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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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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남작
대한제국 법부대신
김가진
金嘉鎭
파일:독립운동가 김가진.webp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성명 김가진(金嘉鎭)
자 / 호 덕경(德卿) / 동농(東農)
본관 신 안동 김씨[2]
출생 1846년 2월 24일 (음력 1월 29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 신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3]
사망 1922년 7월 4일[4] (향년 76세)
중화민국 상하이시
주요 경력 조선 공조판서
조선 주일본전권공사
조선 농상공부대신
대한제국 궁내부 특진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대한제국 법부대신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
작위 조선귀족 남작[5]
종교 유교(성리학)
서훈 미서훈[6]

1. 개요2. 생애
2.1. 조선의 외교관으로서2.2. 대한제국 대신으로서2.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3. 독립문 글씨의 진짜 주인인가?4. 갤러리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말의 개화파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외교사적으로는 한국 최초의 재외공관 상주 외교관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는 한때 조선의 사절로 일본 막부(幕府)에 파견되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나는 그가 쉽게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아주 짧은 시간에 실제로 며칠 내에 영어를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도 했다.


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는 열렬한 개혁가였고 서구 문명을 극찬했다. 그의 가장 큰 희망은 얘기로만 숱하게 들어 왔던 영국미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같은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날 아침, 그는 사소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왕명으로 가장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한국 혹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7]

1846년 2월 24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 신교(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의 신 안동 김씨 세도가에서 아버지 김응균(金應均, 1801. 1. 6 ~ 1875. 4. 28)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문충공 김상용의 11대손으로, 아버지가 예조판서를 역임한 세도가의 인물이었으나 어머니(? ~ 1853)가 첩이었던 탓에 서얼이었으므로 과거 응시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1877년 서얼들에게 허용된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신설되자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다.

강직한 반청자주의 신념을 가졌기에, 리훙장의 기록에 따르면 1884년 고종명성황후를 알현한 면전에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배격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41세 되던 1886년(고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이 되었으나, 같은 해 청나라 배격을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가 적발, 위안스카이의 압력을 받아 전라도 남원도호부로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톈진에 잠시 파견되었다가, 1887년 주일공사관이 개설되자 그를 눈여겨 본 고종의 특별한 낙점을 받아 초대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일본행에 올랐다. 초대 공사 민영준이 국서만 일본에 전달한 뒤 그냥 귀국해버리자, 뒤이어 주일공사가 된 김가진은 공사관 개설부터 모든 외교 업무를 직접 처리하며 사실상 최초의 재외공관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주일 청국 공사 리수창(黎庶昌)은 상국 공사에게 와서 부임신고를 하라는 뜻으로 김가진을 불렀다. 김가진은 이를 굴욕으로 여겨 안 가고 버티다가 1년만에 청국 공사관을 방문했는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김가진은 4년간 일본에 주재하면서 일본을 통해 서양 산업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을 구해서 조선으로 보내고, 유학생들 뒷바라지에 애썼다. 울릉도에 불법으로 상륙해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 목재업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청국공사 왕펑짜오(王鳳藻)가 “동양의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라고 하자, 김가진은“조선은 오랜 역사와 사직(社稷)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탄무계(荒誕無稽)하게 우리를 욕하고 타국에 예속되었다고 하는가?”라며 맞받아치기도 하였다.

1890년 10월에는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가 김가진에게 수 년 전 남대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방문이 걸린 일을 상기시키며, 조선은 반독립국(半獨立國)이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때 김가진은 “조선은 요(堯) 임금 때부터 국가임금이 있었다. 설혹 중국에 패하였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다. 중국과의 사행(使行, 책봉과 조공을 위한 사신행차)은 실익(實益)은 조선이 챙기고 중국은 명분만 가져간다. 조선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도 자주(自主)한다.”라는 말로 맞서기도 하였다.#

