, 민간발행이 1577년에 실행된 적이 있었지만 이는 300년 전의 일이었고 3개월만에 중단되었다. 박영효는 이를 확대해서 글을 아는 식자층들도 신문을 읽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그래서 1883년(고종 20년) 2월 28일에 고종은 한성부에서 맡아 신문을 간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 해 4월 박영효가 갑자기 광주유수로 좌천당하면서 신문 발간작업은 일단 중지되었다. 박영효의 부탁으로 신문 발간의 실무작업을 맡고 있던 유길준도 이때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물러나고 말았다.
급진적인 개화론자들에 의한 신문 발간은 중단되었으나, 그 의지는 수구파의 신임을 받고 있던 온건개화론자들이 다시 이었다. 즉, 통리아문의 장교였던 김만식이 〈통리아문장정(統理衙門章程)〉에 있는 "동문학(同文學)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신문보사를 개설한다."는 규정을 들어 신문 발간을 추진했고, 1883년(고종 20년) 8월 17일 고종은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허락했다. 박문국의 초대 총재로는 외아문독판 민영목, 부총재로는 동 협판 김만식이 임명받았고, 이와 아울러 부사과 김인식이 신문 발간 실무책임자로 임명받았으며, 장박·오용묵·김기준·강위·주우남·현영운·정만조·오세창 등이 각각 주사 또는 사사 직을 맡았다. 이들 주사 및 사사가 근대적인 신문기자의 전신이었다.
그 밖에도 박영효 등이 일본에서 데려온 이노우에도 주재로 다시 고용되어 신문간행작업은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9월 20일 저동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실무작업을 추진하여 창간호를 내놓았다. 이 신문은 '순보서'에서 "우리 조정에서 관청을 만들어 외국신문을 널리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사건도 실어서 나라 안에 배포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시세를 살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며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도리에 맞게 구해서 바른 것을 잃지 않는다면, 박문국을 개설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취지를 거의 달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사 내용은 크게 내국 기사와 각국 근사의 기사로 나누어졌다. 내국 기사로는 관보·사보·시치탐보를 싣고 있으며, 각국 근사 기사로는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전쟁이나 분쟁, 근대적인 군사 장비나 국방 방책, 개화 문물 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각국 근사 기사 가운데는 의회 제도나 자유민권사상 등을 소개한 기사도 있으나 수적으로는 매우 적다. 관보의 경우는 주로 《조보》에서 기사를 취재, 보도했다. 각국 근사 기사는 《신보(申報)》 · 《호보(滬報)》 · 《중외신보(中外新報)》 · 《순환보(循環報)》 등 청나라의 신문에서 주로 번역, 전재했는데, 이들 신문 외 《시사신보(時事新報)》 · 《동경일일신보(東京日日新報)》 · 《보지신문(報知新聞)》 등 일본의 신문과 기타 여러 나라의 신문 기사를 번역하여 보도했다.
관영신문의 성격을 지닌 이 신문은 발행 직후 각 관아에 배포하여 관리들이 읽게 했으며, 관아에서는 1부당 동화(銅貨) 50문(文)을 신문값으로 박문국에 납부했다. 이 신문은 관리 외 일반인도 구독할 수 있었는데, 한성에서는 박문국에 직접 구독을 신청했고, 지방에서는 경저(京邸)에 연락하여 구독했다.
이 신문은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박문국 사옥과 활자 · 인쇄시설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려 부득이 1년 만에 종간되었으며, 그 뒤 1886년(고종 23년) 1월 25일에 《한성주보(漢城周報)》로 그 제호를 바꾸어 주간신문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한성순보》는 비록 짧은 기간 발간되었으나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서, 외세에 대한 경계의식과 자국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는 한편, 개화 문물과 지식 등을 국내에 소개하여 나라의 개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년 동안에 40여 호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창간호에서부터 제36호(1884년 10월 9일자)까지만 남아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3. 여담
[1] 해당 호지의 첫 기사는 부산 전신선 설치 소식을 전하면서, 전기 기술의 대략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