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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5 14:28:18

육군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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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입장4. 교육 과정5. 동문

1. 개요

陸軍武官學校. 대한제국에서 신식 군대의 장교를 교육하던 양성 기관. 사관학교이다. 임시 정부 같은 경우에도 육군무관학교를 두긴 했다.

통제영학당을 대한 제국의 해군사관학교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통제영학당은 근대적인 사관 양성 학교이긴 했지만 1893년에 생겨 1894년에 사라졌으므로 대한제국 해군의 사관학교는 아니었다. 즉, 대한제국에 해군사관학교는 없었다.

2. 역사

1881년 창설된 별기군의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1]는 장교 양성을 위해 사관 생도대를 설치할 것을 조선 왕실에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881년 9월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사관생도를 모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2월 즈음에는 140명의 사관생도가 교육 중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일어난 구식군의 저항인 임오군란으로 사관생도대는 해체된다.
파일:조선 말 별기군.png
청일전쟁(1894) 전후 조선군 모습, 출처 : 르 몽드 일뤼스트레 1894년

1883년 조미 수호 조약에 의거 조선 정부는 미국에 군사 교관 파견을 요청했지만 당시에는 청나라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1886년 톈진 조약으로 양 군이 물러가자 1888년 미국은 윌리엄 다이(William McEntyre Dye) 준장[2] 등 4인의 퇴역 장교로 구성된 군사 교관단을 파견하였다. 다만 이들 중에 다이 준장만이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커민즈 대령과 닌스테드 대령, 리 소령[3]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파일:external/image2.findagrave.com/9743647_137444135782.jpg
윌리엄 다이 준장. 이집트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DC에서 경찰청장으로 일했는데 1888년 셰리던 장군이 그를 고종에게 교관으로 추천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교관들이 입국하자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치하여 다시 사관생도를 모집하고 훈련을 시작하였는데, 문제는 근대식 편제 및 장교 계급 체계에 정부 각료와 조선군 내에서 일본식이라며 도입에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근대식 군대 체계가 갑신정변을 이끈 급진개화파들이 일본을 통해 주도적으로 들여온 제도다 보니 갑신정변의 여파로 조선에서 도입을 꺼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연무 공원은 1894년에 일본군청일전쟁 중에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폐지된다. 다만 다이는 1899년까지 고종의 측근에서 군사 업무를 보좌했고 그 해에 미국으로 돌아가 죽었다.

연무 공원이 해체되면서 남은 것은 훈련대의 사관 양성소 뿐이었다. 청일 전쟁 중에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기 위해 한성에 주둔하던 친군영과 교전을 벌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 후 김홍집 내각을 세워 갑오개혁을 실시하고 일본군 주도하에 새로 군을 편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훈련대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Kusunose_Yukihiko_ca.1913.jpg
훈련대는 일본군 중령 쿠스노세 유키히코(楠瀬 幸彦, 1858년 - 1927년)[4]를 교관으로 두었다. 일본식 교육 제도로 훈련대는 기존의 3군영에서 인원을 징발하여 훈련을 시켰는데 1895년 말까지 6개 대대 7,800명 규모의 상비군을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못 가고 을미사변으로 폐지된다.

1896년 1월 11일에야 육군무관학교의 전신 무관학교가 세워진다. 사실 대한제국군이란 이름은 아직 아니었지만 일단 신식군의 장교를 양성한다. 아관파천이 일어나 한동안은 유명무실했지만 고종이 환궁한 뒤에 타군의 개입을 받지 않도록 운영한다. 비록 러일전쟁으로 곧 실패하지만 말이다. 이 무관학교는 다섯 명을 임관시켰다. 사관생도는 무관학도라 불렸다. 1898년에 정비하여 육군무관학교란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교직원 숫자는 교장 1인에 교관 4명, 조교 10명, 번역관 및 주사 등으로 총 20명 수준으로 사관학교라기엔 다소 작은 규모였다. 1898년 6월에 1기 200명을 모집했는데 1,700명이 지원하였다. 입교일은 다들 며칠씩 차이가 났는데 1기의 임관일이 1900년 1월 19일로 정해진 걸 볼 때 1년 6개월 정도의 교육 기간으로 현재의 3사관학교보다 짧았다.

