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23:20:26

대한신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경성신문
京城新聞
경성일보
京城日報
경향신문
京鄕新聞
국민신보
國民新報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대한민보
大韓民報
대한신문
大韓新聞
독립신문
獨立新聞
만세보
萬歲報
매일신문
每日新聞
제국신문
帝國新聞
한성순보
漢城旬報
한성신보
漢城新報
한성주보
漢城周報
황성신문
皇城新聞
협성회회보
協成會會報
}}}}}}}}} ||

대한신문
大韓新聞
<colbgcolor=#000><colcolor=#fff> 국가
[[대한제국|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소재지 한성부 남서 회동 85통 4호
창간 1907년 7월 18일
종간 1910년 9월 1일
설립 이인직
사장 이인직
총무
겸 발행인
겸 편집인
신광희
주필 최영수
종류 일간신문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1907년(광무 11년) 7월 18일에 창간한 신문.

2. 상세

천도교에서 만든 신문 《만세보》가 경영난에 빠져 종간하자, 이인직이 자본금 2만 원을 들여 인수한 뒤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인 《대한신문》으로 개편했다. 당연히 논조는 친일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친일파들이 장악한 탁지부에게서 매월 500원 씩 보조금을 받았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에는 《국민신보》, 《한성신보》 등과 같이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열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에 국권을 빼앗긴 후 '대한(大韓)'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어지자, 다음 날인 8월 30일부터 《한양신문(漢陽新聞)》으로 신문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과 그 이틀 뒤인 9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자신들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병합하여 폐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