2.2. 대한제국 대신으로서

1891년 귀국해 안동대도호부사(정3품)를 역임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 개전의 시발점인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시 안경수와 함께 일본군에 협력하여, 경복궁 내에서 저항하던 조선군에게 저항을 중지하고 투항하라는 거짓 왕명을 전달했다. 이후 갑오개혁에도 참여했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8]을 지내며 독립협회 창설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 개최에 참여했으며, 1900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9]을 지냈으며, 1902년에는 한글 학교를 설립하고 법부대신[10]을 맡았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충청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고, 1907년 규장각 대제학을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1910년 경술국치일본에게서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그의 행적은 일본에 설설 기며 호의호식하는 다른 조선귀족과는 달랐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한 조선민족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10월 의친왕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몰래 망명시키려 준비했다가 중간에 발각되었고, 기왕 들킨 거 눈치 볼 것도 없겠다 아예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후 임정과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가 상하이로 망명하는 것을 도운 사람은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선 독립운동가 조지 쇼이다.

이때 나이가 이미 74세였는데, 신념을 떠나 육체적으로 이미 허약해지기 쉬운 시기임에도 거친 풍찬노숙의 길을 택한 것. 이후 임정과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조선 국왕과 대한 황제에게 충직했던 유신(遺臣)이었음에도 왕조 복벽(復辟)을 주장하지 않고 민국(民國)의 일원임을 자처했으며, 평생을 외교관으로서 살아 왔음에도 외교론보다는 무장 투쟁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의 유연성과 과감함이 빛난다. #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나창헌·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분명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내다 버리고 독립 운동에 참가 했다. 한국의 조선귀족 중엔 정말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 다만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작위는 공식적으로 박탈된 것이 아니어서 죽어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1922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김가진은 독립 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11]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자신은 작위 문제 등으로 서훈은 받지 못했으나,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을 서훈을 대신 주었으니 어느 정도 독립운동의 결실은 이룬 것. 또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도 그의 항일 행적을 인정하여 사전에 김가진은 등재하지 않았다. 현대로 치면 국가정보원 블랙 요원으로 활동했듯이 상하이 임시정부 블랙 요원으로 활동했기에 대놓고 서훈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대로 말하면 화이트 요원으로 활동했다면 서훈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게 중론인데, 조선귀족 출신이었던 그의 입장에서 화이트 요원이 되기란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다.

묘소는 상하이의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 묘지는 1984년 쑹칭링 능원 외국인 묘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신규식, 박은식 등의 독립운동가들도 이 곳에 장례를 지냈다. 그러나 김가진의 묘는 따로 묘지석을 비롯한 표시가 없어서 유해를 찾을 수 없다.

3. 독립문 글씨의 진짜 주인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독립문 편액 글씨는 이완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손자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 건의 주장을 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돈의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 · 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년 ~ 1922년)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년 ~ 1991년)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중앙SUNDAY 기사에서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씨가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로써 그는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전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 후원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금마문, 폄우사, 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김가진이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황제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그러나 독립문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김가진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4. 갤러리

파일:김가진.jpg
파일:김가진().jpg
파일:김가진(나름대로 잘 나가던 시절).jpg
파일:김가진(관복).jpg
대례복을 입은 모습 백운장에서 관직 생활 때 모습 관복을 입은 모습
파일:IE002456923_STD.jpg
파일:김가진(().jpg
파일:김가진_초상화.jpg
파일:IE002465431_STD.jpg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때 노년의 모습 대례복 초상화 김가진
초상화[12]

5. 대중매체에서



[1] 1910년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작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1922년 사망했을 때 남작 작위는 습작 불능 처리되었다. 또한 뒤늦게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했다.[2] 문충공 상용(尙容)파 26세 진(鎭) 항렬.[3] #[4] 음력 5월 10일.[5] 독립운동 활동으로 예우가 제한되었고 습작 불능 처리되었다.[6]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받지는 못했으나, 김가진의 셋째 아들 김의한과 김의한의 부인 정정화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7] 신복룡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8] 오늘날의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9] 오늘날의 국회의장.[10]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11] 석연치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 김가진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공식적으로' 작위를 반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일제는 직접 나와서 반납하라고 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바로 억류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제하고서라도 김가진 본인이 남작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쉽게 말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작위는 작위로 보지도 않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침투 등 공작활동에 용이하기 때문에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게 낫기도 하다.[12] 새비지 랜도어가 그렸다.[13] 몇째 아들인지 확실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