1899년 11월엔 다시 법령이 바뀌어 교직원이 39명으로 늘어났으며 응시 연령도 낮아졌다. 그리고 현재의 생도대에 준하는 학도대(學徒隊)를 설치하였다. 1900년 1월 19일에 장연창 등 128명의 무관 학교 1기가 졸업 시험을 통과하여 참위로 임관하였다.

1900년 9월에는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교직원을 70명으로 늘렸으며 학도대 밑에 중대 몇 개를 추가해 인원을 늘릴 것을 시사했다. 오늘날의 교육을 맡은 교수부와 훈육을 맡은 생도대처럼 무관 학교의 교육 체계를 교관단과 학도대로 이원화하였다. 교장도 초기에는 영관급이 맡았으나 이 즈음에 가서는 참장[5]까지 상승한다. 다만 국운이 흔들리는 탓인지 무관학교를 이탈하는 인원도 자주 나와 1900년 9월엔 학도 집단 이탈로 학교장 대리인 백성기 참장, 학도대장 이희두 참령, 학도대 중대장 신우균, 민영재, 조의범 정위, 당직 사관 김성계 참위 등이 직위 해제되었다.
파일:별기군 군사훈련.png
1904년 서울 훈련원에서 유럽 교관에 의해 훈련받고 있는 한국군대라고 한다. 유럽인 교관은 프랑스 하얀 군모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프랑스 교관임을 알 수 있다. 훈련원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27에 있다.

1909년 폐지될 때까지 28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기록에 따라서는 500명을 배출했다는 곳도 있다. 이 중 14명은 한일합방 당시에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

3.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입장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공식적으로 무관학교를 자교의 전신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다. 식민 통치로 단절된 기간으로 인해 육군무관학교 육사의 형성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는 육군사관학교 30년사와 50년사에 공통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육사 21기 출신의 예비역 대령 조승옥은 저서 <육군사관학교: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에서 육사의 이러한 주장을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길러낸 인재들은 다시 한국광복군독립군의 군인들을 길러냈으며 그들이 다시 창군기의 인물들을 배출하였다는 것이다. 동시에 무관학교의 마지막 졸업생들 중에서 국군에 재입대한 10명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육사와 무관학교는 연결점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 때문에 조승옥 대령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정통성을 연무공원에서부터 소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중 김경천, 지청천, 신팔균[6]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참가하여 독립군양성에 활약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나중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제국군의 연결성을 찾을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7]

​우리나라 청년들이 한일합방 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처음 입교한 것은 1912년(제 26기)이었으며 일제는 그 후 단속적으로 입교시키다가 중일전쟁 후 종전까지는 해마다 입교시켰다. 이들은 일본군 중위때 독립군에 가담한 11기의 노백린[8], 김희선 15기의 유동열[9], 이갑, 23기의 김경천[10], 26기의 지청천[11], 조철호 27기 이동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군으로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12]
제 11기[13] 윤치성[14], 노백린*[15], 김관현[16] 강용희[17], 권승록[18], 권호선[19], 김교선[20], 김규복[21], 김상설[22], 김성은[23], 김형섭[24], 김홍남[25], 김홍진[26], 김희선*[27], 방영주[28], 어담[29], 이기옥[30], 임재덕[31], 장인근[32], 장호익[33], 조택현[34]
제 15기 김기원[35], 김응선[36], 김기원[37], 남기창[38], 유동열*[39], 박영철[40], 박두영[41], 이갑*[42],전영헌[43]
제 23기 김경천*[44]
제 26기 이응준[45], 김준원[46], 신태영[47], 유승렬[48], 안병범[49], 홍사익[50], 이청천*[51], 박승훈[52], 이대영[53], 권영한[54], 민덕호[55],염창섭[56], 조철호*[57]
제 27기 김석원[58], 백홍석[59], 장석륜[60], 장성환, 박창하[61], 정훈[62], 윤상필[63], 유관희[64], 원용국[65], 김인욱[66], 김종식[67], 김중규[68], 남우현[69], 서정필[70], 이강우[71], 이동훈*[72], 이동혁*[73], 이희겸[74], 장기형[75], 장성식[76], 장유근[77]

