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에 대한 내용은 이병무(작곡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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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 |
본관 | 전주 이씨 (全州) |
출생 | 1864년(고종 1) 2월 8일 |
충청도 공주목 (현 충청남도 공주시) | |
사망 | 1926년 12월 8일 (향년 62세) |
직업 | 정치가, 관료 |
종교 | 유교(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비고 |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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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군인.1907년 7월에 체결된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7명[1]의 친일파에 포함된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이다. 고종을 협박하고 대한제국군 해산과 의병 진압에 앞장섰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으로 활동한 친일 행적을 지니고 있다.
2. 생애
1864년 2월 8일 충청도 공주목(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욋괴진 병마첨절제사(夞怪鎭兵馬僉節制使:종3품)를 지낸 아버지 이긍한(李肯漢)[2]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자혁(尹滋赫)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음력으로는 1월 1일생. 정종의 서자인 무림군의 후손이며 일본군 보병 중좌를 지낸 이병규(李秉規)의 형이다.
1886년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했으며 당시에 의친왕 이강을 따라 일본으로 간 뒤 친일파가 되었다. 1894년 9월 보빙대사 의화군 이강을 수행해 일본으로 가서 1894년 10월 일본 육군 교도단에 입학했는데 1895년 5월 교도단을 졸업한 직후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파견을 가 공부하였고 1896년 3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무관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1896년 4월 육군 보병 정위로 임관되어 육군무관학교 교관과 교두를 겸임했다가 1897년 6월 7일 육군 보병 참병으로 진급했다. 1899년 6월부터 북정지방대대 대대장, 1900년 7월 북청진위대대 대대장을 거쳐 10월까지 진위 제5연대 제2대대 대대장을 지냈다가 친일 행위로 2년간 구금을 당하기도 하고 1900년 유배를 가기도 했다.[3]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04년 6월 육군 보병참령으로 복관되었다. 1904년 7월 육군무관학교 교관, 1904년 8월 군제 의정관을 거쳐 1904년 9월에 육군 보병연대부령으로 진급해 육군무관학교 교장과 육군유년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1905년 4월 육군 보병정령으로 승진했으며 1905년 7월 군부 교육국장에 임명되었고 1905년 12월에는 육군 참장으로 진급해 육군 교육국장에 보임되었다. 1906년 1월에는 보빙대사 완순군 이재완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인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 5월 육군 부장으로 진급했고 이완용 내각이 성립하면서 군부대신에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군부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지시를 받고 일본 헌병 70여 명을 대궐에 진입시켜 고종 황제를 강박해 선위를 강요하려다가 참령 임재덕이 일본군의 입궐에 완강히 항거하자 임재덕을 법원에 구속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는데 칼을 들고 자기 목에 대는 시늉을 하며 겁박했다.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참여해 이완용, 임선준, 이재곤, 고영희, 조중응, 송병준과 함께 정미칠적으로 지탄받았다.
1907년 7월 순종을 압박해 군대 해산 조칙을 받아낸 후 대한제국군을 해산했고 이에 저항해 궐기한 군인과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는 등 국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부대를 탄압했다. 같은 달 시종무관장 임시 서리 사무, 1907년 8월에는 군법 회의 판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 10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는데 일본 황태자 영접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 1908년 10월 도쿄에 있는 황태자 이은의 생일 문안차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육군 특별 대연습을 배관하고 돌아왔다. 1909년 7월 대한제국의 군부(현재의 국방부)를 폐지하고 설치한 친위부 장관에 임명되어 1910년에는 시종무관장을 겸임했는데 시종무관장이 육군 부장[4]에 해당하는 계급자가 보임되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계급도 중장급임을 알 수 있다.
1910년 8월 시종무관장 겸 친위부 장관으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 회의’에 참석해 가결함으로써 이재면 - 황실 대표, 이완용 - 총리대신, 박제순 - 내부대신, 조중응 - 농상공부대신, 고영희 - 탁지부대신, 민병석 - 궁내부대신, 윤덕영 - 시종 원경, 조민희 - 승녕부 총관과 함께 경술국치를 주도한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일본군에 편입됐고 최종 계급은 일본군 중장이었으며 1925년 10월에 종 3위 자작이 되었다. 1926년 4월에 있었던 순종의 국장 때 장의위원장을 지냈고 떵떵거리며 살다 1926년 12월 8일 사망했다. 사망 당일 정3위로 '욱일동화 대수장'이 추서되었으며 작위는 1927년에 양자인 이홍묵(1895~1960)[5]이 이어받았다.
3. 여담
만평 《利劒一柄武士儀(리검일병무사의) - 벌거벗고 환도 찼군...》 |
- 화가이자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가인 관제 이도영(1884~1933)이 1909년 9월 2일자 <대한민보>에 기고한 만평으로 유명하다. 제목의 볼드체의 한자를 이으면 '리병무'[6]가 되는데 당시 유명한 친일파 군인이었던 이병무를 조롱한 것.
- 나라를 팔아 철저히 일제에 충성한 덕분에 1907년 훈1등 욱일장, 1912년 한국 병합 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 대례 기념장에 추서되는 등 일제로부터 훈장을 많이 받았다. #
-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그의 증손자가 1992년 환경부 차관, 1988년 국무총리 비서실장, 2005년 웅진그룹 부회장을 지낸 이진이다.(걸그룹 핑클의 멤버인 이진이 아니다.)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이진 웅진 그룹 부회장 아무리 친일파 후손들에게 연좌제를 물을 수 없다고는 해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은 조상들의 과거 친일 행적에는 나몰라라 하며 그들이 물려준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정계와 경제계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뒷맛이 매우 씁쓸한게 사실.
4. 둘러보기
1864년 ~ 1926년 | |
<colbgcolor=#2e8b57><colcolor=#fff> 복무 | <colbgcolor=#8fbc8f>조선군 대한제국군 일본군 |
기간 | 1894년~? |
임관 | 무과 급제 |
최종 계급 | 일본군 중장 |
최종 보직 | ? |
[1] 고영희, 송병준, 이병무, 이완용, 이재곤, 임선준, 조중응.[2] 초명 이정한(李晶漢).[3] 이 때 일본에 있던 망명자에게 국내 사정을 알려준 혐의로 파직되어 2년간 미결수로 구금되었다가 1902년 1월부터 1904년 2월까지 전라남도 관찰부 지도군 고군산군도로 유배되었다.[4] 현재의 육군 중장.[5] 이홍묵은 1950년에 반민특위에 의해 공민권 3년 정지를 구형받았다.[6] 이병무라고도 읽는다.[7] 특이하게도 개화파 출신 매국노였다.[8] 우연히도 이들은 송병준을 제외하면 모두 정미칠적 + 경술국적에 들어가는 인물이기도 하며, 송병준도 정미칠적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