하지만, 한국광복군 출신들은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의 정책에 불참하던 상태라 창군 작업에 관여하지 않았다.[78] 그래서 일본육군사관학교만주군관학교 출신자들이 창군 멤버가 되었는데, 이들을 미군정에 추천하여 선발한 것이 바로 이응준이다.(만군계는 최선임인 구만주군 원용덕 중령이 담당) 결국 창군의 대표적 주역 이응준[79]을 통해 대한제국군과 대한민국 육군이 연결된 셈이다.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당국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제 28호를 공포하고 군정청내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미군정당국은 1946년 1월 8일에는 사설군사단체의 해산을 명한 데 이어, 1월 14일에는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함으로써 군창설을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 국군 수뇌부는 한국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원로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광복군 계열에서는 중국군 소장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80] 장군이 초대 국방부장관이 되었고 일본 육사 15기로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 장군이 군정 때 초대 통위부장, 중국군 소장이었던 송호성 장군이 국방경비대 사령관[81]이 되었다.

일본군 계열에서는 일본육사 26기 출신인 이응준 장군이 군정청 군사고문을 거쳐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이어 채병덕, 신태영 장군이 참모총장, 국방장관을 맡았다. 만주군 계열에서는 원용덕 장군이 경비대 사령관을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이범석 장군은 자신이 광복군 출신이었고 국군의 육성에 있어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토록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한다.[82] 그리하여 초기 국군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일본의 교육배경을 가진 일본군계 장교들이었다.

결국, 한국군은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의 주도하에 기틀을 다지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미군 군사 고문이 자격으로 한국군 창설 작업에 직접 관여한 일본군 최선임이었던 이응준 대좌가 대표적이다. 미군정당시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는 일본군 출신 1명, 만주군 출신 1명, 광복군 출신 1명씩이 학생들을 추천하기로 했다. 일본군 최선임 자격으로 참가한 이응준 대좌는 이때 사위인 이형근 일본군 대위에게 군번 1번을 부여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통위부장에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동열[83]을 추천하여 관철 시켰고, 이응준 본인은 대한민국 초대육군참모 총장이 되기도 하는등 창군의 실질적인 주역이 되었다.

대한민국 육군문서로 바로가기

4. 교육 과정

대한제국군 밑에는 교육 기관으로 육군무관학교, 육군유년학교, 육군연성학교 등이 있었다.무관학교는 양성 교육을 담당했고 유년학교는 일종의 JROTC 같은 예비 학교였으며 연성학교는 장교나 부사관의 보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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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훈련대가 폐지되면서 장교 양성 기능은 1896년 11월 11일에 육군무관학교로 넘어갔다. 학도는 18세에서 27세 사이의 청년을 천거(추천)로 선발했다. 교육부가 1904년 2월에 세워지자 교육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에 교육부가 폐지되자 군부에서 지휘 감독했다. 교육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1904년에 육군유년학교가 생기면서 유년학교를 거쳐 무관학교에 들어온 경우는 6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초기에는 한국어로 된 교재가 없어 외국어로 공부했으며 전술학과 화기학, 학술학[84]을 가르쳤다.

5. 동문



[1] 고종 실록에도 등장한다. 高宗 18卷, 18年(1881 辛巳 / 청 광서(光緖) 7年) 6月 20日(庚戌) 2번째 기사 일본인 호리모도 레이조가 우리 군사들의 교사가 된 것을 일본 외무성에 통지할 것을 윤허하다 統理機務衙門啓: “日本敎師堀本禮造, 向因公使所懇, 方留敎場, 鍊習兵士, 而此合有往復於該國外務省。 請撰出書契, 下送萊館。” 允之。[2] 1831년 - 1899. 남북 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했고 미군을 전역한 뒤에 이집트군에서 대령을 지내기도 했다.[3] 주일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인물이었다.[4] 을미사변 연루자. 뒷날 초대 가라후토청 장관, 일본군 중장까지 지냈다. 육군대신, 즉 육군 장관을 맡기도 했다.[5] 대한 제국군은 지금의 한국군처럼 장성급이 대 - 중 - 소 - 준 4단계가 아니라 정 - 부 - 참 3단계였다. 준장이 존재하지 않았다.[6]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東天) 신팔균, 경천(擎天) 김광서(金光瑞). 청천(靑天) 지석규(池錫奎)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남만주 삼천(南滿州 三天)이라고 불렀다.[7] 육군사관학교에 지청천 장군의 흉상을 세워야 하는 근거는 국군의 정통성 확보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8] 상하이에서 사망, 차남 노태준 광복군으로 이어간다.[9] 6.25 전쟁때 납북된다.[10] 연해주로 이동, 무장해제 당해서 소비에트 연방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사망[11] 한국광복군 총사령관[12] 일본육사 출신에서도 독립군 진영으로 뛰어든 사람만해도 한 기수에 많아봤자 2명 밖에 안되었다. 1919년 기준으로 노백린 장군이 40대 중반 유동열 지사가 40세였고 황학수가 42세였다. 그 당시 상당히 고령이었던 것을 보면 독립운동세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3] 한일합방 이전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한 유학생중 21명이 게이오 의숙, 세이조 학교를 거쳐 1898년 12월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14] 대한제국군 부령[15] 대한제국군 정령, 임시정부 국무 총리 및 초대 군무총장 광복군 출신, 노태준의 친부, 중국에서 사망[16]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17] 대한제국군 정위[18]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중좌[19] 대한제국군 참위[20]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21] 대한제국군 참위[22] 대한제국군 부위, 경무청 경무관, 중추원 참의[23] 대한제국군 부령[24]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대좌[25] 대한제국군 정위[26] 대한제국군 참위[27] 대한제국군 정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차장[28] 대한제국군 참령[29]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중장, 중추원 참의[30] 대한제국군 정위[31] 대한제국군 참령[32] 대한제국군 정위[33] 대한제국군 참위[34] 대한제국군 참위[35]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중좌[36]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37]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중좌[38] 대한제국군 참령[39] 대한제국군 참령,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및 군무총장, 미군정 통위부장[40] 대한제국군 참령, 중추원 참의[41]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중추원 참의[42] 대한제국군 참령, 독립군[43] 대한제국군 부령[44] 일본군 중위, 독립군, 1942년 러시아에서 사망[45] 일본군 대좌, 육군 중장, 초대 육군총참모장[46] 일본군 대위, 육군 준장. 김기원(15기)의 동생이자 김정렬(54기)의 아버지.[47] 일본군 중좌, 육군중장, 3대육군총참모장, 4대 국방부장관[48]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49] 일본군 대좌, 육군 준장(추서)[50] : 일본군 중장, 육군대학교 35기, B급 전범으로 교수형[51] 일본군 중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52] 일본군 소좌, 만주군 상교, 육군 소장[53] 일본군 소좌, 육군 준장[54] 일본군 중위[55] 일본군 중위[56] 일본군 중위[57] 일본군 중위, 6.10 만세운동 중 체포[58]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59] 일본군 중좌, 육군 소장[60] 일본군 중위, 육군 대령[61] 일본군 대위[62] 일본군 중좌[63] 일본군 소좌[64] 일본군 대위, 육군 대령[65] 일본군 대위[66] 일본군 중좌[67] 일본군 대위[68] 일본군 중위[69] 일본군 중좌[70] 일본군 중위[71] 일본군 중좌[72] 일본군 소위, 3.1 운동중 물고문으로 사망, 건국훈장(애족장)[73] 일본군 중위, 독립군[74] 일본군 중위[75] 일본군 중위[76] 일본군 중위[77] 일본군 중위[78]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정식적인 국가정부와 군대로 인정받아 중국에서 귀국하기를 원했고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귀국할 것이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고 한다.[79] 한국광복군 지청천과 일본육사 동기이다.[80] 이승만과 친했으며 이승만과 같은 전주 이씨로서 왕족의식이 있었다.[81] 지금의 육군참모총장[82] 반면 광복군쪽에서는 배신을 한 셈이었다.[83]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 기존의 일본육사출신이 많은 육군과 적응하기 쉬웠을 것으로 판단된다.[84] 독도술을 배우는 지형학이나 기초적인 의학, 승마법 등을 가르쳤다.[85] 야구선수 정훈이 아니다